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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마타 May 22. 2022

청년세대와 공동체 회복의 문제

계간 백조 기고글 (2021년 11월 작성)

* 이 글은 노작홍사용 문학관에서 발간하는 계간 <백조> 8호(2021년 겨울호)에 실렸습니다.


공동체에 대해 말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특히나 그 단어를 말하는 내 마음에서 향수 또는 기대, 아니면 냉소와 같은 렌즈를 빼고 말하기는 더욱 어렵다. 많은 학자는 근대사회로의 진입과 함께 변형된 농촌 공동체를, 자본주의가 해체시킨 계급 공동체를 아쉬워했다. 그들은 그 당대의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잘 비판했는지 몰라도, 향수에 젖어 이미 지나간 공동체를 이상화하거나 새롭게 자라나고 있는 공동체와 연결망의 의미를 독해하지 못하는 오류도 함께 범했다. 인터넷 초기에는 존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새로운 가상의 공간에서 성별과 인종, 세대와 국경을 가로지르는 종류의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오프라인 세계에서의 구분 짓기와 혐오가 그대로 온라인 세계로 흘러 들어가자, 온라인에 가장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거기에 대한 환멸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최근 청년세대의 공동체 실천을 두고 나오는 이야기들 또한 이러한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게다가 청년 담론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대한 공포, 젊은 층에 대한 세대적 구별짓기를 반드시 수반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대해서는 걱정과 우려의 시선이 앞선다. 주된 이용자의 성별에 따라 ‘남초 커뮤니티’와 ‘여초 커뮤니티’로 나뉜 온라인 세계에서는 상호 적대감과 부정적인 정동이 강하게 흐른다. 온라인상에서 관찰되는 젊은 세대의 가치관은 일정하게 타자에 대한 배타성과 능력주의 등을 내면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영향력은 과도해진 반면, 얼굴을 맞대는 공동체 활동은 상대적으로 약해진 데 대한 걱정도 뒤따른다. 청년세대의 공동체 활동을 지원하는 크고 작은 정책 사업이 공공에서 진행되는 데에는 이러한 활동이 취·창업으로 이어지리라는 기대 외에도 사회안전망으로서의 공동체 회복에 대한 열망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갈등의 소통     


원칙적으로는 온라인상에서 생성되는 크고 작은 모든 공동체의 형태를 온라인 커뮤니티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통상 게시판 기능을 제공하며 불특정 다수의 유저들이 참여하는 웹사이트들을 지칭하기 위해 이 개념이 사용된다. 디씨인사이드가 가장 대표적이며, 이용자들의 성비 쏠림에 따라 보통 MLBPARK, 디젤매니아, 보배드림, 뽐뿌, 아이러브사커, 에펨코리아, 오늘의유머, 인벤, 일베저장소, 클리앙 등 ‘남초 커뮤니티’와 82쿡, 네이트판, 더쿠, 소울드레서, 여성시대, 워마드, 인스티즈, 쭉빵카페 등 ‘여초 커뮤니티’로 분류한다. 주로 올라오는 게시물들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진보성향 커뮤니티’와 ‘보수성향 커뮤니티’를 나누기도 한다. 일부 사이트를 제외하고는 이용 자격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개별 커뮤니티가 특정한 분위기로 흐르다 보면,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 위주로 남게 되어, 사이트 자체가 집단적인 특성을 가진 공동체로 형성된다.

    

