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임대형, 2017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대담하기 짝이 없다. 죽음을 앞둔 중년 남성이 주인공인 흑백 영화라니. 시한부 선고에 더해 출생의 비밀, 크리스마스 같은 클리셰가 뭉쳐 있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뒷이야기를 어설프게 상상하는 대신 지금 보이는 장면에만 눈을 맞추고 싶어진다. 인물들의 표정과 마음, 금산과 서울의 풍경을 살피고 있노라면 느린 장면 전환이 사려 깊다. 그런데 감정이 깊어질 성싶으면 카메라는 뒤로 빠져버린다. 마치 “이야기가 진행되어야 하니 마음 추스리고 계속 보셔야죠” 하고 일으켜 세우는 것처럼, 영화는 내내 담백하고 무심하다. 어째서 내 마음은 이렇게 강렬하게 당겨오는가. 영화에 묶여 있다는 막연한 감각을 실타래 풀 듯 찬찬히 짚어본다.
어느 때보다 삶에 가까운 죽음의 시간
첫 장면에서 주인공 모금산(기주봉)은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마련해놓고 시작한다. 온통 새카맣기만 한 다음 장면이 결국 이 남자는 죽을 것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흑색이다가 또 백색인 것처럼.
늘 멈춰 있을 것 같았던 금산의 시간에 죽음이 손길을 뻗어오자 갑자기 시침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려온다. 큰 소리로 말을 해도, 엉엉 울어도 이 소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삶을 지연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금산은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을 선택한다. 기본적으로 그의 태도는 쌀쌀맞다. 서툴다고 표현하는 편이 맞겠다. 늘 혼자 걷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자전거 소년(신재훈)에게도, 수영장에서 말을 거는 자영(전여빈)에게도 순순히 대답하는 법이 없다. 아내의 죽음 이후로 그에게 관계는 약점이며 상처일 뿐이다. 주고받지 않으려는 수평한 마음이 금산을 지키는 동시에 가둬 버렸다. 새벽 세 시, 금산은 주먹으로 베개를 친다. 야속한 운명에 주먹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깃털이 터져 나온다. 금산의 주먹질이 멈추지 않는다. 어차피 금산은 죽는다. 어차피 죽는다면 깃털이 터지도록 베개를 쳐도 좋다. 무얼 해도 죽는 결말이라면. 금산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들고 출근길에 나선다. 매일 마주치는 자전거를 탄 소년 앞에서 요상한 춤을 춘다. 수영장에서 제 머리를 버튼 삼아 누른 뒤 입에서 물을 뿜는다. 죽음 앞에서 삶이 생동한다.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결심이 선다. 서울에 있는 아들 스데반(오정환)을 만나야겠다. 아니, 영화감독 스데반을 만나야겠다. 금산은 스데반이 아닌 그의 여자친구 예원(고원희)에게 전화를 건다. 아들 스데반을 현실 세계의 영화감독 스데반으로 끌고 와 줄 사람은 예원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만나
단편 영화 <만일의 세계>에서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로 이어지는 임대형 감독의 세계는 끊임없이 변주하는 동시에 맥을 이어간다. <만일의 세계>에 등장하는 어설픈 몽상가인 남성 캐릭터와 현실적인 여성 캐릭터의 구도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의 스데반과 예원으로 이어진다. 스데반은 현실로부터 도망치며 사는 삶이 관성이 된 인물이다. 아버지가 영화를 찍자고 하는 말은 그의 직업이 ‘영화감독’이라는 사실을 되새겨 주는 동시에 무척이나 이상적인 소리이다. 스데반은 자신의 우유부단함과 불안한 미래를 아버지의 탓으로 미루고만 싶다. 그는 아버지의 계획에 현실성을 운운한다. 금산의 제안을 수락하는 쪽은 오히려 담담하고 이성적인 여성인 예원이다. 그러나 그녀가 금산의 계획에 동조하는 이유는 이상적인 일을 꾸미는 마음 너머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금산이 그녀에게 자신의 병에 대해 털어놓는다. 배우가 되고자 했던 금산의 오랜 꿈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는 죽음에 성큼 가까워져 있을 테다.
예원과 스데반의 세계는 금산을 통해 조우한다. “아버지 괜찮을까, 우리는 괜찮을까.” 스데반이 현실에 발을 잠시 들이고는 제 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스데반은 이 불안이 예원의 마음에 달린 것처럼 생각한다. 예원은 처음으로 스데반이 현실을 알지 못함을 다그친다. “그런 걸 왜 네가 걱정해. 내 행복은 너한테 달린 게 아냐. 너는, 겁이 너무 많아.” 영화를 찍는다는, 누군가에는 현실적이고 누군가에게는 이상적인 순간에 세 사람이 만난다. 물리적으로 함께하더라도 서울에서는 분리되었던 스데반의 세계와 예원의 세계가 금산이라는 공간이자 사람에서 중첩된다. 그리고 그 틈에서 금산의 영화 〈사제 폭탄을 삼킨 남자〉가 만들어진다.
