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파란 막대 파란 상자⟫, 2023(개정판)
아이가 이 그림책을 처음 펼쳤던 날을 기억한다. 두 개의 이야기가 한 권의 그림책에 담긴 만듦새를 신기해하며 한참동안 책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던 아이. 아직은 아이가 글밥 많은 그림책을 혼자 읽기 어려워 했던 때라, 아이 곁에 앉아 한 줄씩 이 책을 천천히 읽어주었던 것이 연초의 일이었다.
그리고 지난주. 같은 이야기지만 새로운 판형, 새로운 표지로 세상에 새로 나온 이 그림책을 보자마자 아이는 반갑게 외쳤다. “어, 이 책 얼굴이 바뀌었네?” 표지에 적힌 제목만 보고도 여전한 것과 달라진 것을 바로 알아채는 아이의 눈썰미와 기억력에 소리 없이 감탄하며, 어느샌가 소파에 앉아 홀로 이야기를 읽어내려가고 있는 아이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엄마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아이도 좋아하는 순간의 기쁨을 소리 없이 만끽하면서.
아홉 살 생일을 맞아 클라라는 ‘파란 막대’를, 에릭은 ‘파란 상자’를 선물로 받게 된다.
“그 막대는 우리 집안의 모든 여자아이들에게 대대로 전해내려온 것이란다.”
“그 상자는 우리 집안의 모든 남자아이들에게 대대로 전해내려온 것이란다.”
몇 세대를 거쳐 내려온 파란 선물과 함께 건네받은 낡은 공책에는 앞선 이들이 각자 어떻게 이 선물을 사용했는지를 적었던 기록들이 담겨있다. 공책을 펼쳐 지나간 시간 속의 지나간 쓰임새를 하나씩 확인하고 상상하며, 클라라와 에릭은 연신 감탄한다. 동시에 자연스레 알아차린다. 시간과 비밀이 겹겹이 쌓여온,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로 전달된 이 ‘선물’의 쓰임새를 자신 또한 마음껏 결정할 수 있음을. 이 공책에 담긴 지나온 기록과 자신의 손으로 더할 지금의 기록 모두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귀한 생일 선물임을.
“다음 사람한테 물려주기 전에, 나도 이 공책에 멋진 이야기를 적어 놓을 테야.”
같은 시간을 살지 않은 이가 앞서 남긴 ‘사용기’를 들여다보며 같은 물건을 사용하는 다양한 방법을 상상하는 시간. 파란 선물을 대하는 다 다른 마음을 알아채는 신비로운 시간. 여러 세대의 아홉 살을 거쳐온 낡은 공책이 지금, 클라라와 에릭의 아홉 살을 환영하는 시간. 클라라와 에릭은 파란 막대와 파란 상자와 함께 쓰이는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앞서간 이들과 함께 쓰는 이야기의 ‘구성원’으로서 초대받았다. 생일을 맞은 아홉 살 아이들이 물려받은 것은 제 마음과 제 뜻을 깊이 들여다보고 고이 내보일 수 있도록 도울 용기와 응원의 파란 물성이었다.
각기 다른 두 이야기가 한가운데의 트레이싱지에서 만나는 장면 위에서, 둘인 듯 하나인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언지 짐작해 본다. 과거와 현재를 뛰어넘어 ‘교감’할 수 있는, 이곳과 저곳을 뛰어넘어 ‘이해’할 수 있는, 가상과 실제를 뛰어넘어 ‘연결’될 수 있는 우리의 가능성. 다 다른 생각과 마음이어도 얼마든지 서로에게 다다를 수 있다는 다정한 마음과 따듯한 믿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안에서 이야기 밖으로 전달된 온기가 급격히 추워진 날씨에 차가워진 두 손을 오래도록 덥히고 있는, 2023년 11월의 어느 날이 지나가고 있다.
2004년에 출간되어 20년 가까이 사랑받았던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작가의 ⟪파란 막대 파란 상자⟫. 주어와 목적어만 다를 뿐 비슷한 전개로 흘러 마치 쌍둥이처럼 느껴지는 두 이야기는 이전보다 작아진 판형, 이전보다 밝아진 표지, 이전과는 달라진 서체와 구성으로 독자의 곁에 다가와 마음 문을 다시 두드리고 있다.
시간이 흐르며 달라진 모습도,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이야기도 모두 다 아름답고 반가운 작품 ⟪파란 막대 파란 상자⟫.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낡은 공책이, 면지 위에서 각각 다른 포장지로 감싸져 있는 상자와 막대들이 여전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 파란 막대를 어떻게 쓰고 싶나요?
당신은 이 파란 상자를 어떻게 쓰고 싶나요?
당신의 이야기를 적어주세요.
그 어떤 쓰임도 틀리지 않다는걸, 그 어떤 이야기도 포개어질 수 있다는 걸 이 막대와 상자로 표현해주세요.
*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파란 막대 파란 상자⟫, 이지원 옮김, 사계절출판사, 2004 (초판) & 2023 (개정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