대부분의 공동체는 일정한 폐쇄성을 지닌다. 동일성에 기반하여 유대감을 형성하고, 차이에 대해서는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최근 사회적 갈등이 표출되는 주요한 장소로도 지목된다.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한 찬반, 유명인을 둘러싼 가십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물론 세월호 참사, 천안함 피격, 광주 민주화운동 등의 역사 속의 트라우마적 사건이나 코로나 백신의 효과 및 부작용, 사회통계 등의 전문 지식까지도 온라인상에서 논쟁의 소재가 되며, 커뮤니티별로 의견이 극명하게 갈린다. 특히 페미니즘 관련 이슈에 대한 관점도 완전히 다르며, 이를 최근 청년세대 내에서 ‘젠더 갈등이 심각하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온라인상의 의견 충돌은 사이버 행동주의(cyber activism)로 이어지면서 전선이 더욱 확장된다. 커뮤니티에서 이슈가 되는 사안과 관련한 기사나 국민청원 페이지 등에 ‘좌표’를 찍어, 특정 의견의 힘이 다수임을 보여주는 실력행사를 진행한다. 커뮤니티 내의 정론과 다른 성향의 커뮤니티에 올라온 게시물은 물론 주요 언론에 실린 기사와 기자, 심지어 학자의 논문에 대해서 여러 방식으로 조리돌림이 행해진다. 워마드를 상징하는 손가락 모양과 관련한 논란이 잘 보여주었듯이 특정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 등까지 행동이 번지기도 한다. 제도권 언론도 온라인 커뮤니티의 실천과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소위 ‘커뮤니티 받아쓰기’ 방식의 기사쓰기가 일상화되고 있는데, 기자들은 논쟁이 될만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글을 찾아내 여론으로 둔갑시켜 보도하고, 결국 그것을 실제 사회 이슈로 만들어낸다. 커뮤니티 이용자 역시 이러한 매체의 생리를 알고,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렇게 분열된 의견 공동체들로 나타나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더 큰 공동체인 한국사회의 안녕에 대해서는 위협이 된다는 관측은 지배적이다. 특히 다른 공동체 간에 유통되는 정보의 종류 자체가 다르며, 진실보다도 그 공동체의 이해관계에 일치하는 종류의 진정성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현상이 문제다. 유튜브, 페이스북, 포털 등의 IT 환경은 개인의 성향에 따라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면서, 각자의 입맛에 맞는 정보에만 둘러싸이게 되는 필터 버블 현상을 낳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가짜 뉴스’를 적극 생산, 유통, 소비하면서까지 온라인 커뮤니티 내에서 주목 경쟁을 벌인다. 이러한 과정에서 차이가 공존하거나 소통하는 공동체의 가능성은 좁아지고, 우리 바깥의 ‘그들’, 엘리트 집단, 소수자 등에 대한 혐오를 수반하는 포퓰리즘들의 각축장으로 정치가 협소해지는 문제도 발생한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둘러싼 우려와 비판의 말들에는 틀림없이 정당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이 기술적 이국주의(technological exoticism), 즉 새로운 기술과 청년세대를 단순히 타자화하는 데서 마무리되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시각에서의 관찰과 통찰이 더해져야 한다. 우선 우리는 사이버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몇몇 현상이 역사적으로 과거의 공동체에서도 관찰되었던 것의 반복이며, 당대에도 청년세대에게서만 배타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민족주의(nationalism)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작인 <상상된 공동체>에서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nation)이 제한적이며, 주권을 가진, 공동체로 상상된다(imagined)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민족은 오늘날과 같은 사이버 공간이 없는 시기에 형성된 개념이지만, 실제 물리적 접촉이 없이도 상상적인 방식으로 언어와 공간을 공유하는 일정한 경계 내의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냈다. 하나의 국가 내에서 생겨나는 지역의 구분과 지역주의, 전 세계의 사람들을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누어 사고하는 마르크스주의 등 분류를 통해 구성되는 거의 모든 공동체는 이같이 상상적인 측면을 공유한다.     


이러한 상상된 공동체의 경계를 바탕으로 사람들은 수많은 상징을 구축하면서 역사를 만들어 왔다. 그리고 이 상징은 앞서 온라인 커뮤니티의 특성으로 이야기했던 특성들을 그대로 공유한다. 같은 사안을 두고도 국가에 따라, 사상에 따라, 종교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른 입장이 나타난다. 즉 쉽게 말해, 인간의 역사에서 공동체의 경계는 늘 다른 정보가 유통되고 다른 진실이 인정받는 경계로 작용하고 상호 간의 적대로 이어졌다. 정도에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적으로 여겨지는 공동체와 관련해서 떠도는 많은 정보에는 가짜 뉴스의 성격을 지닌 루머나 가십이 늘 섞여 있었다. 공동체 간의 적대가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을 때 전쟁이 발발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국가 권력에 의해 동원되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명예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전장에 자발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오늘날로 시야를 좁혀 보아도 청년들이 주로 이용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만 공동체 간의 구별 짓기나 진실을 흐리는 실천이 나타난다고 볼 수는 없다. 스마트폰은 더 이상 젊은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며, 유튜브 시청 시간 등에서 오히려 노년 세대가 중장년층을 앞지르는 통계가 나올 정도가 되었다. 태극기 집회와 관련하여 뉴미디어를 통한 노년층의 미디어 실천이 주목받았던 바 있다. 이들은 제도권 언론에 나오지 않는 정보를 찾기 위해 유튜브의 대안 매체를 시청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단체 카톡방이나 밴드 등에 퍼나르는 실천을 했다. 이는 게시판 형태로 공개된 온라인 커뮤니티와는 구별되는 매체를 무대로 벌어지고 있지만, 결국 공동체의 분열과 공동체 간 갈등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청년세대와 노년층의 미디어와 공동체 실천이 주목을 더 받았지만, 신문이나 방송을 시청하고 참여하는 공중(public)인 우리 모두는 결국 공동체 형성과 갈등의 과정에 늘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공동체가 분화되고 그 사이의 갈등이 표출되는 상황이 꼭 부정적인 효과만을 산출하지는 않는다. 갈등은 결과는 반드시 파괴적이기만 하지는 않으며,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거기에 관한 소통을 촉진함으로써 사회 변동에 기여하는 일도 있다. 일단, 온라인 커뮤니티의 참여자들은 언제나 여러 가지 의제에 대해 엇갈리는 주장들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지할 수밖에 없다. 물론 대체로 다른 의견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크지만, 그럼에도 다른 입장의 존재 자체를 모른 채로 자민족중심적(ethnocentric) 사고를 굳혀 가는 것과 다른 공동체를 늘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공동체의 입장을 구축하는 것은 다르다. 인간 사회에 차이가 늘 존재한다면, 그 차이가 없는 것처럼 묻혀 있는 상황보다는 어떤 방식으로든 가시화되는 흐름이 필요하다.


