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중앙대학교 교지 <중앙문화> 76호에 실렸습니다.
‘20대 남성’에 대한 언론, 정치권, 학계 등에서의 관심이 쉽게 꺼지지 않고 있다. 지난해 12월, 리서치업체 한국갤럽의 국정수행 지지도 조사 결과,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층으로 여겨졌던 20대 남성이 노년층보다도 문재인 대통령을 덜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부터다. 이후 여러 매체에서 이 현상을 이해하려는 방편으로 20대 남성들을 설문조사, FGI 등의 기법으로 취재한 기사들을 내놓았으며, 몇몇 정치인들도 20대 남성 당사자의 목소리를 듣는 방식의 행사를 기획했다. 최근에는 시사주간지 <시사IN>의 3부작 기획이 이례적으로 많은 사회적 관심을 얻으며 ‘20대 남성’에 대한 관심에 다시 불을 붙였다.
세 가지 시선, 세 가지 주장
‘20대 남성’에 대한 최근의 관심은 최소한 세 가지의 다른 의도 혹은 다른 주체들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①) 페미니즘-리부트 이후 20대 남성은 안티-페미니즘 담론의 적극적인 생산 및 유포자로 여겨져 왔다. 대통령 지지율로 인한 ‘20대 남성 보수화’론이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젊은 남성들의 적대적 성차별주의나 안티페미니즘 경향, 남성성의 위기 등에 대해 논의해 왔다. 1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진보’ 그룹은 안티-페미니스트 혹은 ‘보수적’인 ‘한남’과의 적대 전선을 형성해 왔다. 이 ‘페미니스트’ 그룹은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하지만, 그러나 젊은 남성들 일부와 다른 세대 사회구성원들을 포괄한다. 페미니즘 맥락에서뿐만 아니라 청년세대에 대한 기존 담론에서도 젊은 남성의 새로운 보수성에 대한 논의를 이미 전개해왔다. 주로 ‘잉여’나 ‘일베’, ‘삼포세대’, ‘공정성’과 같은 기호들이 청년세대의 보수화 논의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해당 기호들이 ‘청년세대’라는 몰성적인 표현을 경유하지만 사실상 이미 젊은 여성들보다는 남성들과 더 밀접한 내용임을 주목해야 한다. 즉, ‘20대 남성’과 ‘보수화’를 연결하는 담론은 이미 구성되고 있었다.
둘째로(②), 20대 남성은 정치공학적 맥락에서 ‘표심’ 내지는 ‘민심’에 이해관계를 걸고 있는 정치권으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20대 남성층의 지지도가 낮게 나타난 데 대한 위기의식을 느낀 여당 계열 정치인과 정부의 정당성을 흔들 수 있는 약한 고리를 발견한 야당 계열 정치인이 모두 ‘20대 남성 보수화’ 담론에 합류하고 있다. 20대 남성들을 모아 그들의 ‘소외된’ 목소리를 듣는 식의 토론회가 열리는, 그리고 내년 총선을 앞두고 청년정책의 도입이 갑작스럽게 하나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 자체가 이러한 문제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청년 관련 법안의 입법과 실질적인 정책 추진을 오랫동안 주장해왔던 당사자나 전문가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도 지지부진하던 일이 ‘20대 남성 지지율 하락’과 동시에 우후죽순 진행되는 현실이 황당하게 느껴질 법도 하다.
셋째로(③), ‘20대 남성’에 대한 두 가지 이질적인 주제를 접합시키는 세력이 존재한다. 광범위한 안티페미니즘 그룹과 여기에 동조함으로써 지지세력을 결집하고자 하는 몇몇 정치 그룹들(바른미래당 이준석, 하태경, 정의당 진보너머 등)이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20대 남성들이 정부로부터 등을 돌리는 원인을 정부의 ‘친페미니즘적’ 스탠스로 연결시킴으로써 현 정부의 정당성과 페미니스트가 주장하는 성평등 담론의 정당성을 동시에 깎아내리는 담론 전략이 구사되고 있다. 페미니즘이 20대 남성 지지율 하락의 원인이라는 논리를 믿는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논리가 등장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모종의 정치적 이득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역시 배제할 수는 없다.
