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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마타 Apr 12. 2019

Activist-Researcher?

영상문화론 RP 모음

서울시청년허브와 LAB2050을 통해 연구활동가(Activist-Researcher)라는 개념이 제시되었고, 올해 10월에는 Activist-Researcher를 대상으로 한 펠로우십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올해 초 알게 되었다. 흥미로운 시도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 개념을 보면서 2017학년도 1학기에 들었던 영상문화론 수업의 전반부에서 매주 Artist-Researcher 혹은 Studio Art PhD에 관해 이야기했던 경험이 계속해서 겹쳐졌다. 당시 나는 수업 과제를 작성하면서 이미 '자기 삶의 연구자'를 지원해왔던 서울시청년허브의 연구사업 사례를 인용하기도 했었다. 이 개념이 당장 내 문제는 아닌 거라서 더 정식의 글을 나중에 써 보겠다는 그런 다짐은 아직 하지 않고 있지만, 일단 당시 썼던 RP(Review Paper)들을 발췌하여 여기 아카이빙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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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주차 RP 일부 


두 텍스트는 이론(theory)에 관한 입장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여겨진다. 핀란드의 미디어 이론가 유시 파리카(Jussi Parikka)는 다양한 종류의 실천가(practitioner)들을 양성하는 교육에 있어서도 이론이 다양한 방식으로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인터뷰를 진행한 이짓 손쿨(Yigit Soncul)은 파리카의 그러한 입장을 “이론을 보호해야 한다(theory must be defended)” 라는 문장으로 정리하고 있다. 반면, Burren College of Art의 교수인 존스(Timothy Emlyn Jones)에게 이론은 활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자원들 중의 하나 정도로 여겨지는 듯하다. 최소한 예술과 디자인 관련 박사학위 과정에서만큼은 대학, 특히 박사학위 과정에서 이론에게 부여되어 있는 일종의 특권적인 지위를 제거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그에게 박사학위란 결국에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는 일이기 때문에, 연구 문제(research question), 학습 프로그램/커리큘럼(선행연구 및 연구방법에 관한 교육 및 연구 진행), 선배 연구자의 지도, 연구 프로그램의 결과로서 논문, 포트폴리오 등의 시험(examination) 등의 기본적인 프로그램들만 잘 갖춰져 있다면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반드시 이론적인 것이 아니어도 되는 것으로 본다. 오히려 이론적인 논문과 작품 활동 모두를 학위 요건으로 요구하는 경우 이것은 이중, 삼중의 부담이 되어 학위 취득 기간만 쓸데없이 늘리는 역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입장이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파리카의 이야기는 이론과 실무라는 이분법 하에서 점점 더 직업교육화 되어 가고 있는 대학의 미디어 교육에서 이론 자체를 필요 없는 것으로 보는 일부 시각에 대한 대응에 가깝다고 보이며, 존스도 박사과정 프로그램에 큰 틀에서 연구가 필요하고 선행연구 및 연구방법 등에 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이론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는 예술 및 디자인 분과에서 그 분과에 특유한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일, 즉 예술 및 디자인 분과의 ‘학문적 발전’을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사는 박사(a PhD is a PhD.)”라는 존스의 짧은 문장이 인상적인데, 결국 이론‘만’을 중시하지 않겠다는 것이 결코 박사학위 자체의 가치나 난이도, 고유성을 손상시키겠다는 의지와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읽었다. 따라서 둘의 입장은 어느 정도 절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느껴지며, 나 역시도 둘의 의견에 모두 다 동의한다. 통계적 방법을 쓰지 않은 논문이 인정받을 수 없는 학과에서는 질적 연구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특정한 방법을 지식 생산의 특권적인 도구로 여기는 것에 대해 문제가 제기된다. 마찬가지로 반드시 텍스트 기반의 논문 작성만을 박사학위 수여의 요건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위계를 지식 체계에 설정하고 있는 데서 나온다는 점에서 비판할 여지가 있다. 반대로 예술 관련 박사학위에서는 이론이 전혀 필요치 않다고 이야기하는 태도 역시 이론을 결국 이론적인 차원에만 도움이 되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타자화’한다는 면에서 이론과 실천의 허구적인 이분법을 고수하는 태도의 다른 면에 불과하다. 나는 상대적으로 이론과 연구에서의 방법적 절차를 중시하는 인문학/사회과학 기반의 전공에서 학사, 석사를 받고 박사학위를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론을 공부하고 연구한 것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다양한 정체성 속에서 무언가를 일상적으로, 전략적으로, 운동적으로 실천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두 사람의 글에 대한 오해(이해)를 바탕으로,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결국 예술/디자인 박사과정 프로그램을 잘 설계하는 것, 다른 말로는 예술/디자인 학문 장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면, 부르디외의 장 이론(field theory)적인 상상을 통해서 예술/디자인 학문 장이 나름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자본 총량을 늘리기 위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 중 두 사람이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은 이야기들을 추가해볼 수도 있겠다. 예술/디자인 학문 장은 두 가지 종류의 장의 하위 장 – 학문 장(scientific field) 내부의 하위 장으로서 예술/디자인 학문 장, 예술/디자인 장(artistic field)으로의 진입과 관련된 상징자본(symbolic capital)로서의 예술/디자인 학문 장 - 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우선 학문 장 내에서 예술/디자인 학문 장의 상대적인 지위가 상승하기 위해서는 학문 장의 게임의 규칙 안에서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예술/디자인 학계의 규칙/제도/문화 등을 만들어가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투쟁이 필요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것은 다른 학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그대로 수용하는 방식으로 일어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존스가 주장하듯 예술/디자인 학계의 특수성에 맞는 특수한 규칙들을 확립하고 그것을 인정받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상이하다고 여겨지는 두 가지 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예술/디자인 학계만의 무언가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융합/통섭 혹은 간학제적인 교류가 중요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분과학문 연구자들과의 소통 가능성 또한 예술/디자인 학문 장의 학문 장 내에서의 위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가정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라도, 예술/디자인 박사과정 내에서 이론이나 방법론에 관한 커리큘럼이 등한시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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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주차 RP 일부 


