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HOW ARE YOU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틂씨 Feb 15. 2023

햇빛을 보면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지니까

어쩐지, 그냥, 별 이유도 없이





안녕,

오늘은 해가 너무 좋더라고. 이제 더치가 다 되었는지, 해가 나면 까무러칠 듯이 기뻐. 그동안 겨울이라 내내 비가 오고 흐리고 구름이 끼고 그랬거든. 해가 짧기도 했고. 동지가 지나고 한참 만에야 드디어 아침에 해가 뜨는 걸 볼 수 있게 되었어.  


새로 이사한 집 거실이 북향이라 늘 쓸쓸하고 춥다고 그랬었잖아. 그래도 다행히 방은 남향이거든. 바로 앞에 작고 귀여운 테라스도 있지. 그래서 해가 나면 있잖아 쨍하게 창으로 빛이 들어 침대를 소독해 준다구. 그 빛이 얼마나 반갑고 좋은지. 너무 살림하는 사람 같은가. 사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살면 자기의 일상을 꾸려나가야 하는 거고, 그럼 그게 살림이지 뭐. 아무 일이 없는데도, 아침에 일어나 창으로 빛이 든다는 사실 만으로 나는 이렇게 기운이 펄펄 나. 누구에게든 말을 걸고 싶고.


방 한구석에 작은 서랍장과 전신 거울을 놓아두었거든. 거기 서서 가만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보면 요새 부쩍 는 흰머리가 보여. 삼십 대의 엄마가 맨날 흰머리 늘어난다고 걱정했었잖우. 꼭 앞머리 주변에만 얼굴 선을 따라 흰머리가 늘고 있다고, 속상해했잖아. 나는 엄마처럼 키우고 있는 자식들도 없는데 엄마랑 똑 닮은 그 자리에 흰머리가 자라나는 거 있지. 한 두해 전만 해도 가끔 하나 생기면 뽑고 그랬는데, 요샌 숫자가 부쩍 늘어난 걸 보면 엄마 생각이 나더라고. 어떤 유전자인지, 뭐 이런 거까지 닮아.


나이가 드나, 싶네. 밤새는 게 어려워지고, 술이라도 마셨다 하면 하루가 꼬박 들고, 건강검진을 오랜만에 했더니 여기저기 폴립과 결절들이 나를 기다리고. 그런 순간순간에 엄마 생각을 해. 엄마가 젊었을 적, 동생과 은은한 에메랄드 빛이 나던 조금은 끈적한 장판 위를 굴러다니던 일들 같은 거. 잠옷 바람인 채로 남향이던 베란다에 해가 들면 그 앞에 가만 앉아 햇볕을 쬐던 순간들 같은. 몰랐는데, 엄마가 해주던 뜨신 밥을 먹고 해가 잘 드는 집에서 아침에 눈을 뜨는 것만으로도 매일 일종의 치료가 되고 있었던가봐. 얼마 전에 어떤 드라마를 봤는데 좋은 집에 살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집에 오면 웬만하면 치유가 된다는 거야. 맞는 말인 것 같아. 웃풍도 곰팡이도 소음도 없고, 하우스메이트와 월세 걱정 없는 좋은 집을 가질 수 있으면 아마 결혼하는 인구도 줄어들걸? 그냥, 열 살 때쯤 살았던 우리 집 생각이 가끔 나. 그 시절의 엄마와, 나와, 동생의 일상. 그 생각을 하면 왠지 편안해지고, 그립고, 뭔가 극복되는 것도 같고.


아니, 나는 죽고 싶지도 않고, 꼬박꼬박 굶지 않고 끼니를 챙기고, 어떻게든 일상을 버텨나가려고 노력하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제자리인 것 같지. 희망이 보이는 순간들은 너무 잠깐이라서 금세 햇빛처럼 사라져 버려. 그 기분을 붙잡고 싶은데, 조금이라도 기대 힘을 내고 싶은데, 금세 사라져.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밖에 나가서  마음을 먹고 양모 담요를 샀어.  생일이니까  럭셔리한 생일 선물로 치자! 하면서.  동네 가스비가 너무 올라서 집이  쌀쌀하거든. 한국도 그렇다며. 보일러 온도를 18도에 겨우 맞추어 놓았는데 그마저도 올해 가스비가 얼마나 나올지를 몰라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고 있어. 사계절용 오리털 이불속으로 들어가도 처음엔 몸이 덜덜 떨리도록 추울 ,  위해서 이렇게 살고 있나 싶기도 해. 그런데 지나가다 상점에 디스플레이 해둔 엄청 예쁘고 두툼한 양모 이불을  거야. 스칸디나비아 스타일 디자인, 버진  100%, 쨍한 오렌지 색이 너무 튀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실은 눈에 자꾸 아른거려서. 무난한 베이지나 회색 패턴을 살까도 생각해봤는데 어쩐지 지루할  같더라고.  담요를 가진다고 해서  엄청 행복해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삶의 질을 약간 올리고 보는 즐거움에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구석에 있었어. 그동안 뭐든 '결정되고 나면,' 하고 미뤄왔던 모든 것들을 그만 미루고 싶어 졌거든. 왜냐면 드디어 장기 비자를 받았으니까. 너무 오래 걸렸지, 이게 뭐라고.


햇빛을 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광합성을 하는 식물 같아, 하니 엄마는 심드렁하게 다른 사람들도 그래, 하고 카톡으로 답했지. 아니야,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야. 그저 햇빛이 났다는 이유만으로 뜬금없이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뻔했다니까! 근데 웃기지, 나는  말을  직접 못하고 여기다 적어. 으이그.



다음번에 햇빛이 나면, 진짜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 일이야.




매거진의 이전글 밤이 길어지는 날들이에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