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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마타 May 26. 2021

'이대남'의 투표 선택과 반/페미니즘

이 글은 격월간 민들레 135호에 기고한 글을 일부 발췌한 판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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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재보선 서울시장 선거 출구조사 결과 20대 남성의 72.5%가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에게 투표한 것으로 예측된 결과가 나오면서, ‘20대 남자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가 공론장의 주요 이슈가 되고 있다. 시사IN의 천관율 기자와 한국리서치 정한울 전문위원이 쓴 <20대 남자: ‘남성 마이너리티’ 자의식의 탄생>(2019)은 ‘20대 남자 현상’에 관한 진단을 일찍이 선취한 바 있다. 당시 조사에서 20대 남성 코호트의 25.9%가 페미니즘의 ‘확고한 반대자들’, 32.7%는 ‘강한 반대자들’로 분석되었다. 이는 30대 이상 남성 코호트에서 ‘확고한 반대자들’이 7.7%에 그친 것에 비해 확실히 높은 비율이다. 저자들은 ‘공정’, ‘경쟁’, ‘기회’ 등과 같은 프레임은 20대 남성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와 성별에 걸쳐 있는 현상이므로 이들에게 특수성을 부여해주는 것은 ‘반페미니즘 정체성’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청년 시민사회나 여성계, 주요 언론들의 대응은 대동소이하다. 20대 남자가 모두 반페미니스트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페미니즘에 친화적인 20대 남성 당사자를 무대에 세운다. 혹은 선거결과에서 20대 남성이 오세훈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한 이유는 현 정부와 여당의 실정 그 자체 때문이지 페미니즘 때문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려 애쓴다. 나 역시 이러한 해석 싸움에 힘을 보태는 멘트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20대 남성들은 온라인상에서 “페미니즘 때문에 민주당 안 찍은 거 맞다”라며 상징 생산자들의 해석을 조롱하고 있다. 20대 남성 대다수와 30대 남성 다수, 그리고 곧 유권자가 될 10대 남성이 페미니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의견을 갖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길 가는 젊은 남성을 아무나 붙잡고 얘기해봐도 안티페미니스트일 거라는 확률론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이해하기 힘든 연결고리는 젊은 남성들이 가진 반페미니즘 성향이 어떻게 여당에 대한 불호로 이어지느냐는 부분이다. 일각에서는 젠더갈등을 거치면서 20대 여성이 진보화, 20대 남성이 보수화되었다고 진단하기도 한다. 이는 섣부르고 다소 게으른 분석이다. 우리 대다수가 국민의힘이 정당 지지율 1위로 복귀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던 것처럼, 한국의 현실정치는 늘 변화무쌍했다. 한 번의 선거결과를 가지고 특정한 세대-젠더 집단에게 안정적인 정치 성향을 부여하는 것은 매우 성급한 일이다. 더구나 최근 젊은 세대의 경우 이념 지향에 따라 한 세력에 투표를 계속하기보다는, 선거마다의 판단에 따라 다른 세력에 투표하는 스윙 보터(swing voter) 성향을 지닌 유권자의 비율이 높다.


“20대 남성이 페미니즘 때문에 민주당에 등을 돌렸다”라는 해석은 사실을 상당히 과장한 것에 가깝다. 20대 남성 스스로가 “페미니즘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의사선택 과정에 실질적으로 ‘페미니즘’이 명시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끼쳐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슈가 ‘20대 남자 현상’과 ‘반페미니즘’에 집중된 이 상황이 반페미니스트에게는 거의 처음으로 생긴 절호의 정치적 기회라 여겨지기 때문에, 그런 담론을 전개하는 것에 가깝다. 20대 남성이 아무리 탈이념화되었다 해도 이념, 경제, 안보, 복지 등의 문제를 제치고 반/페미니즘이 이들에게 제1의 선택 기준이 되기는 어렵다. 명확한 반례를 들 수 있다. 20대 남성 코호트 내에 반페미니즘 담론이 공유되어 있었던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 2020년 21대 총선에서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이들 또한 다수가 더불어민주당에 투표했다.


20대 남성과 여성의 투표 선택에 관한 페미니즘 변수의 영향력은 상당히 제한적으로 보아야 맞다. 일단 4.7 재보선에 한정해서 보아야 한다. 전반적인 국정 지지율 하락 속에 LH 비리와 같은 사건이 터져 여당으로부터의 표가 이탈하고, 정권 심판론이 힘을 얻었다. 선거 구도상 여당 지지를 철회했을 때 유권자가 택할 수 있는 대안은 두 가지였다. 국민의힘 후보를 찍어 적극적으로 여당을 견제하거나, 소수정당 및 무소속 후보에 눈을 돌리는 방안. 반/페미니즘은 여기에서 약간의 영향력을 발휘한다. 대부분의 소수정당 및 무소속 후보들이 ‘페미니즘’을 기치로 내건 상황에서 페미니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젊은 남성의 선택은 뻔하다. 이 선택을 두고 20대 남성이 보수화되었다 하기엔 매우 성급하다. 역으로 ‘페미니즘’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은 여당 지지를 철회한 상황에서 자신의 표를 여당 견제보다는 페미니스트 후보에게 쓸 개연성이 높다. 출구조사 결과 20대 여성 코호트에서 제3후보 지지율이 높게 나온 데에는 이러한 사정이 있다.     