이론(theory)-실행(practice)의 구분에 관한 논점을 엘킨스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의 논점에는 전반적으로 동의할만한 부분이 많았다. 일단 그는 그가 읽은 다양한 글들에서 연구(research)와 새로운 지식(new knowledge)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예술과 관련된 새로운 박사과정 프로그램을 정착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경유하여 – 이해(understanding), 해석(interpretation), 글쓰기(writing), 비개념(the nonconceptual) 등의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기, 과학(science)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서 연구(research)를 재정의하기, 실행(practice)을 강조하기, 예술 작품(art object) 그 자체를 지식으로서 승인하기 - 대체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검토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엘킨스는 이러한 시도들 각각이 지니는 의의를 검토하면서도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이러한 접근들이 결국 대학 내의 다른 구성원들과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낮추는 것으로 이어지거나 극복할 수 없는 차이를 (약간은 억지로) 봉합하려고 하는 시도로 읽히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실행(practice)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 예컨대 의학, 법학, 간호학 등에서 쓰이는 실행 개념과 비교해 스튜디오 아트 분야에서의 실행 개념의 정의는 상당히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연관해 스튜디오 아트 박사 제도의 현실과 나아가야 할 길에 관한 엘킨스의 생각도 인상적이었는데, 스튜디오 아트가 충분히 이론적이지 않고 실행 위주로 보이는 것 때문에 이것이 대학에서 주변화 되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위계 구조가 있고(hierarchical), 일관성(coherence)이 있는 학제를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분석에서 통찰력이 느껴졌다. 또한, 이러한 ‘피할 수 없는 불충분함’이 스튜디오 아트 박사라는 새로운 학제의 출발 지점이라는 것을 먼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며, 예술을 만드는 것(making)과 연구하는 것(studying) 사이에는 분명한 괴리(disjunction)가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엘킨스의 의견에 동의가 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엘킨스가 연구(research)나 새로운 지식(new knowledge)이라는 용어와 거리를 두는 까닭 중에는 이 용어들이 이미 과학(science)의 모델에 기반하고 있어서 예술가(artists)들에게는 애매한 개념일 수 있음을 들고 있으며, 모든 학문이라는 게 그러한 특수한 과학의 모델에 근거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도 중요한 내용이라고 여겨진다.


이론과 실천을 계속해서 이분법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엘킨스의 표현처럼, 무언가 이상하다(tricky). 이론 또한 중요한 실천이고, 실천 또한 중요한 이론적 자원이 되며 두 가지가 얽혀 있어서 분리하기 어려운 것인데, 예컨대 문화연구의 실천성을 회복하자는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의 우선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심스러운(!) 전략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고, 예술 관련 전공에서 실행(practice)을 이론을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자는 입장은 예술을 신비화하면서 ‘학위’라는 공인된 상징자본만을 가져가고자 하는 의심스러운 관점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나는 이론도 하나의 실천/실행이라고 생각하며, 엘킨스가 언급했듯 그 학제의 체제가 제대로 구성되어 있다면, 이론적 논문을 통해서든 경험연구 논문을 통해서든 아니면 다른 방식의 결과물을 통해서든 그 학제 내부의 지식 체계에 일종의 이론적인 기여를 하는 실천이 계속되도록 유도하는 것이 대학에서의 연구 및 연구자 재생산 프로그램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체계가 ‘객관적으로’ 보아 객관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만 이 체계가 객관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일종의 환상이 유지될 수 있을 정도로는 객관적인 체계가 존재해야만 학제가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기본 전제 자체를 공격하는 담론이 있다면 그것은 학계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 배제가 ‘나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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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주차 RP 일부 


