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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Jan 29. 2024

‘우리’로서의 맥락을 발견하는 펜의 시, 붓의 시

조 엘런 보가트 글, 시드니 스미스 그림, ⟪흰 고양이와 수도사⟫

작년 봄의 어느 그림책 수업 시간. 그림책 원서 한 권을 함께 펼쳐보며 모두가 한목소리로 감탄한 적이 있었다. 두껍고도 매끄러운 아웃라인, 또렷한 눈망울, 새하얀 색채로 그려진 이 고양이를 어쩌면 좋죠… 아무렇지 않게 수도사의 방에 들어와 아무렇지 않게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는 이 사랑스러운 고양이를 어쩌면 좋죠… 자신의 조그만 방 안에서 함께 지내는 흰 고양이를 지켜보며 입가에 옅은 호선을 그리는 수도사. 선생님의 나직한 목소리로 수도사의 시를 청해 들으며, 그와 흰 고양이의 모습을 다함께 감상하며, 나를 포함한 몇몇 이들은 이리 말했더랬다. (한숨 섞인 웃음과 함께) 왜 저만 고양이가 없는 거죠...... 왜 아직도 이 책의 한국어판이 나오지 않은 거죠......


저 눈망울에서 이미 이 책은 끝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시기에 고대 아일랜드어로 쓰인 시 ⟨팡구르 반⟩. 21세기의 독자들이 이 오래된 시를 보다 더 평온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도록, 펜의 시 위에 붓의 시를 그려간 시드니 스미스 작가. 그의 익숙한 (그리고 사랑스럽고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운) 그림체로 그려진 흰 고양이와 수도사의 이야기를 마침내 한국어판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겨울날. 생각지도 못한 때에 맞고 맡게 된 이 포근한 기쁨을 품 안에 소중히 끌어안아 본다.




자신의 작은 방을 함께 나눠 쓰는 친구, 흰 고양이 ‘팡구르’를 바라보며 수도사는 한 편의 시를 적어 내려간다.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서 각자 몰두하는 ‘일(work)’의 다르고도 같음을 지켜보며 지키는 시를.


같은 밤, 같은 방. 그 안에서 흰 고양이와 수도사가 행하는 모든 ‘동사(verb)’의 목적어는 서로 다르다. 응시하기(stare), 추구하기(pursue), 배우기(study), 사냥하기(hunt), 찾기(find), 기뻐하기(feel joy)… 서로 접하지 않는 평행선 위에서, 둘은 각자만의 시선과 몸짓으로 각자의 무엇을 쫓아간다. 동시에 서로의 무엇을 함께 지켜본다. 서로의 다름을 지켜보는 방 안에서,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밤 안에서, 흰 고양이와 수도사는 함께 행복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간다. 각자의 기쁨을 모두의 기쁨으로 이을 수 있는 ‘우리’로서의 맥락을 발견하며. 




뒷표지에 담긴 추천사 중에 이런 문장이 있다.

“아이들을 차분하게 하고 명상의 시간으로 인도하는 탁월한 잠자리 그림책.”


탁월한 표현의 주어를 내 맘대로 바꾸면서, 이 그림책을 나의 잠자리 그림책장에 살포시 꽂아 넣었다. 하루동안 애써 쌓고 살았던 수많은 동사에 공감 어린 응원을 보내주고 싶을 때마다, 쉽사리 완료형으로 바뀌지 않는 수많은 동사로부터 파생되는 매일의 지난함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싶을 때마다, 서로 다른 너와 나의 평행선 위에 희붐한 해(sun/answer)가 떠오르기를 바랄 때마다, 주저없이 꺼내어 펼쳐보고픈 ⟪흰 고양이와 수도사⟫. 부디 나의 숱한 밤과 작은 방 안에서, 매일의 수고를 다한 ‘나’를 차분하게 하고 명상의 시간으로 인도해 주길.





* 조 엘런 보가트 글, 시드니 스미스 그림, ⟪흰 고양이와 수도사⟫, 한정원 옮김, 비룡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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