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전 속 의식의 흐름
늘 최대치의 안정을 찾아 갖은 애를 쓰다 보면, 결국 방 안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게 된다. 주변의 모든 것이 일종의 자극이 되어 나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윗 집 아저씨의 신발을 신고 오래된 나무 바닥을 걷는 삐걱대는 소리와 발자국 소리도,
옆집 젊은 청년의 둠둠둠 심장을 울리는 클럽 음악의 낮고 강한 우퍼 스피커의 비트도,
반대편 옆 집의 새로 키우게 된 새끼 강아지의 높고 (끔찍한) 낑낑 깡깡 짖어대는 소리도,
굳이 컴플레인을 위해 메모를 하고, 노크를 하고,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와 신고의 과정을 더치로 찾아보고 나서야 겨우 집 안에 고요히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오래된(100년 된) 거물의 부실한 방음 덕분에 창 밖에 도로를 울리는 음악을 튼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심장이 쿵쿵대고, 간격이 엄청난 현관문 틈으로 마리화나 냄새가 흘러들어 오는 것 같을 때면 집 밖에 어떤 노숙자가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괜찮은 마트는 꽤 멀어서 자전거를 타야 이동할 수 있으므로 평소에 필요한 생필품과 먹거리들은 수시로 포스트잇에 적어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트에 갔을 때 백 퍼센트의 확률로 까먹을 테니까. 괜히 이상하게 식욕을 자극하는 쓸데없는 간식을 사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신선한 생 야채나 키친타월은 어쩐지 식욕을 당기는 상품이 아니라서.
친구가 운영하는 작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반납의 독촉을 받게 되면서 사회과학 책을 세 권이나 한꺼번에 읽었더니 갑자기 마구마구 한글 책이 읽고 싶어졌다. 한 달 반이란 시간에도 쉽사리 끝내지 못한 이유는 아무래도 여전히 책을 (특히 인문/정치/사회사상과 관련된 책이라면 더더욱) 영어로 읽는 일이 쉽고 자연스럽지가 않아서 그렇다. 일처럼 고돼. 미루고 싶다. 그 책 어땠어? 하는 친구의 물음에 답할 말까지 생각해 내려면 허투루 볼 수도 없으니까.
대신 오랜만에 사이버 도서관에 들어가 빠르게 책을 골라 열 권을 채워 넣었다. 이걸 다 읽어치워 버릴 테다. 다운은 왜 이렇게 오래 걸려. 폰은 7살이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요즘엔 뭐 하나하나 안 되는 것들이 많아졌다. 툭하면 최신 ios가 필요하다는 팝업이 떠서, 취소를 눌러주어야 끝이 난다. 여하튼 책 한 권 다운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은데, 이거 정상인가. 인터넷 속도의 문제인가.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 중에 재밌고 알찬 책은 몇 권이나 될는지. 열흘은 길다면 길지만 짧다면 또 꽤 짧다.
며칠간 크림 파스타, 크림 뇨끼, 까르보나라, 고르곤졸라 치즈 파스타 같은 것들을 돌아가며 해 먹다가 오늘은 매운 떡볶이를 만들었다. 인생은 단짠 단짠, 느끼한 것과 매운 것, 과일과 과자처럼 서로를 보완해주어야 한다. 뭔가 질리면 색다른 걸 제공해주어야 해. 부엌에 원하는 식기들을 채우고, 좋아하는 접시를 골라 그날의 메뉴를 스스로에게 제공한다. 꼼꼼하게 새로 산 그릇의 가치를 모르는, 살림에 요만큼도 관심이 없고 조심성도 갖다 버린 룸메가 내 접시를 깰 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이것도 안정에 속할까?
