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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Jul 26. 2023

안녕, 오랜만에 반가웠어

[Letter Series] 테디베어를 닮았던 B에게




꿈에 나왔더라고.

적당히 나이가 든, 하지만 언제나처럼 푸근한 테디베어 같은 모습으로.


엄청 반가웠어. 거의 십 년만인데도 여전히 편안하더라, 학교 다닐 때처럼. 당신은 언제나 학교 도서관에 가면 볼 수 있는 사람이었잖아. 동그란 몸매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동그란 얼굴로 웃으면서. 그땐 그 모습이 좋았어, 그냥. 그래서 괜히 음료수를 사달라 조르기도 하고, 자리를 맡아주기도 하면서 도서관에 갈 때마다 주변을 서성대곤 했지.


실제로 당신의 소식을 최근에 들은 적은 없지만, 미국에서 박사를 끝마치고 당연하게도 결혼해서 평범한 듯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꿈속에서 마주쳤는데도 의아했지 뭐야. 그래서 뭐야, 왜 한국에 있어? 물었지. 그랬더니 너도 지금 한국이잖아. 하고 답하더라고. 맞아, 꿈속에서 우리는 한국이었는데, 아마도 많은 수의 외국으로 나간 한국인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아무리 뛰쳐나가듯이 이 땅을 떠났어도, 결국 나이가 들면 돌아오게 되어있더라고. 지금의 나도 타국살이를 영원히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길래 새벽 두 시의 카페에 따라갔는데, 거기서 꿈은 끝났어. 나는 이른 잠에서 깨었고.  






그 시절의 당신이 고백을 했던가, 아니면 하려고 했던가. 주변을 서성대던 건 나였는데, 기껏 마음을 연 건 당신이었는데. 그걸 거절했던 건 다른 사람 때문이었어. 친구라는 이름으로 관계를 맺고 있지만 내 결핍을 메꾸어주던 사람. 그땐 몰랐는데, 가족에게서 메꾸지 못했던 나라는 인간의 커다란 구멍을 주변인을 통해 막고 있었더라고.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그건 본능과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에 설렘이나 포근함 같은 걸로는 그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어. 나는 그 친구 때문에 자주 서운하고 내 마음 같지 않아서 늘 울기만 했는데도, 걔가 괜찮다고 하면 다 괜찮은 것 같았거든. 부모님이 목소리를 높이면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걔에게 메신저로 말을 걸고, 잠에서 깼는데 도무지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 걔에게 전화를 했지. 살려고 몸부림칠 때마다 그 친구가 받아줬거든. 왜, 사람은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고 하잖아. 걔가 자꾸 내 동아줄이 되어주니까, 그걸 도무지 놓을 수가 없더라고. 당신과 나는, 우리는 서로 좋은 것만 봤잖아. 나는 당신의 (있을지도 모를) 가족사를 궁금해한 적이 없고, 당신도 나의 결핍과 구멍을 그렇게까지 크게 느끼지는 못했을 거야. 우리는 그냥 소소하고 가볍게 웃을 수 있는 이야기만 나눴으니까.


사는 동안 나의 동아줄은 여러 번 바뀌었어. 그런데 결말은 늘 같더라고. 왜냐면, 타인은 결코 자신이 될 수 없고, 그래서 인간은 다른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없으니까. 비슷한 관계들을 오래 반복하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어. 균형이 깨진 관계를 견디지 못하는 건 사실 나더라.





지난 몇 년간은, 그냥 살아 있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 같은 시간에 자고 일어나는 것, 세 끼니를 굳이 챙겨 먹는 것, 산책을 멈추지 않는 것, 아침에 꼭 햇빛을 보는 것, 청소와 빨래를 미루지 않고 하는 것, 그저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꼭 해야 할 일들을 해치우듯 해나가면서. 타국 생활을 혼자 해나간다는 건 또 매 순간의 수많은 선택을 미루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해서, 그걸 쳐내느라 늘 정신이 없기도 했고. 그리고 함부로 동아줄을 운운하지 않게 되었지. 내 독의 깨진 구멍은 아무도 대신 막아줄 수 없잖아. 잠깐은 가능할지 몰라도 결국엔 새어 나가게 되어있고. 어떻게든 스스로의 결핍을 메꾸지 않으면 어떤 관계도 쉽게 이어나가지 못하리라는 결론에 이르렀는데, 또 이게 맞나 싶어. 잘 모르겠어. 그러려고 너무 아등바등 대느라 지쳤거든.


B,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났지. 우리가 스물의 언저리에 있던 시절이 기억나. 도서관 옆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면서 농담 따먹기를 하고, 당신이 만든 음악을 들으며 신나 하던 순간들 말이야. 멀리서 당신이 커다란 옷을 입고 휘적휘적 걸어오던 그 모습, 되게 좋아했는데. 조용하고, 똑똑하고, 평온하고, 안전한 사람.






너무 웃기지, 뜬금없이 이런 꿈을 꿨다는 게. 내내 허공을 떠다니던 나는 이제야 겨우 발이 땅에 닿는가 싶어. 우리도 각자의 시간만큼 바뀌었겠지. 그때 알지 못했던 것들을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기는 한데.. 여전히 갈 길은 먼 것 같다.


잘 지내, 살다 보면 언젠가 마주칠 일 있지 않겠어?

그때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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