또한, 각각의 공동체는 그 내부가 완전히 폐쇄적이고 굳어져 있는 불변의 무엇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오히려 공동체에는 늘 틈이 있었고, 그 틈을 바탕으로 변화하곤 했다. 오늘날의 온라인 커뮤니티 역시 마찬가지다. 단일한 대오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각각의 웹사이트 내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늘 그 안에서 댓글을 통해 벌어지는 전쟁이 있고, 때로는 미세하거나 때로는 극단적인 입장의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과거 인쇄 매체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던 공동체에서 나타났던 변동들과 비교할 때, 통신 매체를 기반으로 하는 오늘날의 공동체는 속도 면에서 오히려 더욱 빠른 변화가 나타날 수도 있다. 오늘날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대해서 말할 때도 그 변화 가능성에 대해 늘 함께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다.     



청년이 이미 실천하는 공동체의 형태들     


온라인 공간에서 젊은 세대가 수행하고 있는 활동에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담론 전쟁 외에, SNS를 통해 자신의 삶을 공유, 혹은 전시하고, 타인의 삶을 목격, 혹은 관찰하는 일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전통적이거나 분석적인 의미에서의 계급과는 다를지 몰라도, 이러한 SNS 사용은 매우 계급적인 활동이다. 이를테면 객관적으로 자랑할 만한 재산(집, 차량, 가방, 옷 등)이나 지위 상태(연애, 결혼, 출산, 취업, 투자 수익 등), 취미(골프 등의 스포츠, 고가의 술, 여행), 매력(얼굴, 몸 등)은 인스타그램에 올릴만한 무엇이지만, 이를 갖추지 못한 이용자는 다른 유저의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는 활동을 주로 한다.     


이같은 격차는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인 박탈감으로 연결되는데, SNS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은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자 증상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기반으로 기능할 수 있는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가 급격히 감소하여 이를 둘러싼 경쟁이 극심해지고 있다. 부모로부터의 자산과 소득 이전 여부에 따라 자녀의 삶 전반에 커다란 격차가 발생한다. 이러한 현실이 박탈의 정동으로 이어짐은 물론이고, 활력 저하로 인해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청년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고립 청년, NEET 청년, 은둔 청년 등의 개념이 고립된 청년의 문제를 조명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라는 재난이 몰고 온 실업의 증가와 사회적 접촉 빈도의 감소는 이들의 외로움을 증폭시켰다. 고립되기를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경쟁 사회로부터 오는 여러 가지 심리적 자극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후에는 소득이나 관계 빈곤 등으로 인해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어 여러 가지 해결방안이 시도되고 있다.     