간학제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학제/학위(degree)를 만듦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제 간의 융합과 통섭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학제들 간의 교류와 공동연구를 통해서 가능한 부분이, 새로운 학제를 만듦으로써 가능한 부분보다 더 크고 실질적으로 유리할지도 모른다. 제도적으로 생겨나는 간학제로서의 학제는 학제 간 교류의 장으로서 긍정적으로 기능하게 될 가능성도 있지만, 동시에 학제 자체의 고유성과 학계 내에서 ‘학과/학위’의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에 애쓰면서 실질적인 융합과 통섭에서는 멀어질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엘킨스의 글이 쓰여진 연도와 지금의 시차를 감안하더라도) 새로운 학위를 만들지 않아도 간학제는 이미 기존의 학제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는 중이다. 스튜디오 아트 학위가 아니더라도,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인문사회과학 계열의 대학원생들은 각자의 연구관심사에 대한 커리큘럼을 학과 내에서 완전히 충족시킬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다양한 학과의 수업을 넘나들고 각자 독서하고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면서 간학제를 실천하면서 학위논문을 만들어나간다. 이미 학제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칸막이이지만 동시에 ‘칸막이’로서만 기능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엘킨스는 이론/연구와 실기/작품의 이분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 이분법을 계속해서 지켜나가는 모순을 가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이분법을 유지한 채, 새로운 학위를 마치 이론/연구와 실기/작품이 특정한 비율로 결합하는 것처럼 – 첫/두 번째 모델은 실기를 위한 연구를 다양한 비율로 결합, 세 번째 모델은 실기 100, 연구 0, 또는 실기와 연구를 구분하지 않음 - 설명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잘 동의가 되지 않는다. 앞서 간학제 연구가 꼭 새로운 학제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고 오히려 기존의 학제들 간의 교류에서 더 생산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과도 관련이 되는데, 어차피 한 사람의 연구자/예술가가 가질 수 있는 역량의 정도가 정해져 있다면 그것을 나눠서 쓰는 것과 전문화된 무언가를 더 깊게 파는 것 사이에서 어느 정도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박사학위에 필요로 하는 것은 후자라고 여겨진다. 최근 원우 한 명이 인스턴트 메신저로 ‘개그 사진’을 하나 보내줬는데 그 사진 안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이론은 모든 것을 아는데 아무 것도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실천(practice)은 모든 게 잘 돌아가는데 아무도 이유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 연구실(lab)은 이론과 실천을 결합한다. 아무 것도 돌아가지 않고, 아무도 이유를 모른다.” 나는 전문화의 문제와 함께 가지 않는 융합/통섭에는 오히려 이러한 문제가 따를 수 있다고 본다. 물론 그 사이를 중개해 줄 수 있는 여러 능력을 조금씩 가지고 있는 연구자도 필요하겠으나, 그것이 별도의 학제를 통해서 길러져야 하는 종류의 능력인지는 의심스럽다.


엘킨스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론/연구와 실기/작품 사이의 간학제는 비대칭적이다. 이론/연구(특히 주로 ‘만만한’ 인문사회과학)가 가지고 있는 독자성은 무너져야 할 것으로 상정하면서 실기/작품/예술의 독자성에 대해서는 별로 건드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인문사회과학의 사람이라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물론 엘킨스는 마지막 부분에서 작품을 연구로 인정할 수 있다고 보는데 대해서 스스로 연구 또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이면서 대칭적인 구성을 만들어내는 듯도 하지만, 사실상 작품은 그 자체로 학위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격상시키는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연구를 비체계적이고 영감을 주는 대상인 예술로 여길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오히려 ‘연구’가 가져야 한다고 여겨지는 자격을 해체시킴으로써 오히려 평가절하 할 수 있는 쪽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반대로 예술 장의 특수한 규칙을 통한 진입 절차나 평가 기준 같은 것들을 인문사회과학 학계를 예술과 융합/통섭하기 위하여 붕괴시키고 개방해야 한다고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연구는 예술적인 성격이 있지만, 연구논문을 쓴 사람을 예술가로 인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특별히 나오지 않는다. 간학제, 혹은 융합/통섭이라는 것은 각 학제가 가진 독립성인 성격, 각 장(field)의 규칙을 붕괴시키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논리는 친구/연인 관계가 각자의 독립성을 유지한 채일 때 더 ‘건강하다’는 이야기들과 상동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예술에 관한 학문적 영역과 예술 실기 사이의, 논문과 작품 사이의 구분선이 무너지는 것이 꼭 긍정적인 방향이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는 게 나의 몇 주 째 정지되어 있고,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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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주차 RP 일부 