이 글의 논의는 ①~③에 해당하는 논의들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관심이 있는 부분은 이러한 담론 생산의 바탕이 되는 조건으로 작용하는, 우리가 동시에 참조하는 지식의 내용이다. ‘20대 남성 보수화’ 담론에서 ‘20대’ ‘남성’ ‘20대 남성’ 그리고 ‘보수화’는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 및 사용되고 있는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들을 분해하여 검토하는 일, 즉 용어의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는 ①~③ 각각의 주장들이 어떻게 이 개념들을 편리한 식으로 전유함으로써 총체적인 설명보다는 정파적인 지식을 생산하는 정도에 머무르게 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본질주의적인 정체성 규정을 넘어, 정치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유동하고 운동하는 상태로 온당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0대 남성’은 존재하는가
청년세대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청년세대가 존재한다는 가정이 꼭 필요한 것일까? 3 연령을 기준으로 구분되는 안정적이고 실체로서의 청년세대를 고정해 놓아야만, 그것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이 가능해지는 것일까? 나는 이러한 존재론적ontological 세대 개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 있는데, 왜냐면 청년세대는 개념상으로 거기에 포괄되는 개인들의 총합일 뿐 그 독자적인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년들 개개인이 가지는 특이성은 청년세대라는 집합명사 내로 환원되지 않는다.
청년세대라는 실체 그 자체를 보여줄 수 없기에, 보통은 청년세대의 평균이나 다수값과 같은 대푯값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우회한다. 이 우회는 자연스럽게 청년세대론의 불완전성과 오류로 이어진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20대의 60%, 50대의 30%가 자신의 정치성향을 ‘진보’라고 답한 설문조사 결과가 있을 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20대가 0.6, 모든 50대가 0.3의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20대 중 60%, 50대 중 30%에 해당하는 특정한 일부가 어떠한 다른 이유로 인해 스스로를 ‘진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인가? 당연히 답은 후자다. 그런데 집단의 특성을 개인에게 잘못 투사하여 설명하는 생태학적 오류ecological fallacy가 매우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우리가 한 사람의 20대와 한 사람의 50대를 놓고 당연히 20대가 더 진보적일 것, 더 도전적일 것, 더 가난할 것 등의 예상을 마음속으로라도 하는 순간 명백한 오류가 만들어진다.
앞의 예시는 우리가 청년세대(혹은 일반적인 세대들)에 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의 틀이 체계적인 조사 내지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 귀납적으로 생겨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이미지를 선험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구성된 것임을 보여준다. 사실상 사회과학에서 조사 대상인 개인들의 주요한 특성으로 연령 변인을 설정하는 실천이 이루어지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는 연령대(혹은 세대)가 그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중요한 요인일 것이라는 좀처럼 의문시되지 않는 전제와 연관을 맺고 있다. (이런 면에서, 과학/학문은 객관적, 가치중립적이지 않으며 이미 문화적이다.) 나는 정치학자 조너선 화이트Jonathan White의 정의에 따라 ‘세대’가 중요하다고 이미-언제나 믿고 있는 사회적 상상에 세대주의generationalism라는 이름을 붙여 설명한다. 세대주의는 “정치가, 저널리스트, 대중적 지식인들이 세대의 중심성을 주장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문제들을 (다른 개념들을 제쳐두고) 세대의 개념으로 풀어 이야기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4
