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기까지
아이의 문제로 상담을 받던 중, 나는 연극치료라는 낯선 과정을 접하게 되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내면을 몸으로 풀어내는 시간이었고, 신기하게도 직접 말로 털어놓는 것보다 훨씬 쉽게 감정의 중심에 닿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가장 좋아하는 책이 무엇인가요?”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미운 오리 새끼요.”
선생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눈빛은 마치 “그럴 줄 알았어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안데르센의 동화 속 못난 오리는 어린 시절 내 마음의 은신처였다. 처음 그 이야기를 읽던 순간, 나는 곧장 그 오리가 되었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채 외톨이로 남겨진 오리. 그러나 언젠가 자신이 백조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오리. 나는 그 마음을 너무 잘 알았다.
나는 특별히 불행한 아이는 아니었다. 부모님이 계셨고, 여섯 자매의 맏이로 자랐다. 하지만 내 마음은 늘 허전했다. 감정을 읽어주고, 다정하게 공감해 주는 어른은 없었다. 그 공백을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가 채워주었다. 나는 매일 주문을 외웠다.
“나는 미운 오리 새끼야. 하지만 언젠가 백조가 될 거야.”
아이에게 가장 큰 고통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경험이다. 그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은 의심을 불러온다.
“내가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
나 역시 그랬다. 노란 원피스를 입기 싫다고 고집하다 혼이 났던 기억, 귤 몇 개 몰래 먹었다가 심하게 꾸중을 듣고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던 기억, 누군가에겐 하찮은 에피소드일지 몰라도 ‘나는 잘못된 아이야’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나를 이렇게 규정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화풀이 대상이 될 수 있는 아이’, ‘의지할 곳 없는 아이’로. 그만큼 내 안의 빈자리는 컸고, 그래서 더 간절히 꿈꿨다. 언젠가는 백조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를. 다행히 내 곁엔 책이 있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빨간 머리 앤』 속의 소녀들은 나와 닮아 있었다. 외롭고 상처투성이지만, 꿋꿋하게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존재들. 나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버텨냈다.
사람만이 사람을 위로하는 건 아니다. 이야기, 책, 때로는 상상의 친구들조차도 우리를 살게 한다. 상처는 여전히 쓰라렸지만, 그 흉터들은 오히려 나를 더 깊고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영화〈스케어리 스토리〉속 한 대사가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이야기는 상처를 주고, 또 치유한다. 그 과정이 반복되면 결국 그것이 진짜가 되고, 지금의 우리가 된다.”
나는 아마 평생 ‘미운 오리 새끼’를 내 마음속에 품고 살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의미를 다르게 이해한다. 그것은 단순히 못난 오리가 백조로 변신하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상처받은 아이가, 그 상처를 견디며 살아낸 기록이다.
유치원에 다니던 아들이 내게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라고 말을 하는 순간, 나는 내 안의 미운 오리가 잠잠해지는 걸 느꼈다. 그토록 바라던 “백조로 인정받는 순간”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누군가 나를 백조라 부르지 않아도, 나는 이미 충분히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전엔 끊임없이 비교하고, 증명하려 애썼다. 사랑받지 못했던 기억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하지만 세월은 내게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사람의 가치는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생긴다는 것.
“나는 미운 오리 새끼였다.”
이 고백은 더 이상 부끄러운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내 삶의 출발점이다. 그 시절의 상처가 있었기에 나는 책 속 이야기에서 위로를 찾았고, 혼자서도 버틸 수 있는 힘을 길렀다.
백조가 된다는 것은 내가 어떤 존재나 상태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일이다.
내 안의 오리는 여전히 서툴고, 가끔은 외롭다. 하지만 그 오리 덕분에 나는 여기까지 왔다.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