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북런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기범 Mar 02. 2018

삼성과 아마존
그리고, 축적의 시간

[북런치 #11] 축적의 시간

삼성전자가 2017년 3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고 발표한 날, 권오현 부회장이 사임의사를 밝혔다. 주요 포털에 실시간 검색어 1위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었고, 외신들 역시 '기록적인 이익에도 CEO 사임'이라는 제목의 뉴스를 쏟아냈다. CEO로써 최고의 성취를 이뤄낸 날, 그는 박수 칠 때 떠나려 했던 걸까? 쉽게 이해되지 않는 행보에 찾아본 기사에서 성취의 기쁨을 압도하는 막막함이 느껴지는 그의 발언을 발견했다.





위기의 한국 산업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한국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뤄냈다. 그러나 이것도 과거의 영광일 뿐, 현재 우리 경제 곳곳에서 위기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음은 자명하다. 기업의 수익률과 거시경제의 잠재성장률은 '추세적'으로 하락하고 있으며, 외부적으로는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부활이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이런 와중에 내부적으로는 저출산 고령화 현상으로 인구는 감소하고 있는 데다, 총고정투자율 저하로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어내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굳이 이렇게 현상들을 구구절절 나열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느끼고 있다. 어렵다는 것을.


이러한 상황 속, 우리 산업의 당면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의 통찰을 제시하기 위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서 자체적으로 26명의 교수진을 선정해 인터뷰를 진행했고, 그 결과를 정리해 이 책을 펴냈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소속 26명의 교수진


개념설계 능력 부족이 문제

각 전문 분야들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었으나, 교수들은 공통적으로 개념설계 능력 부족을 문제로 진단했다. 개념설계 능력은 창의적이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할 수 있는 역량을 말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고부가가치 영역이면서, 산업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설정할 수 있게 하는 핵심 역량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선진국을 빨리 뒤쫓아가야 했던 한국으로선 이 능력을 쌓을 여유가 없었다. 스스로 새로운 개념을 설계하기보단 선진국에서 만들어낸 개념을 가져와 빠르게 적용하기 바빴던 것이다. 이러한 모방 추격형 발전모델이 지금 시점에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뒤에서는 경쟁자가 빠르게 추격해 오는데, 훨씬 앞에서 산업을 리드하는 선진국을 앞지를 능력은 없는 상황이다.


책의 다양한 예시를 통해, 이미 여러 영역에서 중국의 추월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과, 동시에 우리나라가 꽤나 선전하고 있다고 생각한 영역들에서 핵심 역량인 개념설계 능력은 선진국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축적된 경험 지식 부족이 근본 원인

이상에서 살펴본 문제의 근본 원인은 축적된 경험 지식이 없다는 점에 있다. 개념설계 능력은 단순히 논문이나 교과서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오랜 기간의 시행착오를 통해 축적된 경험 지식과 노하우가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들은 후발주자들이 쉽게 따라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수합병을 한다고 해서 쉽게 이전받을 수도 없다.

매우 단순하게 생각할 때, 경험 지식의 축적에는 '시간'과 '경험의 양'이라는 두 가지 변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일찍부터 근대화를 거친 유럽과 미국 기반의 글로벌 선진 기업들은 오랜 산업 역사를 통해 고급 경험 지식을 축적해 왔다. 한편, 중국은 막대한 인구를 기반으로 국가차원에서 여러 산업 육성 프로젝트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면서 규모의 경제로 짧은 시간에 엄청난 경험의 양을 축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진국처럼 지금부터 찬찬히 경험을 축적할 여유도, 중국처럼 거대한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짧은 시간에 경험을 축적할 여건도 안 되는 한국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축적 지향의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야

26명의 교수진들은 한국 사회 전체의 틀을 함께 바꾸어 축적 지향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국가 정책, 기업, 대학, 사회인식 차원에서 어떤 노력들을 기울여야 할 지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각각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소 추상적이긴 하지만, 단기적 성과가 아닌, 긴 호흡으로 투자하는 축적의 시간을 쌓을 것을 주문한다. 오랜 시간 성공과 실패의 경험들이 쌓는 것이 중요한 만큼, 도전을 장려하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갖춰야 함을 함께 역설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하는 것은 너무 쉽다. 하지만, [정권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국가 정책 / 당장 실적을 내야 하는 기업의 상황 / 지원을 받기 위해 화려하고 인기 있는 연구에 집중하는 대학 / 실패가 용인되지 않는 사회인식] 이 모두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상의 모든 내용들을 정리하면서, 아마존의 CEO 제프 베조스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장기적 관점으로 생각하는 것, 새로운 것을 발명하고 개척하기 위해 실패를 용인하는 것 등 아마존이 어떤 원칙과 방식으로 20년이란 '축적의 시간'을 쌓아왔는지 잘 보여준 인터뷰라 생각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l9X8X-Ixbo8



개인 차원에서도 적용해 볼 부분이 많이 있다. 누군가가 만든 개념을 따라 빠르게 모방하고 추격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 앞을 내다보는 안목을 가지고 성공과 실패를 적극적으로 겪으며 묵묵히 축적의 시간을 쌓아가고 있나? 2011년 여름에 읽고, 오랜시간 마음에 간직해온 구절이 다시 한 번 떠오른다.


인생은 축적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축적해야 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인생의 의미는 없다.

- 나가오카 겐메이, '디자이너 생각 위를 걷다' 中 -


KB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결국 보통의 존재로 기억될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