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생활을 설계하는 건 인생 전체를 기획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백세 인생, 평생 현역의 개념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현역 때부터 꾸준한 관심과 준비를 거쳐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후반부 인생을 앞두고 구체적으로 무슨 일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 어떻게 은퇴 생활을 설계하는 게 좋을지 하나씩 알아본다. 크게 보면 4대 프로세스를 꼽을 수 있다.
은퇴 생활의 설계는 우리 인생 전체의 기획과 연결된다. ⓒ김성일
먼저 후반부 인생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재정립하는 일이다. 전반부 현역 생활은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달려야 하는 경주와 비슷했다. 하지만 인생 후반부에는 재미와 의미, 가치와 보람을 중시하며 즐기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한 마음가짐 정리가 꼭 필요하다. (자세한 사항은 연재 3편의 글 '나이 들면 꼭 필요한 마음가짐 3가지' 참고).
자신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
은퇴 생활을 설계하는 다음 단계는 바로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다. 세상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닌가 싶다. 자신을 안다는 건 두 가지 의미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객관적 외형적인 나의 생활 상태 점검
먼저 우리 삶의 5대 핵심 요소별로 나의 현재 상태를 파악해야 한다. ①심신의 건강 상태 ②재무 상황 ③가족과 친구 관계 현황 ④평생 현역의 가능성 ⑤하고 싶은 놀이와 여가 활동 등. 현재의 상황을 확인한 다음에는 은퇴 후 바라는 수준과 비교해 보자. 차이가 많으면 은퇴 계획에 문제가 있는 것이므로, 현실적인 대안을 다시 설정해야 한다. 문제에는 해결책(solution)이 필요하다.
* 5대 요소에 대해서는 추후 연재 글의 주제로 다룰 예정임.
2) 주관적 내면적인 나의 마음 상태 파악
더 중요한 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이다. 현역일 때 우리는 자신과 대면하는 일이 드물다. 바쁜 일상에 쫓겨 내가 속한 사회적 지위와 역할대로 살아가는 게 보통이다. 조직의 큰 울타리에 있을 경우 별다른 부족함을 느끼지도 않는다. 직장이나 직위가 마치 자기 자신인양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명함이나 직함은 일종의 훈장처럼 느끼기 쉽다.
진정한 나로 살려면 가장 중요한 질문
하지만 퇴직 후 계급장을 떼고 나면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온전한 나, 자연인으로서의 나와 마주치는 일이 빈번해진다. 자연스레 자신에게 남은 게 무엇인지 자문할 때가 많아지고, 때로는 상실감과 자괴감에 빠져든다. 이때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 안에 있는 진정한 자아와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욕망을 알아야 후반부 인생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제일기획 부사장을 끝으로 사표를 내고 강남에 ‘최인아책방’을 낸 최인아대표는 인생의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스스로에게 질문한다’고 말한다(<강원국의 인생공부>(2024)). 내게 질문을 던지는 건 나를 대접하고 존중하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값진 질문을 통해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끌고 가는 ‘갑’의 인생을 살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이렇듯 질문하는 건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이다. 은퇴 후라면 행복한 노후를 위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 이유다.
나를 살린 글쓰기
자신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내게는 글쓰기였다. 2020년 30여 년을 근무한 직장에서 퇴직한 후 나는 한동안 허전한 기분에 빠져있었다. 예정된 은퇴였고, 일과 경제적인 면에서 퇴직 후 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적인 공허감과 허탈감은 뭐라 표현할 수 없었다. 내 삶의 현실감이 사라지고 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이 꽤나 오래갔다.
사무실에서 짐을 정리한 날 나는 공주의 한 사찰에 갔다. 사흘간 템플스테이를 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마침 코로나까지 퍼져가던 막막한 시기, 이후로도 거리 두기가 한참 이어졌다. 나는 틈만 나면 집 주변의 골목길과 거리, 뒷산을 걸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신과 세상을 생각하는 시간 또한 숙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브런치를 만났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됐다.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법
글을 쓰면서 가장 좋았던 건 한 발 떨어져 나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아득한 기억 속으로 인생 여정을 떠났고, 작고 소심한 한 소년을 만났다. 산골에서 태어나 낯선 세상을 두려워하던 소년은 도시로 떠나며 한 걸음씩 성장의 시간을 보냈다. 글을 쓰면서 나는 내 안의 깊고 어두운 곳에 웅크리고 있던 숱한 감정을 되새기며, 조금씩 자신을 마주 보게 됐다. 스스로 던진 질문과 답변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이 60, 퇴직을 하고서야 새로운 세상을 얻은 기분이 들었다. 내게 은퇴와 코로나는 뜻밖의 선물 아니었을까.
인생 후반부에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충실해야 앞으로의 인생에 후회가 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재미가 있고 또한 오래 지속할 수 있는 법이다.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아는 건 자신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세상 살면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인생 후반부에는 더욱 절실한 질문이다. 자유로운 은퇴 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응원하며, 진정한 자신과 만나는 행복한 삶이 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