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말의 일기
매일 아침마다 그날의 온도를 시간별로 확인한다. 어차피 네덜란드에서 며칠 뒤의 일기예보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기 때문에 그저 몇 시간 정도의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얼마 전, 전 유럽에 heat wave가 불어닥쳐 40도 가까이 육박하더니 또 20도(여름 평균 온도임)까지 내려갔는데 오늘은 다시 해가 나고 덥다고 했다.
하우스메이트와 주말마다 집 청소를 하기로 했고, 오늘은 내 차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오전에 분갈이를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마켓(주말 장)에 가야 한다. 매주 토요일마다 열리는 장에 이제는 꼭 살 것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들른다. 제철인 과일이나 떨어진 야채, 계란과 치즈, 가끔은 튀긴 오징어나 홍합 같은 걸 사는 게 전부지만 오늘은 흙을 살 거야. 10L짜리 유니버설 흙.
식물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직 동물을 키울 수 있는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식물을 키울 수 있을 정도의 안정이 내게 있다. 이 집에 이사 오고 나서 원래 집에 있던 식물에 내가 데려온 식물들을 더해 하나씩 둘씩 늘리다 보니 어느덧 스무 개 정도 되는 것 같다. 아침마다 녀석들 상태를 확인하고 흙이 마른 것 같으면 물을 듬뿍 준다. 초보 시절에는 매일매일 물을 주고 싶어서 애달파하는 집사였지만, 이제는 안다. 꽤 많은 식물들이 과습으로 죽는다는 것을. 어제 지나가던 길에 전시용 토분을 싸게 팔길래 두 개를 냉큼 집어 왔다. 이탈리아산 토분은 식물에게도 좋지만 영롱한 주황색이 진짜 예쁘다. 방에 둔 스킨답서스 화분은 코로나 시절 내 방에서 물과 빛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 뿌리가 꽉 찬 것 같았다. 새 화분에 갈아줘야지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아침의 동선은 이러하다.
일어나자마자 정신을 차리고, 집 앞 마켓에 가서 꽃을 파는 부부에게 흙을 산다. 2.25유로, 가격은 예전에 봐 두었다. 현금이 없으니 카드로 계산이 되면 좋겠는데. 시장에서는 3유로 이하는 카드 계산을 잘 안 해주려는 경향이 있다. 이해는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현금 쓸 일이 많지 않아서 나 같은 사람은 카드 계산이 되는지를 꼭 물어야 한다. 그리고 오가는 길에 싱싱한 과일이 있다면 산다. 납작 복숭아나, 천도복숭아, 체리 정도가 요즘 많이 나오더라. 아니면 토마토, 오이 같은 채소도.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청소를 한다. 주말 아침이 시끄러울까 봐 어제 저녁에 청소기는 밀어두었다. 부엌 상판과 화장실 세면대를 닦을 예정이다. 매번 청소를 할 때마다 생각한다. 타인과 함께 사는 것의 갈등은 청소의 기준으로부터 시작하는 거 아닐까 하고. 도대체 3주에 한 번 하는 청소를 왜 제대로 하지 못하는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니까.
청소를 마치고 나면, 방에 있던 화분들을 들고 테라스에 나간다. 분갈이할 녀석은 둘이지만, 하나씩 더 큰 화분에 옮기려고 하니 총 5개의 화분을 옮겨야 한다. 물꽂이 해두었던 몬스테라에게도 새 집을 주어야지. 흙을 사기로 한 건 적절한 선택이었다. 오늘의 BGM은 위켄드 모닝 인스트루멘탈 재즈. 땡볕에 쭈그리고 앉아서 크고 작은 화분 다섯 개를 옮겼다. 다들 뿌리가 화분에 꽉 차서 바닥에 태풍처럼 돌돌 말리는 중이었다. 뭐 이렇게 잘 자랐지. 그러니까 그렇게 물을 열심히 줘도 순식간에 말라버렸구나. 꺼낸 뿌리를 털어 정리하고, 새 화분 밑 배수구멍을 부서진 다른 토분 조각으로 막고, 배수층으로 하이드로볼을 조금 넣어준다. 그 위에 흙을 살짝 덮고 옮길 식물을 넣고 그 위에 영양 만점 새 흙을 조심스럽게 부어주면 끝. 가을이 오기 전에 분갈이를 해서 다행이다. 그러고 보면 벌써 7월 말. 금세 여름이 지나가버리고 말지 않을까. 막상 엄청 여름을 즐기는 것도 아니면서 왜 아쉬워하지. 해가 길면 하루가 길어서 시간이 늘어난 기분이라서 그런가.
