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리지 않는 미스테리가 있다. 나는 어딜가든 놀림을 많이 받는다. 학생 때도 그랬고 군대에서도 그랬다. 직장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속한 조직에서 나는 늘 놀리기 좋은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내게 장난 걸기를 좋아했다. 혹은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들을 웃겨했다.
내가 남을 웃길 줄 아는 사람이란 말은 아니다. 나는 유머를 자유자재로 부릴 만큼 영리한 사람이 아니다. 물론 누군가를 웃겨야 겠다고 결심할 때는 있다. 그러나 그럴 때면 분위기가 더 없이 가라앉는다. 웃길라고 하면 전혀 웃기지 않은데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주변 사람들이 놀리며 재밌어하는 게 나다. 대체 어떤 이유로 나를 쉽게 놀리는 걸까. 안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 말에 맥락없는 딴지를 걸거나 장난을 치는 상대를 수도 없이 만나왔다. 심지어 내가 좀 어려운 위치에 있을 때도(선배라거나 상사라거나) 그런 일은 꼭 있었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 오래 고민해왔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연구라도 해서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나만 보면 웃음이 터지는 지인들에게 많이 물었다. “대체 뭐가 웃긴거예요?” 백이면 백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모르겠어욬ㅋㅋㅋ 그냥 웃겨욬ㅋ" 하는 수 없이 혼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스스로 세운 연구 가설들을 펼쳐보겠다.
내 행동이나 말투가 일반적이진 않을 것이다. 일반적이라면 그렇게 뚜렷한 계기도 없이 가는 곳마다 놀림의 대상이 될 순 없었다. 어릴 적부터 있었던 말 더듬이 떠올랐다. 어쩌면 말 더듬 때문에 생긴 소심함이나 머뭇거림 같은 게 눈에 띄는 말과 행동으로 나타났을 지 모른다. 시도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말 더듬은 나를 쉽게 긴장하게 했는데 그게 재밌게 보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내 표정이나 몸짓이 웃긴 걸지도 모른다. 나는 자주 뜬금없는 포인트에서 불편을 느낀다. 가령 쇼파에 앉을 때 말인데, 그럴 때 팔을 도대체 어디다 둬야할지 모르겠을 때가 있다. 다리를 꼬아야 하는지 조금 벌려야 하는지. 어느 쪽이 자연스럽고 편한지 알 수가 없어 허둥댈 때가 있다. 표정도 마찬가지다. 종종 도저히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모르겠다. 시선을 받거나 카메라 앞에 서면 특히 그렇다. 스스로 느끼기에는 분명 멋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사진을 보면 우스꽝스러워 봐주기 힘들 정도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때가 많다. 솔직히 나라도 그런 표정을 하고 있는 남을 보면 금방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혹은 걱정이 너무 많아서 웃긴 걸지도 모른다. 정말 어릴 적부터 그랬는데 나는 누군가의 기분이 상하는 일을 극도로 걱정했다. 특히 남이 나 때문에 실망하거나 삐치거나 화가 났다고 생각하면 너무 불안했다. 불안을 넘기기 위해 나는 늘 나서서 물어보곤 했다. “혹시 화났어?” 대부분의 불안은 실체가 없었다. 그런 걱정을 표현하면 상대는 뭔 소리냐며 웃었다. 나도 나이를 먹을만큼 먹어서 더이상 예전만큼 걱정이 많지는 않지만(그래도 많다) 나만큼 걱정이 많은 어린 친구를 보면 웃음이 나온다. 내 앞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세운 가설은 이 정도인데, 쓰고나니 연구라고 하기에는 빈약해 보인다. 그치만 어떤 공통점은 보이는 것 같다. 허술함과 어설픔이다. 가끔 만나게 되는 내공이 깊은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에게는 무언가 아우라가 느껴진다. 곧은 자세에서부터 안정감이 있고 말투와 손짓 하나하나에 자신감이 넘쳐난다. 나는 정확히 그와 반대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아우라는 커녕 어딘가 넘어질 것처럼 휘청휘청 불안불안하다. 내가 결혼 소식을 전했을 때 직장 동료가 한 얘기가 생각난다. “두현님 입장할 때 같은 방향의 팔과 발이 동시에 나갈 것 같은 신랑 1윈데… 벌써부터 걱정되네요.” 나를 볼 때 느껴지는 불안감을 표현하자면 이런 걸까.
가설을 세웠으니 이 부분들을 중심으로 고치면 될까. 잘 모르겠다. 일단 고치는 게 가능한지 알 수 없다. 평생을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정말 이 허술함을 고치고 싶어하냐는 것이다. 잘 모르겠다.
세상은 허술한 사람을 어떻게 대할까. 조소를 보낼까? 밟고 올라서려 할까? 프로 허술러인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허술한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 허술한 상대는 자신을 편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놀리거나 농담을 던질 만큼 경계를 풀고 마음을 놓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말을 잘 하는 타입이 아닌데다 낯도 가려 어떤 조직에 가든 잘 어울리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사람들과 친해지기 시작했는데 그건 어김없이 그들이 나를 놀리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다가가지 못한 내게 그들이 다가온 것이다. 말로는 놀리지 말라고 했지만, 그렇게 다가온 그들에게 나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고백컨대 나는 계속 놀림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대하기 편한 상대로 남고 싶다. 걱정되는 건 허술해 보이더라도 제 할 일은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나이가 들어갈수록 만만해지기란 어려워 질거란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제 할일은 하는 허술한 사람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계속 놀림받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며 30대를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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