기본적으로 예술을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이 학위과정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최근의 일이고 흐름이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학위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역으로 생각해 연구대상의 문제로 본다면 예술적 인공물이 개입된 연구를 바라보면 내 관점에서 그러한 연구가 새삼스럽게 ‘새로운 연구’라고 여겨질 만한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부분이 크다. 필자는 연구자와 연구 대상의 거리두기와 ‘비개입적 객관성’(disinterestedneess)을 강조하는 기존의 연구에 비해 예술가들의 연구는 그럴 수 없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를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그저 응용학문과 기초(순수)학문 사이의 구별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도 서문에서 인공물(artefacts)에 공학이나 과학의 결과물들을 포괄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다양한 형태의 인공물을 만들어내는 연구라면 이것은 이러한 문제 틀에서 예술에 관한 연구와 다를 바가 없다. 공학/과학은 다양한 종류의 발명품을, 행정학/정책학은 ‘정책’이라는 인공물을 만들어낸다. 하다못해 사회과학에서도 측정 도구(measures)와 같은 ‘실용적인’ 쓸모가 있는 인공물들을 제시한다. (이러한 인공물들은 연구와 크게 관련되어 있고, 최근 특허나 발표, 전시 등이 전반적인 업적 평가에 포함되는 식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어쨌든 이러한 인공물 자체들은 텍스트를 포함한 논문이나 저서를 결과물로 삼는 연구 영역과는 분리된 영역으로서 별도로 집계, 평가된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가 제시하고 있는 예술가이면서 연구자인 사람들을 위한 몇 가지 지침들은 일반적인 연구방법론 교과서에서 권장되는 것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필자는 실행(practice), 이론(theory), 평가(evaluation)을 구분하여 이들 사이의 반복과 순환을 강조하는데, 이 구분은 연구의 대상이 되는 실제 현상(phenomenon), 이론(theory), 경험연구(empirical research) 정도로 바꾸어 불러도 거의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양적 연구의 한계로 질적 연구를 보완하거나, 다른 분과(discipline)의 연구를 위한 도구들을 가지고 오거나, 이를 다른 분과 혹은 자기 자신의 연구 자체에 맞게 변형시키는 행위 역시 예술 관련한 연구에서만 특유하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예술가-연구자의 경우는 이들이 ‘자기 자신의 작품’과 관련해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면에서 자신의 문제를 풀기 위해 연구를 진행하는, 일종의 당사자성에서 출발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연구를 하는 사람이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이 부분도 예술과 다른 영역의 연구대상으로서의 차이는 전혀 보증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렇게 ‘당사자’ 혹은 실행(practice) 면에서의 ‘전문가’이면서 ‘연구자’라는 이중성이 어쩌면 연구자가 당사자로서 지니는 일종의 특권을 바탕으로 삼아, 이들의 연구는 당사자 아닌 사람들의 연구와는 다른 규준에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을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텍스트에서 훌륭하게 제시하고 있듯, ‘경험을 통한 지식’은 그 자체로 상당한 가치가 있다. 다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얻은 지식은 체계화되기 이전에는 학문적 지식이라고 불릴 수 있는 기준을 만족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연구문제에서 논의하는 일에 다른 방식으로 ‘직접’ 개입되어 있다는 것은 연구의 성찰성 측면에서 고려해야 할 하나의 맥락을 구성할 뿐, 이 맥락은 ‘직접’ 개입되어 있지 않은 맥락과 다른 위치를 제공하는 것이지 인식론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만약 예술가이자 연구자인 사람들의 경우처럼, 연구자의 위치가 복합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 이것은 연구자에게 ‘이러한 위치’를 체계적으로 기술하는 연구방법의 습득에 의해 분석해야 하는 과제를 제공하는 것이지, 당사자이기 때문에 연구는 조금 덜 체계적으로 해도 된다는 변명거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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