세대주의가 이미 존재한다는 인식에서 시작한다면, ‘청년세대’에 관한 논의는 그 순서가 완전히 역으로 뒤집힌다. 설문조사 결과가 연령대(세대) 변인에 따라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 때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청년이라는 시기, 즉 특정 연령대의 본질적인 특성이 있기에 혹은 이들이 성장 과정에서 겪은 경험들이 향후 그들 세대의 본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라는 본질주의적인 설명은 반쪽짜리 진실에 불과하다. 이렇게 본질주의와 결합하는 세대주의적인 관점은 세대 내의 변이에 대해서, 같은 세대 내에도 완전히 극과 극의 성향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세대 내에서 주류가 아닌 존재는 기껏해야 예외 취급되거나 아예 상징적인 절멸을 겪기도 한다. 내가 세대를 존재론적이 아닌 수행적인performative 차원에서 이해하고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세대화와 성별화의 메커니즘
우리가 ‘세대’라고 부르는 특유한 집단적인 성질은 생물학적으로 혹은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가진 객관적인 연령이, 혹은 특정 시기―주로 청소년기로 논의된다―에 겪은 공통적인 경험이 사람의 특정한 특성을 빚어내지는 않는다.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교류하고 공동체와 집단을 형성하도록 하는 문화적인 배경, 즉 세대주의 자체가 제도화됨으로써 실질적인 세대화generationalization를 만들어낸다. 연령 기준과 연동되어 있는 많은 사회적 제도들, 그리고 생애주기에 따른 생애 과업에 관한 문화적 관습들은 동년배의 또래 집단 내부의 동질성과 다른 또래 집단 사이의 이질성, 즉 세대들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강화한다. 예컨대, 현재의 중학생들은 자신들의 동질적인 집단적 정체성을 ‘중학생’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며, 동시에 현재의 초등학생들을 ‘요즘 초등학생들’이라는 타자로 정의함으로써 자신들과의 세대적 구분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또한, 각자의 생애주기에 맞는 행동을 하도록 유도됨으로써 개인들은 연령에 밀접하게 연동된 세대를 수행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개인들의 행동은 개인의 연령에 따른 역할 기대와의 관계 속에서 미세 조정된다.
최근 화두가 되는 청년의 정치성향과 관련해서도 정확히 지적해두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 이념 및 투표 성향이 세대(연령대)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상상, 그리고 그러한 상상에 기반을 두는 정치 주체들의 전략이 정치적인 선호와 성향, 네트워크 등이 세대를 중심으로 모이게 되는 현상에 선행한다. 과거 한국이나 해외의 선거 및 정치 사례에서도 연령대에 따라 선호 후보나 정책, 정당 등이 갈리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최소한 한국사회에서 ‘세대의 정치’가 정치권과 학계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386세대’가 정치적으로 주목받게 된 이후이며, 특히 청년세대의 정치성향이 이만큼이나 중요한 쟁점으로 다뤄지게 된 것은 2007년 ‘88만원세대’가 만든 담론의 자장 안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선거 때마다 청년층의 투표율이나 청년정책 등이 핵심 쟁점으로 등장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은, 역으로 정치 장에서 세대라는 변수가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한국사회의 정치 영역에서 세대주의가 강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상황은 오프라인/온라인 공론장 및 각종 네트워크 등이 세대에 따라 분화되고, 정치인들의 지지층 결집을 위한 정책 및 정치 전략 설계가 세대별로 나뉘는 경향으로도 연결된다.
먼 길을 돌아왔다. 이제 ‘청년세대’로의 우회를 중단하고 ‘20대 남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세대화와 성별화genderization가 어떻게 교차하고 있는지를 곧바로 논의하려고 한다. 나는 세대 개념을 우리가 존재론적인 방식에서 수행적인 차원으로 옮겨 이해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는데, 이 아이디어는 애초에 성별gender 개념을 생물학적 본질주의로부터 끄집어내어 수행성performativity의 차원에서 다루고자 했던 페미니스트 학자들의 선행연구들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이다. 5 남성과 여성의 젠더 이분법gender binary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 즉 남성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여성은 어떤 성격을 지니는 것처럼 보이고, 다양한 조사 결과에서 남성 평균과 여성 평균의 체계적인 차이가 나타나는 원인은 남성과 여성의 신체구조 때문도, 염색체로 인해 결정된 근원적인 뇌구조의 차이 때문도 아니다. 세대의 특성과 세대 차이가 그렇듯이, 성차 역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생산되는 무엇이다.
