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에는 큰 변화의 지점이 있다. 입학에서 졸업으로, 취업에서 이직이나 퇴직으로,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은퇴까지 숱한 변화의 상황을 맞는다. 과거에 청년기는 학습, 중년기는 일, 노년기는 여가 활동을 의미했다면, 현재는 하나의 장기 과정으로 이해한다. 학습, 일, 여가의 시기가 따로 있는 단속적인 개념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복합적으로 전개된다는 뜻이다. 은퇴가 특정 사건이었다면 현재는 긴 인생에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은퇴와 노후 생활 측면에서 보면 4가지 변곡점 - 퇴직, 정년, 은퇴, 그리고 수명 - 이 중요하다.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하는 나이는 평균 49.3세, 직업의 유동성이 심해지면서 갈수록 앞당겨지는 경향을 보인다. 정년은 60세, 대다수 직장인이 일을 떠나는 법적인 나이다. 하지만 60대의 절반은 여전히 일한다. 일에서 완전히 떠나는 은퇴 평균 연령은 72.3세로 집계된다. 대한민국 국민의 기대수명은 82.7세(2022년 남녀 평균). 수명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노후에 있다. 길고 힘든 현역 생활을 마치고 이제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은퇴 후 생활과 자유인의 삶, 어떤 마음가짐으로 맞으면 좋을까. 크게 3가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쉽진 않지만 내가 늘 실천하려고 하는 일상의 모습이다.
1. (의미와 가치) 즐겁고 재미있게 산다
현역과 예비역, 직장인과 자유인의 삶은 크게 달라진다. 현역이 경주나 게임을 수행하는 것처럼 경쟁과 긴장 속에서 생활한다면, 예비역은 여행하듯이, 축제에 참가하듯이 여유와 자유의 시간을 즐긴다. 누구나 삶의 목표는 행복이지만,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는 생애 주기에 따라 다르다. 전반부에는 돈이나 명예, 권력이 중요하다면, 나이가 들면 재미와 의미, 보람이 중심이 된다. 전반부 인생과 후반부 인생을 단순화해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모두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김성일
인생의 전반부에 우리는 끊임없는 비교와 평가 속에서 줄타기 같은 생활을 한다. 하루하루가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지만, 성취와 성공이란 달콤한 열매를 수확하는 시기다. 경쟁은 냉엄한 현실의 법칙, ‘피할 수 없으면 차라리 즐기라’고 하지 않던가.
나이가 들면 삶의 평가는 완전히 달라진다. 더 이상 외부의 눈높이에 맞출 필요가 없다. 나의 경쟁 상대는 오직 예전의 나만 있을 뿐이다. 어제의 나보다 한 걸음이라도 성장하면 행복한 삶이다. 비교할 필요가 없으니 남의 눈치를 볼 필요 또한 없다. 그저 인생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2. (감사) 준 것은 잊고 받은 것은 꼭 되갚는다
마틴 셀리그먼은 <긍정심리학>(2020)에서 인생 후반기에 특히 중요한 성격 강점 중 하나로 ‘감사’를 들었다. 삶의 변화와 손실을 경험할 수 있는 인생 후반기에는 일상의 작은 기쁨을 발견하고, 과거의 긍정적인 경험을 회상하여 현재의 어려움을 상대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날마다 ‘감사행’(감사해요, 사랑해요, 행복해요)이나 ‘미용감사’(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만 되뇌어도 일상의 충만감이 높아질 수 있다.
인생과 비즈니스는 주고받는 것,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라고 한다. 한자어 ‘거래(去來)’ 또한 주고받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 들면 이런 생각은 빨리 바꾸는 게 좋다. 뭔가를 받기 위해서 누구에게 베푼다는 생각은 아예 지우는 게 낫다. 받기도 힘들뿐더러 스스로 초라해지기 쉽다. 주면 받을 걸 생각하는 게 사람 심리지만, 베푼 건 바로 잊는 게 좋다. 알고 보면 가까운 사람에게 뭔가를 나눌 때 기분 좋아지는 건 바로 자신 아니던가. ‘기브 앤 포겟(give & forget)’으로 바꾸자.