청년이 공동체를 이루어 활동할 수 있게끔 하는 여러 가지 공공사업은 이러한 고립의 문제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실상 이미 심각한 단계에 있는 고립 청년이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이루어 활동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므로, 청년 공동체 지원은 개개인의 고립 문제에 대한 적확한 해법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오늘날의 청년 전반이 모두 고립된 상태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볼 때, 청년 공동체 활성화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맥락이 더욱 잘 드러난다. 젊은 층의 개인주의 성향을 문제화하는 맥락에서, 이들이 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덜 가지고 있다고 보는 맥락에서, 온라인 커뮤니티는 진정한 공론장이 되기 어렵다고 인식하는 맥락에서 공동체가 과소하다는 진단과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대책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청년층 내부 ‘고립 청년’의 문제를 해소해야 하는 것과 별개로, 청년층 전반에서 공동체적이고 관계적인 실천이 과거 혹은 다른 세대와 비교해 과소하느냐에 대해서 긍정하기는 어렵다. 2019년 통계청 「사회조사」 자료를 살펴보면, 지난 1년간 단체 참여율은 20대에서 60.8%, 30대에서 67.0%로, 40대(71.0%), 50대(74.8%)와 큰 차이가 나지 않았으며, 은퇴 연령 이후인 65세 이상(58.7%)에서보다는 살짝 높았다. 연령대보다는 오히려 학력이나 가구 소득 수준에 따라 단체 참여율의 차이가 더 컸다. 구체적인 단체 유형 별로는 지역사회모임이나 종교단체에서 젊은 층의 참여율이 낮게 나타났으나, 기성세대가 주로 참여하는 단체에 젊은 층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청년의 공동체가 실종되었다고 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사람들은 생각보다 본능적으로 공동체를 이루어 타인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하며 살아간다. 젊은 세대를 기준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이들은 교회 등 전통적으로 사회 공동체의 하부구조를 이루어 온 종교단체나 지역사회 모임에 덜 참여할 수 있으나, 제도 교육으로부터 맺어진 동창생, 동기생 집단이 있고 혈연 공동체, 즉 가족이 있다. 회사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지만, 게임 커뮤니티, 온라인 커뮤니티, SNS 오픈채팅방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새롭게 모이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잇는 공동체를 꾸린다. 이러한 종류의 공동체들 역시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동체의 보편적인 기능들을 이미 수행하고 있다. (물론 개개인이 속한 공동체들은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으며, 청년에게 존재하는 세대 내부의 격차만큼이나 청년들이 연결된 공동체와 네트워크 역시 격차가 크다. 똑같이 취업 정보와 투자 정보 등이 공동체 내에 흐르더라도, 어떤 공동체에 있느냐에 따라 그 정보의 질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일단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을 바탕으로 어려운 상황을 견딜 수 있게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며, 소속감을 주어 정체성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나아가 소비상품의 할인 이벤트, 취업 기회, 투자 정보, 정책 혜택 정보 등이 공유되고, 공동체의 앞날을 둘러싼 토의가 오가기도 한다. 가끔은 정치 현안에 관한 대화도 나눈다.     


이미 공동체로 존재하는 다종다양한 현실과 가상의 장소들은 이미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기반으로 존재하고 있다. 차가운 자본주의적 고용 관계와 돈의 논리, 행정이 제공할 수 있는 한정된 보호 장치 안팎에서 다양한 종류의 연결망과 공동체가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고, 또 경제나 정책 등이 더욱 잘 작동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에서도 사회가 어느 정도의 질서를 유지하고, 또 더 큰 어려움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이러한 공동체가 지닌 힘이며, 소위 시민의식의 결과다.     


그럼에도 오늘날 공동체가 과소하다고 판단한다면,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우리가 과소하다고 보는 것은 공동체 그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말이다. 기실 공동체 회복을 말하는 사람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공동체 그 자체의 활성화라기보다는, 사회에 존재하는 공동체의 내용을 일정한 방향으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정치에의 의지다. 아마도 많은 이들은 우리 사회를 더욱 포괄적이고 차별이 없는, 평등한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시민들이 일방적으로 통치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치할 수 있는 사회를 조성하고자 하는 열망을 공동체 회복이나 공동체 활성화라는 단어에 담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목표와 방향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이미 수행되고 있는 공동체 실천이 망각된 채로 공동체의 축소가 논의되곤 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나가며     


이 글에서 나는 청년세대와 공동체가 함께 논의되는 양상들에 대한 관찰을 공유하고, 그 양상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덧붙이려 시도하였다. 온라인 커뮤니티가 극단적으로 분열되는 양상이나 현실에서의 공동체가 붕괴하고 개인주의가 득세하고 있다는 인식이 상당하지만, 그러한 렌즈로 보이지 않는 현실의 다른 면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살펴보려고 했다. 이는 공동체의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 자체를 방어하기 위함이나 기능주의적으로 현재를 긍정하는 논리를 설파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가 어떤 재난 속에 빠져 있다면, 그 재난에서 탈출하기 위한 열쇠 자체도 그 재난의 바깥이 아니라 한가운데에서 생성되고 있다는 점을 말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현재를 더욱 냉철하게 직시하는, 빠르게 무언가를 냉소하거나 기대하기보다는, 재난이라 여겨지는 무언가와 함께 살아가는 태도가 현재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참 중요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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