청년세대에 관한, 남성과 여성에 관한, 그리고 최근의 ‘20대 남성’에 관한 논의들 상당수가 본질주의적 환원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그 같은 논의들은 범주들을 본질화하면서 ‘청년세대, 20대 남성, 여성’ 등의 이름과 그 이름이 가리킨다고 믿어지는 사람들 전체를 너무 손쉽게 일반화하는 방식으로 연결한다. 또한, 우리가 ‘세대차’나 ‘성차’라고 말하는 현상이 생겨나는 원인을 다시 세대나 성별에 귀속시키는 순환 논리가 빠르게 논의의 지형을 잠식하곤 한다. 남성이 남성인 한 어쩔 수 없다는, 20대는 ‘이명박근혜’ 시기에 이미 교육을 잘못 받은 존재라는 식의 논의들은 무언가 명쾌하게 설명을 제공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는 단순한 논리다. 연령과 성별이라는 ‘본질’과 단절하지 못한 논의는 대안을 이야기함에 있어서도 무력할 수밖에 없다. 이미 본질이라고 믿고 있는 것을 변화시킬 도리는 없기 때문이다.
세대화와 성별화는 문화적인 사실이다. 최근 ‘20대 남성’과 관련된 현상들에 대해 놀라움과 충격을 표하는 경우가 많다. 20대가 중장년층보다 ‘진보’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낮게 나왔다는 사실이나, 20대 남성과 20대 여성 사이에 정치이념 성향 및 가치관에 커다란 격차가 드러나는 상황에 대해 역사상 초유의 일이라는 호들갑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청년세대와 기성세대 이분법으로 혹은 10년 단위의 세대 구분법으로 사람들을 구분하는 세대주의적인 상상이, 남성과 여성으로 세계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젠더 이분법적인 상상이 존재해온 역사의 길이만큼 세대화와 성별화는 이미 존재해왔다. 새로운 현상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는 얘기다. 어린 시절부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분리하여 교육하고, 따로 놀도록 하며, 다른 문화적 가치관을 부여하고, 남자에게는 군대의 의무를 여자에게는 이등시민의 자리를 배치하는 제도가 존재해왔다. 그리고 이 바탕이 사이버스페이스로 연결되면서 젊은 세대가 많이 참여하는 온라인 공론장의 성별화가 나타났다. 스포츠, 게임 중심의 남초 커뮤니티와 연예, 뷰티 중심의 여초 커뮤니티는 젠더 이분법을 재생산하면서 남성과 여성으로 이해관계가 명확하게 나뉜다는 식의 본질주의적인 상상을 확장하는 데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보수’라고 부르는가 - ‘보수화’ 담론의 한계
문화적인 사실로 세대화와 성별화를 이해할 때, 거기에서 정치의 가능성과 변화의 잠재성이 새롭게 솟아난다. 어떻게 보면, 젊은 층은 진보 내지는 민주당 지지자에 가깝다는 강력한 연결고리가 존재함에 불구하고 20대 남성이 ‘보수’화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세대성이 결코 특정한 연령이나 생애주기, 사회적 위치가 주는 구조적인 객관성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실천들 속에서만 형성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청년세대든, 20대 남성이든 이들의 정치성향에 대해서 알고 싶고 또 전망하고 싶다면, 탐구해야 할 대상은 ‘20대 남성’이 어떤 사람들이냐 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이 아니라 ‘20대 남성’을 구성하는 작업에 있어서 어떠한 실천들이 어떤 주체들에 의해 구성되어왔는지, 또 앞으로 어떤 실천을 대안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즉, 사회적 범주에 관한 문화정치를 분석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앞의 ①~③에 드러나는 ‘20대 남성’에 대한 분석과 말하기는 정치적 차원에서 생각하여야 그 의미를 더욱 적절하게 파악할 수 있다. (사회적인 말하기는 결국 정치적인 것과 분리 불가능하다.) 세 사례 모두에서 드러나는 것은 결국 ‘20대 남성’이 일반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반화시켜 논의하는 맥락에서 ‘20대 남성’이 정치적 언어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 가지 주장은 서로 결합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한다. 예컨대, ② 논리의 핵심이 20대 남성이나 청년층의 정치성향이 기본적으로 과거에 비해 보수화되고 있다는 주장에 있다면, ①과 ③은 오히려 이들이 보수화되었다기보다는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성향이라는 다른 전선에서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큰 틀에서 ①, ②가 광의의 진보 진영이 수행하고 있는 담론이라고 볼 수 있다면, ③은 보수 진영의 담론에 가깝다.