대신 받은 건 반드시 돌려준다는 생각을 실천한다. ‘테이크 앤 기브(take & give)’. 나이 들어 받는 것에만 익숙해지면 추해진다. 후배들에게 아쉬운 소리만 하거나 옛 직장 근처에서 기웃거리는 것도 볼썽사납다. 돈이 많이 들지도 않는다. 고작해야 밥이나 커피 살 정도면 충분하다. 돈이란 통장보다 지갑에 있어야 좋고, 지갑보다 직접 쓰는 게 훨씬 멋진 법이다. 현역 때는 술을 거나하게 먹고 2차, 3차에도 나서지만 나이 들면 그마저 심플해진다. 가끔 생일을 맞은 지인에게 커피 쿠폰을 보내는 건 어떤가. 돈 몇만 원으로 받는 사람도, 보내는 나도 유쾌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그 사람의 웃는 모습을 그려보면 충분하지 않은가. 내가 종종 쓰는 방법이다.
3. (공감과 표현) 내 마음과 감정을 표현한다
호스피스 간병인으로 일했던 브로니 웨어의 책 <내가 원하는 삶>(2013)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큰 교훈과 울림을 줘 화제가 됐다. 난치병 말기 환자들이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건 무엇일까. 다섯 가지가 꼽혔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내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더라면, 친구들과 계속 연락하고 지냈더라면, 나 자신에게 더 많은 행복을 허락했더라면 등 모두 절절하지만, 내게 가장 크게 다가온 건 ‘내 감정을 표현할 용기가 있었더라면’이다.
그건 바로 지금, 어쩌면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마음속에 담아두고 말하지 못한 게 있다면 이제는 모두 풀어보자. 인생 후반전에는 자기감정에 충실해야 한다. 응어리진 마음을 풀고 따뜻한 정을 나누며, 주변의 소중한 사람과 소통하는 건 살아 있는 사람의 특권이다.
특히 나 같은 남자들은 더 분발할 필요가 있다. 남자들은 약속을 하고 만나도 두어 시간이면 자리가 파한다. 일상이나 일 같은 흔한 주제로 대화가 겉돌 뿐, 깊이 있는 인생 고민이나 삶 자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는 드물다. 단톡방 또한 조용하다. 용건만 간단히 말하는 게 일상화됐고, 공감과 감탄, 격려와 응원의 리액션을 찾기란 쉽지 않다. 수다에 강한 여자들에 비하면 남자들은 공감력, 표현력이 떨어진다. 나이 들수록 좋은 감정은 잘 표현하고 나쁜 감정을 훌훌 털어내는 게 심신의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내 안의 ‘다양한 감정’과 친숙해지는 게 중요하다.
진짜 행복의 시작, 노후 인생
나이가 들고 인생이 후반부에 접어들면 가장 중요한 게 마음가짐이다. 노후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생각을 새롭게 정리하는 게 우선이다. 삶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가 전반부 인생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문진수의 <은퇴의 정석>(2024)은 인생 전반부의 부록이 후반부가 아니라, 오히려 후반부를 위한 예행연습으로 보는 게 맞다고 말한다. 백세 시대의 진짜 인생 곡선은 봉우리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기 때문이다. 60세를 기점으로 내리막길에 접어드는 게 아니라, 인생의 두 번째 전성기인 새로운 오르막이 시작되는 것이다.
은퇴자들은 후반부 인생의 전성기에 진정한 행복을 찾을 권리가 있다. 앞만 보고 숨차게 달려온 전반부 인생의 열매를 하나씩 수확해야 한다. 은퇴 준비는 가능하면 빨리, 40대부터 시작하면 좋고 50대에는 마무리할 수 있어야 한다. 미리 충실하게 준비한 사람이 행복한 인생을 누릴 수 있다. 자유로운 인생을 시작한 모든 은퇴자들의 행복을 기원하며, 마음 깊이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