관계의 흔적에 대한 로드무비
세 사람은 기껏 서울로 향하면서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허허벌판에서 영화를 찍는다.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이었던 장소들이 새로이 의미를 가지고 사람들이 땅에 버려두었던 순간들을 붙잡아 머무르게 한다. 스데반은 예원과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땅에서 비비탄 총알을 주우며 “아직도 이런 걸 하고 노는구나” 하고 되뇌고는 어릴 적 비비탄 총을 쏘며 놀았던 과거를 회상한다.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것들이 아직 남아있다. 카메라는 아이들이 뛰어놀 것 같은 공터에서 바로 다음 순간 아파트 단지를 비춘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기억 속 존재하는 풍경에 대한 애정은 금산이 흑백의 무성 영화를 찍는 이유와 같다. 그는 아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끄집어내 기억하고 애도한다. 여기에는 세상에서 사라질 스스로의 자취를 남기고자 하는 금산의 소망이 담겨 있기도 하다.
잔인할 만큼 감정에 서툰 부자는 제 마음만큼이나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고집 센 두 사람의 마음과 시간을 봉합하는 것은 예원이다. 금산의 말마따나 ‘훌륭한’ 여성으로 그려지는 예원은 여행을 주도하고 운전대를 잡는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 촬영이 끝난 뒤 모금산은 홀로 서울로 떠나고 금산에 남은 스데반은 예원이 찍은 장면을 편집한다. 스데반에게는 스투디움만이 존재했을지 모를 미스터 모의 영화에 예원이 구멍을 뚫고 그 틈으로 마음이 모래처럼 쏟아진다. 아들은 비로소 울음을 터뜨린다. 아주 늦게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저를 찾아온다. 예원은 가만히 서서 그를 쳐다본다. 스데반의 모습이 어린 아들의 영상을 보며 강냉이를 우적였던 금산의 모습과 닿는다. 두 부자의 슬픔을 존중하는 듯 카메라는 그의 얼굴을 비추지 않고 바로 장면을 돌린다.
영화가 이어주는 마음들
챕터 5가 시작되면 일기를 읽는 금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필름을 거꾸로 돌려 영화의 처음 장면에서부터 일기는 시작된다. 모금산의 시점에서 재구성된 화면 속에는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강냉이를 씹으며 어린 스데반의 영상을 보던 날에는 아내가 꿈에 나왔다. 꿈속에서 그는 아가처럼 엉엉 울었다. 울 수 있었다. 딱한 사람, 아내가 그렇게 말한 것 같다. 아내가 죽은 지 15년이 지났다. 믿을 수가 없다. 그가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남자였어?”
상영회 직전의 장면에서 관객들의 시선은 전부 다른 방향을 향해 있다. 모금산이라는 남자를 기억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의 형, 이발사 아저씨, 아버지, 그리고 오래 전 사랑했던 사람. 멀리 떨어져 앉은 관객들의 모양처럼 모금산이라는 교집합은 느슨하게 사람들을 연결하고 있다. 놀랍도록 관계없는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에 아주 작은 소도시 금산에서 아주 작은 영화를 함께 보려고 한다. 금산은 이 시공간에 부재하는 한편으로 너무나 생생하게 존재한다.
<사제 폭탄을 삼킨 남자>는 금산의 아내가 좋아했던 찰리 채플린 식의 슬랩스틱 코미디이다. 저도 모르게 사제 폭탄을 삼켜버린 주인공은 폭발 버튼을 눌러 상황을 해결하려고 한다. 그런데 버튼을 누르려고 할 때마다 누군가에게 정중히 인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사람이 아닌 차 앞에서도 예외는 없다. 미스터 모는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낸다. 죽음을 예감하고 슬픈 표정으로 버튼을 누르지만 불발에 그치고 영화는 끝이 난다. 카메라는 우리를 영화 속 영화의 관객과 같은 위치로 만들다가도 훌쩍 영화를 관람하는 등장인물들의 얼굴을 비춘다. 자영이 푸스스 웃는다. 치킨집 주인은 미소를 띤다. 예원은 짐짓 긴장된 표정으로 있다. 영화 밖의 내 표정은 어떠한지 살펴보게 된다. 묘한 거리 두기를 뚫고 푼크툼이 다가온다. <사제 폭탄을 삼킨 남자> 너머로 울렁이는 감정은 열 명 남짓한 극 속의 관객들에게 저마다의 의미를 갖는다. 이 불행하지만 명징한 사실을 금산은 잘 알고 있다. 영화란 얼마나 사적인 매체인가. 그는 스스로를, 또 죽은 아내를 애도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선택했지만 모금산이 영화를 찍으며 담아낸 마음은 수많은 방향으로 관객들에게 와 닿는다. 분명한 것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 전해지리라는 믿음뿐이다.
<사제폭탄을 삼킨 남자>의 마지막 장면 위에 不發 이라는 글자가 떠오른다. 갈망하던 꿈을 포기하고, 사랑하던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평생을 외롭게 산 금산의 삶도 불발된 걸까. 다음 장면에서 금산은 병실 창문 너머 밝게 터지는 불꽃을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 희미하게 번지는 웃음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대답하는 것 같다. 지난한 삶이었지만 밝고 크게 빛나는 순간은 꼭 찾아오기 마련이다. 느리게 그의 표정을 살펴보면, 그를 삶으로 당겨주는 느슨한 얼굴들이 겹쳐 보인다. 검거나 회색빛이기만 한 것 같은 화면에서 흰 불이 반짝인다. 이도 저도 아닌 것들이 엮여 단단해진다. 금산의 외로움을 알아봐 준 자영도, 인사만 나눌 뿐인 자전거 소년도, 그리고 영화 밖의 내 삶도 그와 연결되어 있다. 영화와 함께 하는 한 우리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