만약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보수’로 정체화하는 20대 남성들이 많아지고 있다면, 이미 세대화되고 성별화된 공론장, 이해관계, 그리고 정치적 정체성 내에서 20대 남성들이 ‘보수화’되고 있다는 분석, 그리고 ‘보수’의 담론이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최근 진행되는 여론조사들을 보면 만 19~39세 청년층 내부에서 만 19~24세 남성 코호트는 스스로를 ‘진보’라고 답한 비율보다 ‘보수’라고 답한 비율이 높은 유일한 응답층으로 분류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현재 ‘20대 남성’과 관련해 가장 주류적인 기호라고 할만한 ‘보수화’와 연동된 담론이 누구에게 더 유리하게 작동하는가를 드러낸다. 20대가 진보적일 것이라는 등식이 실제로 성립하지 않으며 최근 20대들의 보수화가 두드러진다는 논의는 애초에 보수 언론을 통해 200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제시되어 온 담론이다. 보수 진영에게 청년들의 ‘보수화’는 청신호이기 때문에, 보수는 청년들이 ‘진보’에게 환멸을 느낄만한 약한 고리들을 찾아내고 계속해서 ‘보수화’를 환영하고 굴러들어오는 유권자들을 환영하면 되는 위치에 있다.
반면 진보 진영에서 ‘보수화’론은 거의 항상 마이너스 방향으로 작동한다. 진보 진영에게 유권자 이탈을 알리는 위험 신호로 작용하는 탓이며, ‘청년=진보’라는 등식이 너무 강고한 탓에 마치 맡겨둔 표를 잃은 듯한 반응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보수를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으로 진보를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민주평화당 등으로 설정하는 이분법적인 ‘보수’ 규정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사실 ‘보수화’는 누군가가 가진 다양한 가치관이 ‘보수적’으로 되는 현상을 포괄적으로 일컫기도 하는데, 예컨대 ①에서와 같이 안티페미니즘, 공정함에 민감한 개인주의화, 신자유주의 내면화 등이 ‘보수화’로 규정되기도 했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20대 남성’, ‘청년’ 혹은 ‘세상 사람들’에 대한 ‘보수화’론은 주로 ‘보수’ 자체가 도덕적으로 나쁜 것 혹은 떳떳하지 못하거나 세상에 해로운 것임을 가정하는 태도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주로 ‘보수’가 된 저편 사람들은 협력할 수 있는 파트너보다는 해결하고 극복해야 할 문제 대상으로 빠르게 위치 지어지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계몽’의 방식이 무언가를 실제로 바꾸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다. 한국의 정치적 갈등 지형이 민주/반민주 갈등에서 진보/보수로 넘어오기는 했지만, 민주 진영이 가지고 있는 정당성과 반민주 진영의 윤리적인 결함이 진보/보수 구도로 그대로 연결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반민주라는 구도가 진보/보수로 재편되는 과정은 다른 말로는 사실상 보수가 스스로를 윤리적인 갈등 없이 선택 가능한 하나의 정치적 선택지로 정당화하는 과정과도 동일한 것이었다.
