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르마타 Jun 08. 2021

당사자 개념의 난감함

청년 / '이대남' / '이대녀' 당사자?

** 이 글은 젠더어펙트연구소와 반차별페미연대가 공동 주최한 〈옷을 갈아입은 성차별 - ‘젠더 갈등’ 프레임과 ‘이대남’ 현상을 비판한다〉에서 발표한 발제문의 일부입니다.


당사자는 매우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다. 그러나 나는 이 개념을 의심한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국제학술대회 발표를 위해 ‘청년 당사자’가 들어간 문장을 영어로 번역하려 했던 경험에서였다. 한영사전이나 구글 번역기는 적당한 번역어를 내놓지 못했다. 한국어로 쓰인 선행연구들의 영문초록도 열심히 검색했지만, 흥미롭게도 ‘당사자’라는 단어가 포함된 한국어 논문 제목은 언제나 그 의미가 누락된 채로 번역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국어사전은 당사자를 “어떤 일이나 사건에 직접 관계가 있거나 관계한 사람”으로 정의한다. 주로 법적인 맥락 혹은 특정 사건과 관련한 보도 맥락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한 단어다. 특정한 집단(group)의 이름에 ‘당사자’를 붙여 사용하는 것은 흔한 용법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당사자 개념의 용법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으며, 정치 전략적으로도 한계가 크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청년 당사자’를 ‘청년’과, ‘여성 당사자’를 ‘여성’과 별다른 의미 차이가 없는 방식으로 사용해왔다. ‘역전 앞’과 동일한 오류에 해당하는 용법이다.


특정한 집단 이름에 당사자를 붙여 말할 때 그 집단은 본질주의(essentialism)적으로 상상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만 19~34세의 청년만이 ‘청년 당사자’이고 35세 이상은 비-당사자로 여겨진다. 갓 40대가 된 청년정책 연구자마저 “청년을 지나서 잘 모른다”는 식으로 겸연쩍게 말하곤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연령이라는 기준만으로 당사자를 특정할 수 있도록 하는 단일한 ‘청년 문제’라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반대로 기성세대는 ‘청년 문제’의 당사자가 될 수 없는가? 예컨대, 청년실업률 증가를 중요한 청년 문제라고 한다면 세대 간 돌봄 및 소득 이전 등으로 인해 부모세대가, 실업률 관리를 위해 국가가 ‘청년 문제’의 중요한 이해당사자가 된다. 


세대주의(generationalism)는 내가 ‘청년’을 둘러싼 본질주의적 이해를 지적하고 비판하기 위해 원용하고 있는 개념이다. 조너선 화이트(Jonathan White)는 세대주의를 “정치가, 저널리스트, 대중적 지식인들이 세대 범주의 중심성을 주장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을 세대의 개념으로 풀어 이야기하는 현상”이라고 정의했는데, 문화매개자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 모두가 세대에 대한 본질주의적 상상을 다소간 공유하고 있기에 이러한 논리가 쉽게 통한다. 그러나 세대 간 이전을 포함한 공동체 내의 연결 관계는 ‘세대 전쟁’이라는 레토릭이 허구라는 주장의 근거다.


그럼에도 당사자 개념이, 특히 당사자를 자임하는 사람들에 의해 흔히 쓰이는 까닭은 이같은 당사자 용법이 당사자 개인에게 인식론적 특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집단 맥락에서의 ‘당사자주의’다. 청년 문제와 관련하여 청년 주체들이 자주 사용했던 “청년 문제는 청년이 잘 안다”는 선언은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이는 일종의 전략적 본질주의(strategic essentialism)다. 가야트리 스피박에 의하여, “전복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집단 자기의식(self-conscious)을 창조하거나 이해하기 위한 본질주의의 ‘정치적’이고 ‘일시적’인 사용”(MuHugh, 2007, p. 139)으로 개념화된 그 내용이다.


그러나 “청년 문제는 청년이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희박하다. 앞서 말했듯 ‘청년 문제’라는 대상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없을뿐더러, 말하는 이가 청년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점유하고 있는 매우 특이한 위치에서의 관점에 불과하다. 청년 문제에 대한 메타적인 관점을 청년 당사자가 자동적으로 소유하게 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같이 당사자를 자임하면서 주장의 정당성을 얻으려는 전략은 권력 관계의 작동에 따라 실패하기가 부지기수다. 당사자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으므로 사실을 가장 많이 잘 알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이해타산적인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최근의 청년운동에서는 스스로를 규정하는 방법이기도 했던 ‘당사자’라는 지위에 발목이 묶이는 사례가 빈번히 나타난다. 길게는 10여년 간에 걸쳐 ‘청년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왔음에도 ‘전문가’와 구분되는 당사자 주체로 배치되는 수많은 토론회에서의 난감함이 거기에 해당한다.


당사자주의는 권력에 의해 납작하게 재전유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만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조직된 청년운동을 건너뛰고 권력이 당사자로부터의 승인을 획득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박근혜 정부 당시 보수 청년단체들이 당시 정권의 ‘개혁’ 방향에 앞장서서 ‘청년으로서’ 지지를 표한 일이 여기에 해당한다. 권력은 수많은 당사자 후보들을 놓고 그 적합성을 선별하려 들기도 한다. 예컨대 ‘활동가’는 특수한 이해관계를 담지하고 있어 당사자성이 없으니 ‘활동가 청년’ 말고 ‘진짜 청년’ 목소리를 듣자는 식의 발화가 각지 청년활동가들의 속을 뒤집어 놓고 있다.     


4.7 재보선 이후 계속되고 있는 ‘이대남’ 정치는 납작한 당사자주의의 한계를 최악의 형태로 그대로 받아안고 있다. 2018년 말 20대 남성 코호트의 국정수행 지지율 하락 이후 표창원 전 의원은 ‘20대 남자들의 목소리를 듣겠다’라며 20대 남성들을 국회로 불러 좌담회를 열었다. 당시 언론들도 20대 남성들의 날 것의 목소리를 담은 기획기사를 연달아 쏟아냈다. 연령/성별 집단에서 관측된 현상을 20대 남성 개개인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물론, 존재하지도 않는 ‘20대 남성 평균인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개개인에게 ‘20대 남성’을 대표하도록 하는 것 또한 생태학적 오류(ecological fallacy)에 해당한다. 


특히 침묵의 나선 효과 등을 고려했을 때, ‘20대 남성 = 반페미니즘’이라는 도식이 주류화된 상황에서 ‘20대 남성’의 목소리를, 특히 ‘페미니즘’과 관련해서 청취하겠다는 것은 반페미니스트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말과 전혀 다르지 않다. 당사자주의는 당사자를 자임할 수 있는 주체에 의해 언제나 ‘전략적으로’ 활용될 수 있으며 그래서 합리성을 거스르는 위험을 안고 가는 일이다. ‘이대남’ 정치에서는 이러한 당사자주의의 전략적 활용이 ‘20대 남성’을 호명하는 권력에 적극적으로 대상화되면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결국 ‘20대 남성’이라는 통계적으로만 존재하는 개념을 정치적으로 실체화하고 전장터로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