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안부를 묻습니다
안녕, 밤이 길어지는 날들이에요.
네덜란드는 유럽에서도 북쪽에 가까운 편입니다. 겨울이 되면 완전 위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만큼 해가 짧지는 않지만, 확실히 한국보다는 해가 짧아지죠. 어느 정도냐 하면, 아침 9시가 다 되도록 느지막히 눈을 떠도 여전히 어둑하고요, 잠깐 점심을 먹고 나면 서너 시부터 다시 어두워지거든요. 미리 단단히 대비를 해두지 않으면 북유럽의 겨울은 꽤 두려운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가거든요. 한 해의 가장 어두운 시간들을 지나고 있어요.
매년, 연말엔 늘 그렇지만, 한 해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가잖아요. 세세하게 따져보면 할 말은 많습니다만, 커다랗게 퉁 쳐보면 그래요, 항상. 올해에 뭘 해냈더라. 한 것 없이 지난 것만 같고.
올해 제가 있는 곳에서 가장 큰 대외적 변화는 아마 코로나의 경계해제와 우크라이나 전쟁일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한국에 삼 년 만에 다녀온 일, 다녀와서 두 번째 코로나에 걸린 일, 그리고 처음으로 밖에 걸린 우체통에 내 이름이 걸린 아주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는 점을 꼽겠습니다. 완전히 텅 빈 새 집으로의 이사는 너무 고단해서 어떻게 여름이 겨울이 되었는지 모르게 시간이 지나가 버렸어요. 글자로 써 두고 보면 그렇게 별 일 같지 않은데, 생각보다 더 큰 일이더라고요. 그리고 전쟁이 계속되는 통에 유럽에는 전체적으로 가스비가 많이 올라서 무척 쌀쌀한 겨울을 보내게 될 것 같습니다. 인플레는 어디든 있겠지만, 장을 보면서 같은 값이던 휴지나 커피, 계란 같은 생필품들의 값이 계속 치솟는 걸 지켜보는 일이 쉽지 않네요.
이사때문에 주변 친구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완전히 혼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거든요. 완벽하려고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도(어차피 시간이 걸리는 일들이라), 지금 당장 아무거나로 집을 채우고 싶지 않은 한 인간은 애를 먹습니다. 지난 몇 년간 쉐어하우스에 사느라 욕망에 충실해보지 못했거든요. 취향과 돈과 시간을 어떻게든 절충해보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만) 날씨가 추워지고 밤이 길어질수록 저는 그저 집에서 뜨끈한 물을 채운 고무 팩을 끌어안고 밖을 나가지 않게 되네요. 집을 제대로 채우기엔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것들을 겨울이 오기 전에 끝내 두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저녁은 감자 베이컨 구이를 해 먹을 예정입니다. 냉장고가 120L 짜리라 아주 작아서, 자주 장을 보고, 또 자주 채운 것들을 비워줘야 해요. 재료들을 상하지 않게 해 먹고 썩혀서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듭니다. 장을 볼 때에도,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로 뭘 만들어 먹을지 정할 때에도요. 덕분에 저는 늘 위로 한 뼘쯤은 펼쳐지는 백팩을 메고 다닙니다. 장을 보려면 큰 가방이 항상 필요하거든요.
올해도 붉은 잎의 포인세티아 화분 하나를 샀고요, 종이로 된 별 조명 두어 개를 슬며시 벽에 걸어 봅니다. 식탁엔 작은 초도 켜고요. 식물과 노란색 조명과 초만 있다면 집 안을 따뜻한 분위기로 만들어주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특히 긴긴 밤을 보내야 하는 겨울에는. 테이블 램프와 초 하나를 켜 둔 식탁에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면 반대편 끝에 올려둔 포인세티아 잎이 작게 흔들거려요. 저 빨갛고 예쁜 잎은 작은데도 강렬한 존재감으로 크리스마스 시즌을 빛내줍니다. 그래서 매년 이맘때쯤엔 꼭 포인세티아를 사게 되는 것 같아요.
열흘 정도가 지나면 밤이 가장 짧은 날이 지나가요. 그게 ‘동지’인 줄, 저는 오래도록 몰랐답니다. 밤은 동지를 시점으로 다시 길어질 테니, 조금만 더 견뎌 보기로 하고요. 아니, 견디는 것 말고 잘 지내보기로. 견디는 건 이미 너무 많이 했어.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을 이제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거예요. 하지 못한 말들은 안에서 어떻게든 썩어 독이 되더라고요. 몸에 그런 독이 너무 많이 쌓여서, 저를 너무 쉽게 갉아먹습니다. 곰팡이가 낀 벽엔 뭘 덧칠해도 다시 곰팡이가 생겨나는 것처럼. 그걸 완전히 없애려면 매일 환기를 시켜주거나 벽을 다 뜯어내 단열 공사를 꼼꼼히 다시 해주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저에게 공사를 해 낼 여력은 없어서, 자주 환기를 시켜주려고 노력합니다. 생각의 환기요.
적어도 내가 나를 미워하지는 말자. 가족이나 친구를 대하듯이. 보통 가족이나 친구에게 내가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 같아, 하고 울상을 짓는데 '역시 넌 쓰레기야'라고 말하진 않을 테니까.
밤이 긴 날들에는 노란 불빛이 길어지고요, 그러면 저는 생각이 많아집니다.
일 년여 간 미뤄왔던 일들을, 어떻게든 해내 보려고 해요. 정말 해내야 할 때가 온 거죠. 잘하고 싶어서 그래요, 늘. 잘하고 싶으면 부담이 되고, 그러면 왠지 겁이 나서 쳐다보기도 싫어지고, 그러다 보면 점점 멀어지는 거죠. 자주 보고 친근해야 쉽게 덤빌 수 있는 건데. 막상 하면 별거 아닐지도 모르는데.
아, 그리고 내년에는 메일링 서비스를 시작하고 싶어요. 네덜란드에서 보내는 편지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편지 쓰기를 아주 좋아하고, 어딘가에는 네덜란드에서 보내는 일기 같은 소소한 편지를 궁금해할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일단은 정기적으로 쓸 자신은 없어서 비정기로 시작해볼 예정입니다. 더 구체적인 계획이 생기면 업데이트하도록 할게요.
당신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각자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지는 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