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리, ⟪메피스토⟫
신과 인간 모두에게 버림받은 ‘떠돌이 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외로운 악마 메피스토. 자신의 청각장애를 향한 세상의 비아냥으로 인해 홀로 살아가는 조용한 소녀. 아무도 자신들에게 따듯한 손길을 내밀지 않는 세상에서, 소녀와 개는 서로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일) ‘내 편’이 되어준다. 그들만의 ‘못된 짓’으로 버거운 현실을 버티며 함께 살아간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된 소녀는 개와의 시간을, 개와의 기억을, 개의 존재를 조금씩 잊어버리게 된다. 사랑하는 소녀를 잃지 않기 위해, 개는 소녀의 기억을 되돌릴 금지된 마법을 사용한다. 사랑하는 악마를 구원하기 위해, 소녀는 마법으로 부여받은 기억 속에서 둘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 내려간다. 넘치게 사랑받아 벅차게 행복했던 ‘엉터리 기억’들은, 소녀와 개 모두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지상의 천국을 현상한 ‘상상’이었다.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를 재해석한 루리 작가의 신작 ⟪메피스토⟫. 원작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또한 주인공 파우스트에게 인생을 다시 살아볼 기회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 행위의 배경에는 그 어떤 사랑도 없다. 메피스토펠레스에게선 이성과 논리를 넘어서는 사랑을 발견할 수 없다. 반면, 재해석된 ‘메피스토’는 사랑을 아는 악마다. 소녀의 기억을 되돌리는 마법, 소녀가 다시금 기억을 살아가게 하는 마법을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바로 자신의 ‘사랑’이었던 메피스토. 그 어디에서도, 그 누구에게도 구원받지 못한 최후의 존재는 늙지도 죽지도 않는 지옥 같은 삶에서 사랑을 구했고, 사랑을 알았고, 사랑을 살았다.
그리하여 사랑이 메피스토를 지켰고, 사랑이 소녀를 지켰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너를 사랑하는 나의 분인(dividual, 分人)이 나를 살아가게 했음을 알았던 소녀와 악마. 나와 너의 패배만을 바라는 듯한 세상에서, 각자의 사랑은 서로의 구원이 되었다.
내 속에는 많은 내가 있다. 고통과 환멸만을 안기는 다른 관계들 속의 나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나를 버텨주기 때문이었다. 단 하나의 분인의 힘으로 여러 다른 분인으로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죽을 때, 나 중에 가장 중요한 나도 죽는다.
- 신형철, ⟪인생의 역사⟫, p.131
되는 일 하나 없는 별 볼일 없는 악마. 소원 한 번 이뤄진 적 없는 운 없는 소녀. 둘이 함께 펼쳤던 온갖 ‘못된 짓’은 오직 둘 뿐인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고 서로를 붙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결핍과 유기가 원인과 결과로 뒤엉킨 지난한 삶. 서로만이 허락할 수 있는 찰나의 자유와 행복은 “되는 일은 없었지만 필사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삶을 견디게 한 동아줄이었을 테다. 불행과 불운으로 점철된 자신들의 수식어를 전복시키려는 의지로 붙잡았던.
루리 작가의 전작 ⟪긴긴밤⟫ 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또한 ‘우리’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구원이 되어준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를 알아가고 찾아가며 나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나를 나에게로 ‘떠나보내는’ 구원의 과정을 담은 ⟪긴긴밤⟫. 서로의 유일한 순리가 되어 서로를 지키며 우리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너를 나에게로 ‘되돌리는’ 구원의 과정을 담은 ⟪메피스토⟫. 평범과 다수와 힘의 범주로 구원받지 못한 이들이 그럼에도 살아갈 삶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두 작품은 ‘우리’라는 펜과 붓으로 완성되었다. 내 몫의 구원이 요원한 세상일지라도 내 존재를 긍정하는, 내 아픔에 공감하는, 내 삶을 감싸안는 사랑과 함께라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하면서. 그것이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순리’ 임을 그려내면서.
“눈이 멀어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절뚝거리며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귀 한쪽이 잘린 채 이곳으로 오는 애도 있어.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문제는 아니지. 코가 긴 코끼리는 많으니까. 우리 옆에 있으면 돼. 그게 순리야.”
- 루리, ⟪긴긴밤⟫, p.12
신이 자신 앞에 무릎 꿇은 인간만을 구원했을 때, 홀로 남겨지고 버려진 악마의 손.
모든 것을 다 잃고 서로마저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서로만을 애타게 바라보는 눈.
어두운 바닥에 비친 그림자의 대비가 오랜 잔상으로 남게 될 ⟪메피스토⟫. 끝내 신이 답하지 않은 구원을 서로에게서 구하고 서로를 위해 내어 준 소녀와 개의 이야기. 타자에 의한 구원이 아닌 서로의, 서로에 의한, 서로를 위한 사랑으로 구원의 실을 꿰어간 이야기는 결국 승리의 이야기다. 내 모든 욕구와 소유에 우선하는 너를 위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너를 위해,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긴 삶. 어쩌면 소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지 않을 것’을 확신했을지도 모른다. 삶이 불타고 사라져 가는 순간에도 소녀가 지켜낸 사진 한 장을 그 확신의 증거로 내밀어본다.
너는 지지 않았지. 우리는 지지 않았지.
* 루리, ⟪메피스토⟫, 비룡소,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