20대 남성의 보수화론을 게으른 분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더불어민주당이 진보고 국민의힘은 보수라는 도식 자체의 설명력이 떨어진다는 데 있다. 앞서 언급했듯, 젊은 세대는 기존의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적 이분법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이는 사실 거대 양당이 자초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두 정당 사이의 실질적인 정책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닮아버렸기 때문이다.     


젠더 이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사이에서 보자면 두 정당 사이에서 양성평등 및 여성 의제와 관련한 정책이 대동소이하다. 국민의힘에서 정권을 잡는다 가정해도 반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 정책’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쉽게 폐기되지 않고 지속될 것이다. 이를테면 채용이나 승진 등에 있어서 여성 할당 내지는 가산점 등이 논란인데, 이러한 정책은 궁극적으로 따져 보면 현 정부의 책임 소관이 아니거나 국제 협약이나 사회 분위기 등에 따라 이전 정부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온 것들에 가깝다.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나 스토킹 처벌법 등도 ‘페미 입법’으로 온라인상에서 이슈가 됐는데, 발의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의원들이 한 당에만 몰려 있다고 보기 어렵다.     


여성의 권익을 신장하고자 하는 움직임에 반대하는 의견은 이전에도 존재하기는 했으나 정치적으로 대의되지 않는 영역에 있었다. 반페미니스트 유권자에게 그 지점에서 선호의 대상이 될 정치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국민의힘에는 이준석, 하태경이라는 정치인이 존재한다. 이들은 꽤나 오랫동안 젊은 남성들 다수가 공유하는 반페미니즘을 대변하거나 이끄는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이준석, 하태경이라는 변수는 (장기적으로) 상쇄된다. 그러한 ‘20대 남성 호명의 정치’야말로 더불어민주당에서도 아주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나는 ‘청년’ 담론을 연구해 온 젊은 연구자다. 각자의 입맛에 맞게 청년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며 이해관계에 따라 청년을 비난하기도 하는, 그러면서도 정작 청년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기 어려운 문화적 배경 속에서, ‘청년’이라는 집단적인 실체 자체가 성립하지 않음을, 또 청년이 다른 세대와 마찬가지로 우리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시민의 일원임을 말하려 해 왔다. 청년 담론의 새로운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대남’, ‘이대녀’ 담론과 관련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는 한 명의 시민 동료로서 20대 남성 내지는 ‘반페미니스트’라고 명백하게 명명할 수 있는 누군가조차도 공론장에서 배제되어서 안 된다고 원칙적으로 생각한다. 더불어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생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합리적인 대화를 통해 일말의 진전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반페미니즘을 ‘20대 남성’의 목소리로서 청취하고 그것을 정책과 공적 담론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은 별도의 얘기다. 이전의 오랜 ‘청년’ 담론은 청년들에게 불쌍하고 결핍된 주체로서의 자리만을 허락하면서, 이들의 가난 내지는 분노를 공적으로 표출하도록 유도해 왔다. 정치권은 언제나 청년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이야기해왔지만, 막상 청년의 목소리가 진지하게 취급된 적은 별로 없었다. ‘20대 남성’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무조건 들어줘야 하고, 또 무조건 반영해야 한다면, 그러한 의견도 이들을 다른 기성세대 시민과는 다르게 대우하려 한다는 점에서 차별일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성평등이라는 목표에 합의해 나가고, ― 많은 반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성평등주의자이며, 페미니스트들이 오히려 성평등을 저해한다는 식으로 주장하곤 한다. ― 그 과정과 세부적인 방안을 협상하고 설득해 나가는 대화의 과정이다.     


물론 공론장은 언제나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한 모양을 하고 있다. 특히 세대별, 성별로 다른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소통하기 아예 어려운 복수의 여론이 형성되고 있는 시대적인 여건, 그리고 정치 권력과 유착된 언론에서 저질의 정보를 일상적으로 유통하는 구조적인 여건은 늘 마음을 어렵게 한다. 사회과학 연구자의 한 명으로서, 평생에 걸쳐 연구한 내용일지라도 ‘엉터리’라는 댓글 하나로 쉽게 폄하될 수 있다는 사실은 용기를 잃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방법이 없다. 해야 할 일을 미뤄놓으면 더 커다란 문제로 쌓여 돌아온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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