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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마타 Aug 09. 2017

'내'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대만소설, <미로의 정원 迷園>(리앙李昻 作)을 읽고

대만의 여성 작가 리앙(李昻)의 첫 장편소설 <미로의 정원(迷園)>은 주인공 주잉홍이 아버지 주주옌으로부터 물려받은 함원(菡園)을 공간적 배경으로, 일본의 식민지배가 종결되고 국민당 정부의 군사독재가 시작된 2.28 사건* 전후, 즉 1940-50년대의 대만과 급속한 경제성장기였던 1970-80년대의 대만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많은 대만의 독자와 평론가들은 함원이라는 공간을 대만을 상징하는 알레고리로 읽어왔던 것 같고, 이러한 맥락에서 리앙은 대만에서 ‘국민작가’의 반열에 올라있다는 정보를 웹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몇몇 한국의 평론가들은 대만과 남한이 모두 일본으로부터 식민지배를 겪었으며 군부독재를 경험했다는 역사의 공통점으로부터 이 소설을 독서하는 방법을 찾기도 한다. 급격한 경제성장기를 지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한 서평에서는 이 소설을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에 비유하기도 했다(cf. Liou, 2016).


그러나 문학작품의 수용은 기본적으로 독자가 가지고 있는 삶의 맥락에 의해 매개되는바, 나는 대만의 역사에 대해 문외한인 한국인일 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과 박정희 독재를 직접 경험한 적이 없이 역사교과서를 통해서만 배웠던 80년대 후반 출생의 젊은 독자다. 게다가 문학 전공자도, 대만 내지는 중국 전공자도 아니기 때문에 작품의 문학적 성취나 사회 개입적인 의도에 대해서 적절하게 해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내게 주어진 남은 선택지는 주인공의 상황과 감정에 최대한 이입하면서 내 마음 속에서 새어나오는 느낌들에 촉을 세우는 가장 초보적인 하지만 누구보다도 진지한 소설 독자가 되어 글자들을 읽어나가는 것이었다. (물론 나와 주잉홍 사이에 놓인 결정적인 차이들 – 특히 주잉홍은 엘리트 가문 출신의 여성인 반면, 나는 평범한 남성이다. - 을 염두에 두고서.)


타자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기


소설은 각각 2개의 소절로 구성된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 소절은 주로 1940-50년대를 배경으로 주잉홍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펼쳐지며, 뒷 소절은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사업파트너이자 연인이었던 주잉홍과 린시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앞 소절을 읽지 않고 뒷 소절만을 선택적으로 읽는다면 이 소설은 여성인 주잉홍의 감정과 심리를 탁월하게 담아낸 연애소설로서도 그 가치를 지닐 것이다. 특히 주잉홍의 성적인 욕망에 대한 과감한 묘사와 주잉홍의 ‘주체적인’ 성적 행동의 서술은 소설이 쓰인 시기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파격적이다. 오늘날의 대중문화/문학에서도 린시겅과의 구강성교 이후 자신의 린시겅에 대한 성적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유부남인 Teddy와의 섹스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는 주잉홍과 같은 여성 주인공 캐릭터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주잉홍은 Teddy에게 키스나 애무를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그를 전적으로 쾌락의 도구로써만 이용한다.


주잉홍의 이러한 주체적인 면모는 그를 다소 정복적인 욕망으로 가득한, ‘남성적인’ 여장부 캐릭터로 독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예컨대, <미로의 정원>이 한국어로 번역된 직후 나온 한 서평(세계일보, 2012, 8, 10)에서는 주잉홍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주잉훙은 늘 함원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길 열망하고, 재력가인 린시겅과 혼인함으로써 그 꿈을 이룬다.” 이렇게 보면 주잉홍의 서사는 자신의 욕망에 대한 집념을 바탕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어내는 성공 서사에 가깝다. 함원을 복원하겠다는 욕망, 린시겅과 결혼하겠다는 욕망이 실현됨으로써 이러한 서사는 해피엔딩으로 종결된다. 더불어 이러한 시점에서 보면, 주잉홍이 린시겅과 함께 복원시킨 함원을 대만인들을 위해서 기증함으로써 온전한 ‘대만’이 대만인들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욕망하고 그 욕망을 채움으로써 달성되는 성공 서사 안에서보다 다른 서사 위에서 주잉홍을 독해할 때 캐릭터의 입체적인 매력이 더 살아난다. 실제로 소설에서 주잉홍이 욕망했던 것들을 성취하게 되는 시점은 그의 욕망이 극한에 달했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 욕망을 스스로 놓아버린 이후다. 즉, 이미 주잉홍에게 함원의 복원이나 린시겅과의 결혼 그 자체가 중요한 욕망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주잉홍이 결국 원하던 것을 얻어냈다고 말하는 식의 서사 해석은 부적당한 측면이 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자크 라캉의 명제 그대로, 주잉홍이 열망했던 함원의 복원은 아버지 주주옌의 욕망이었고, 린시겅에 대한 욕망은 사실상 이미 유부남이었으면서도 주잉홍을 소유하고자 했던 린시겅의 욕망에 주잉홍이 휘둘린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이 소설에 투사되곤 하는 ‘완전한 대만’에 대한 열망 또한 일본의 식민 지배 그리고 국민당의 군부독재라는 역사적 현실 속에서 전도된 포스트식민주의적인 욕망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청혼을 받기 위한 마지막 카드로 여겼던 자신의 아이를 지워버린 후, 주잉홍은 린시겅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이제 주잉홍은 린시겅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는다. 주잉홍은 함원을 복원시키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아버지의 유언을 완전히 따르지 않고, 주씨 가문의 사유지였던 함원을 대만의 인민들을 위해 기증한다. 이제 주잉홍은 주주옌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는다. 주잉홍은 아무 것도 강렬하게 욕망하지 않음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주체적이고 편안한 상태를 획득하게 된다. 아마도 진정한 ‘나’로 된다는 것은 나를 지배하고 있는 타자의 욕망들로부터 스스로 해방되는 일인 것인지도 모른다.