한 시간 가량 볕에 있었더니 어쩐지 얼굴이 뜨끈하게 익어버린 것 같다. 선크림을 깜빡 했었다. 옷에 흙을 탈탈 털고, 화분을 제자리로 옮기고, 부엌에 가서 싱크대의 물 빠짐을 다시 확인한다. 엊그제 물이 잘 내려가지 않아서 약품으로 뚫었는데도 어쩐지 시원치가 않다. 요리조리 둘러봐도 딱히 다른 수는 없어 보이는데, 물을 쓸 때마다 꾸울럭- 꾸울럭- 내려가는 소리가 어쩐지 체할 것처럼 불편하다. 이걸로 안 뚫리면 환불해주겠다고 선전하는 강력 화학물 같은 것으로 뚫었는데도 이 정도라면 뭘 어째야 하는 걸까. 아니야, 일단 이 고민은 접고 점심을 먹자. 오후에 미팅이 있다. 어제 먹고 반쯤 남겨둔 두부-야채-미소-짜글이 비슷한 무엇을 데운다. 아침에 사 온 납작 복숭아 두 개와 방울토마토 몇 알을 급하게 입에 넣고, 샤-워. 클리어. 먼지를 뒤집어쓸만한 일들은 전부 해치웠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줌 미팅이다. 격주로 하는 미팅에서야 나는 한국인과 한국말로 대화할 수 있다. 목적을 가지고 만난 터라 스몰토크를 많이 하는 것은 아니지만도, 묘하게 안심이 되는 지점이랄까 그런 게 있다. 나는 이런 감각을 마주할 때 특히 더 주의하는데, 분위기에 못 이겨 긴장을 놓치면 내가 언제든 뿌엥- 하며 퇴행적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사람들이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내가 자괴감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하지 않아야 할 말들을 털어놓고 나면 당시에는 시원한 것 같아도 뒤돌아서면 곧바로 후회하게 된다. 말을 줄여야 한다. 실수하지 않으려면. 나는 늘 내가 좀 못미더워. 그래서 말 대신 자꾸 글을 쓴다. 0과 1로 이루어진 세상에서는 언제든 수정을 계속할 수 있다.
그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꽤 흥미롭다. 우연찮게도 모두는 각자의 '똥을 밟지 않는 안내서' 라던가 '똥을 피할 수 있는 지도' 같은 것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거기 가면 똥이 있어요, 그러니까 주의하세요! 라던지, 내가 똥을 밟아 봤는데, 죽지는 않고요, 또 잘 살 수 있어요. 하는 말들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 이 인류애적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내 뒤에 혹시 따라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같은 자리의 똥은 밟지 않았으면 하는 이 선의들을. 똥은 역시 가능하면 안 밟는게 최고다. 그런데 또 세상엔 똥이 너무 많지. (물론 여기서 똥은 은유입니다*)
이제는 외로움이나 쓸쓸함 같은 기분보다 고립되었다는 감각이 더 강력하게 다가온다. 나는 많은 것들로부터 고립되었다고, 자주 느낀다. 그것은 내 선택으로부터 비롯되었으므로 책임 또한 내게 있지만 어떤 날엔 무한한 연결을 느끼고 그 안에 누군가와 함께이고 싶다. 한국말이 어눌해지는 것 같아서 초조해지는 날들 사이에서 결국에 '나는 틀리지 않았다'라고 명료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