결국 모든 것이 나의 통제 안에 들어온다는 것. 그 감각이 너무 중요해서 이제껏 종종 댔다. 이런 감각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것이 너무 중요하다. 일종의 강박에 가깝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내가 그렇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이 감각이 부족할수록 나의 불안은 폭발하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옆집 개가 새벽에 불쑥 낑낑대며 나를 깨우거나, 반대편 집 남자애들이 밤중에 흥에 겨워 클럽 음악으로 나를 놀래키지 않았으면 좋겠어. 책을 읽고, 끼니를 해결하고, 가끔 듣고 싶은 음악을 듣는 일이 방해받지 않고 싶다. 원하는 것은 그 정도의 안정과 평온인데. 이 고요에 가까워질수록 그 관성을 깨고 싶지 않은 마음이 된다. 친구들을 초대하려다가도 멈칫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상대하는 데에는 너무 큰 에너지가 들어서. 그걸 소비하려면 또 혼자 가만히 충전해 내야 할 에너지가 너무 양이 많아서. 어쩌면 나는 에너지를 아끼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위해서랄 것도 없이, 생존을 위해서.
언제부터 이렇게 에너지가 바닥이었지. 겨우 현상 유지만 하고 있다. 수면 위로 잘 떠오르질 않아. 까딱하면 가라앉을 것 같다. 어느 날 전문가가 이것은 기분부전증입니다 하고 설명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뭔가 정답이 결정되어 있으면 좀 쉽지 않으려나. 이것도 착각이겠지.
겨울이 내내 추웠던지 언젠가는 발가락이 자꾸 한 두 개씩 퉁퉁 붓고 붉게 부풀어 오르길래, 친구에게 물어보았더니 동창(chilblains)인 것 같다고 했다. 검색해 보니 맞는 것 같아. 원래도 수족냉증이 심해서 집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발 끝이 자주 보라색으로 변하곤 하는데, 그걸 견디는 게 쉽지 않았는지 요새 종종 발 끝이 부어올랐다. 신발을 신으면 그 옆의 발가락이 부은 발가락을 밟지 않기 위해 애쓰느라 이상한 걸음걸이가 되곤 했지. 동창이라니, 처음 듣는다. 사지 말단이 자꾸 추위에 노출되면 생기는 현상으로 동상만큼 심각하지는 않지만 염증이 발생해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하는 질환이란다. 뜨거운 물로 자주 샤워를 해서 몸을 풀어주고, 발도 따뜻하게 혈액 순환을 시켜주며 지속적인 노력을 들이고 나서야 며칠 만에 가라앉았다. 이제 몸이 자꾸자꾸 식물처럼 돌봐주지 않고 방치한다 싶으면 갖가지 증상으로 놀래킨다. '나를 잘 돌봐, 놓치지 말고' 재촉하는 것 같다. 스스로를 돌보는 데에도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든다. 어떤 힘을 더 짜내어야 다른 일까지 해낼 수 있는 거지. 불확실성이 지긋지긋해진 나는 그것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점점 더 집 밖을 나가지 않게 되었다. 안정은 결국 고립이 되어 가는 것 같고. 이게, 맞아?
한국의 부모님 집에 있을 때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를 해결하고 뒤돌아 보면 다음 퀘스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쪽의 소음이 잔잔해지면 저쪽에서 실버피쉬(좀벌레)가 기어 나오는 것처럼. 가라앉아 있을 여유도 없어.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 생긴다. 장을 봐야 하고, 전구나 드라이버 따위를 사러 나가야 하고, 아직도 채우지 못한 중고 가구를 보러 다닌다. 한국어로도 녹녹지 않을 어떤 일들을 영어로 바꾸고 다시 더치로 검색해보아야 할 때, 진이 빠진다. 오른 가스비를 감면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주변에게 묻고, 오븐을 연결하려면 어떤 전문가를 불러야 하는지 수소문한다. 이쯤이면 서바이벌 스킬이 좀 늘은 것도 같은데, 그것만으로는 늘 다 채워지지가 않아. 끝이 없을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거 말이야.
아침에 잠에서 깨었을 때, 침대에 앉아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아? 이렇게 사는 거? 이게 내가 원하던 그거 맞아? 정말 괜찮은가, 나. 이대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