‘20대 남성’과 관련한 진보 진영의 ‘보수화’ 담론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정작 그 담론이 겨냥하는 20대 남성 내의 ‘보수화’된 사람들이 스스로가 ‘보수’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을 문제화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하면 할수록, 이 문제적인 주체들은 자신들을 문제시하는 그들이 더욱 문제적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20대 남성’은 왜 보수화되었는가를 파악하고자 하는 열망을, 왜 현재의 ‘진보’는 그들에게 인기가 없는지를 알고자 하는 태도로 전환시켜야 한다. 사실상 탈이념화되어 있지만, 현재의 ‘진보’에 대해 반감을 적립하며 새롭게 ‘보수’ 이념화되고 있는 청년 개인들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들을 바꿀 궁리가 아니라 그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우리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왜 ‘20대 남성’이 아닐까
꼭 덧붙여야 할 이야기가 하나 남았다. 보수화된 20대 남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우리를 구성하기 위해서 실제 20대 남성의 이야기를 들어보거나 20대 남성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기 위해서 골몰하는 일은 사실상 별 영양가가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정치적 용어로 사용되는 ‘20대 남성’은 실제 20대 남성을 체계적으로 대표하지 않으며 오히려 맥락에 따라서 필요에 따라 다른 기의가 기입되는 경우가 다수이기 때문이다. ‘20대 남성’이 그렇게 문제가 된다는데, 그래서 사방팔방에서 20대 남성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하는데, 왜 나 같이 안티페미니스트가 아니고 문재인 정부에 불만이 있지만 국정수행지지 여부를 물으면 지지한다고는 답할, 취업이 안 돼서 힘들어하고 있다기보다는 프리랜서이자 대학원생으로서 앞으로의 커리어를 능동적으로 개발하는 일에 더 관심을 두는, 그리고 청년으로서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정책에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20대 남성의 목소리는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을까? 6 왜 나는 혹은 내가 공감할 수 있는 20대 남성들은 ‘20대 남성’으로 취급되지 않는 것일까?
나는 ‘20대 남성’에 대한 원고청탁을 받아서 이 글을 썼고,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다른 매체에서 ‘20대 남성’에 관해 쓴 글을 <중앙문화> 편집진이 보았기 때문이고,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한 방송사 다큐멘터리 팀으로부터 ‘20대 남성’ 관련한 자문요청 전화를 받았다. 죄송하지만,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20대 남성’이 누구인가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노력했고, 이러한 태도를 비슷한 다른 경우에서도 고칠 생각이 없다. 자꾸 ‘20대 남성’을 이야기하는 게 세상에 별 도움이 된다는 생각, 혹은 더 나은 ‘진보’를 위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다.
1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20대 남성들 내에서 ‘반페미니즘 전사’가 탄생했다는 화두를 던진 <시사IN>이 최근 기획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기보다는 기존에 다양한 방식으로 이미 논의되어 온 주제에 대한 계량적 근거를 제시하였다는 면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2 ‘정치공학’이라고 쓰니 대단히 전문적이고 고급 기술을 사용하는 분야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적어도 청년과 관련해 나왔던 전략들은) 사실상 연령, 성별, 지역 등의 변수를 바탕으로 정당 지지율이나 선거에서의 승패를 예측하고 전략을 기획하는 대단히 기초적인 수법에 지나지 않는다.
3 앞으로의 서술과 관련된 쟁점은 다음의 논문에서 더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김선기 (2014). 세대연구를 다시 생각한다: 세대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 검토. <문화와 사회>, 제17권, 207-248. 김선기 (2017). 청년-하기를 이론화하기: 세대 수행성과 세대연구의 재구성. <문화와 사회>, 제25권, 161-210.
4 White, J. (2013). Thinking generations. The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64(2), 216-247.
5 가장 대표적으로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젠더 수행성gender performativity 논의와, 젠더-하기doing gender를 개념화한 웨스트Candace West와 짐머만Don H. Zimmerman의 논의를 참고할 수 있다.
6 필자는 만 29세, 올해까지는 20대 남성이므로 이해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