비뚤어진 욕망에서 사회를 해방시키기


그러나 진정한 ‘내’가 되기 위해서는 각자의 전도된 욕망들을 지워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회가 어떠한 욕망들을 어떻게 ‘나’들로 하여금 욕망하게 하는지를 구조적으로 확인하고 개선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많은 문학작품들이 그렇듯, <미로의 정원> 역시도 이야기에 반영되는 시대상들을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특정한 진실들을 마주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린시겅과 주잉홍의 첫만남 그리고 잦은 우연한 재회가 이루어진 장소는 대만 건설업계의 비즈니스가 이루어지던 룸, 즉 성판매 현장이었다. 고도 성장기의 그늘에서 여성을 물화하고 비즈니스의 도구로 삼는 식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가 상실되는 모습, 여성을 동등한 주체가 아닌 정복의 대상으로 대하는 특수한 남성성이 형성되는 모습을 리앙은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린시겅은 아시아의 4룡으로도 불렸던 대만의 고도성장기와 남성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잉홍이 린시겅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게 된 후, 함원에서 주잉홍과 사랑을 나누려던 린시겅에게 발기불능**이 나타나게 되는 소설의 결말부는 의미심장하다. 마치 함원의 복원이라는 소설 속의 사건이 남성, 성장, 민족과 같은 핵심어들로 설명되었던 과거의 대만 역사의 완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핵심어들을 과거에 묻어 두고서 전혀 새로운 대만을 위한 새로운 핵심어들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여정이 이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그렇게 리앙은 과거와 현재의 상징을 소거시키고 있다.


소설에는 6개의 장을 제외하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따로 붙어 있는데, 본문과 전혀 동떨어진 것으로 이해되는 프롤로그의 의미는 에필로그까지 모든 글자들을 다 읽고 나서야 독자에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리앙은 프롤로그에 함원 기증식이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되는 장면을 배치한다. 그리고 그 텔레비전 수상기의 화면에 ‘Help Charlie’라는 글자가 겹쳐 반사되는 모습을 묘사한다. 찰리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만의 첫 번째 에이즈 환자로, 게이다. 전형적인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소거와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두꺼운 책의 맨 앞과 맨 뒤에서 시간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어쩌면 아직도 현실이 아닌 두 가지 목표가 자유로운 ‘나’들을 위한 미래의 과제로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나는 해방된 ‘내’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참고문헌

Liou, L. Y. (2016). The Lost Garden by Li Ang. Tulsa Studies in Women's Literature, 35(2), 549-551.

김순진 (2008). 李昻 소설을 통해 본 국가와 섹슈얼리티 - 『迷園』을 중심으로. <중국현대문학>, 45, 81-110.



* 2.28 사건은 1947년 2월 27일 타이페이역 근처에서 담배를 몰래 팔고 있던 여성을 본토 출신의 전매국 단속원이 구타하면서 시작되었으며, 대만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본성인(本省人, 대만인)과 13%를 차지하며 국민당 정권과 함께 건너온 외성인(外省人) 사이의 갈등으로 발생하였다. 본성인들의 데모를 막기 위해 국민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에 나섰으며, 이로 인해 외성인 7~8백명을 포함해 무려 2만 8천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참조)

** 김순진(2008, 98-105쪽)은 린시겅의 발기불능을 성적 이분법의 해체라는 젠더 정치적인 전망 하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한 바 있다. 발기불능을 통해서 린시겅의 ‘남’성이 해체되며, 주잉홍이 결혼관계 내에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됨으로써 ‘여’성의 일부가 상실된다는 것이다. “양성 대립적 사유는 남성 중심이든 여성 중심이든 구조적으로는 가부장제를 되풀이하기 때문에”(98쪽) 리앙이 주잉홍 캐릭터에 부여한 것은 새로운 “‘여성적’ 자아의 회복” 서사가 아니다. 보드리야르, 들뢰즈 등의 철학자를 경유하는 이와 같은 해석은 보편적인 ‘여성’ 범주를 거부하는 페미니즘이라는 측면에서 주디스 버틀러의 사유와도 접점이 있다고 여겨진다.

*** 우연히도, 내가 소설을 읽기 시작했던 5월 27일이 되기 겨우 3일 전인 24일, 대만 최고법원은 동성결혼 금지법 위헌 판결을 내렸고 대만은 사실상 아시아에서 최초로 동성혼을 합법화한 국가가 되었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A대위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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