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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환 Oct 02. 2019

가을 베를린, 나는 섹시해지고 싶어졌다.

다시 채워져 갈 마음의 공간

가을 빗소리에 몸을 맡긴다.


투닥 투다닥 툭 투둑...

온종일 내리는 가을비가 우리 집 창문을 두들긴다. 시계는 정오를 가르키고 있지만 창밖은 잿빛이다. 외지인(外地人)들을 불러왔던 그 좋던 여름은 가고, 습기 머금은 가을이 왔다. “오늘 참 베를린답군.” 커피 한 잔을 내려 책상 앞에 앉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습한 공기를 타고 커피 향은 빠르게 공간으로 퍼져나갔다. "투닥 투다닥 툭톡 투둑..." 창밖에서 들려오는 불규칙한 리듬을 따라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튕긴다. 성에 차지 않는다. 책상 앞에 왜 앉았는지도 잊은 체, 아예 음악을 듣기로 한다.

스마트폰 음원어플에서 빌리 아일리쉬(Billie Eilish)의 'Bad guy'을 골랐다. 얼마 전, 중고로 구입한 5.1채널 스피커에서 나오는 리듬을 감당하기엔 내 손가락이 하찮다. "두웅 두 둥 둥 두 둥" 전자음에 심장 박동이 반응한다. 우퍼(woofer)가 내뿜는 베이스음이 공간을 감싼다. 내친김에 발로, 어깨로, 고개를 까딱거리며 리듬을 탄다. 빌리는 몽환적인 목소리로 "Bad guy"를 부른다. 나는 '나쁜 남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표정은 시크(chic)하고, 스타일은 힙(hip)한 베를리너(Berliner)가 납셨다. 이대로 베르크하인(Berghain)으로 가도 될 것 같다. 절대로 문 앞에서 거절 당할 리 없을 거다. 자신감이 흘러 넘친다. 음악이 주는 힘이란. 리듬에 빠져 아까 내린 커피를 잊고 있었다. 한 모금 마시고서 내버려 둔 커피는 식어 버렸다. "식은 커피는 마시는 게 아니다."라며 커피잔에 있던 커피를 싱크대에 과감하게 버리고는 따뜻한 커피를 다시 내려준 어느 바리스타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향을 잃어버린 커피는 더이상 커피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 때문인가. 술 생각이 났다. 그래서 페더바이저(Federweisser)를 가져왔다. 가을 녘에만 맛볼 수 있는 와인, 그 특유의 청량함과 달콤함이 리드미컬한 음악과 아주 잘 어우러진다. 오늘은 낮술도 괜찮다. 창밖에 내리는 가을비가 낮술을 허락한다.


가을엔 발라드지!


음악을 좀 바꿔보자. 이번엔 발라드다. 폴 킴(Paul Kim)의 ‘모든 날, 모든 순간'과 '너를 만나'를 연이어 듣는다. 어느새 술잔은 적포도주로 채워졌다. 발라드 음악에는 목 넘김이 묵직한 적포도주가 제격이다. 진성과 가성을 오가는 가창력이 돋보이는 가수의 얼굴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내가 한참 가요를 즐겨 듣던 때, 당시 발라드 가수들의 얼굴은 죄다 그렇고 그랬다. 사랑을 혹은 이별을 노래하는데 얼굴이 방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발라드 가수가 얼굴로 노래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연기자가 되어 가사의 애절함을 표현해야 하므로 적당히 준수한 외모는 필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다행히(?) 폴 킴은 목소리와 얼굴이 잘 어울리는 가수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혼자만의 감성 여행을 떠났다. 가을비 내리는 어느 날, 나는 적포도주를 마시면서 한참을 그렇게 즐겼다.


Berlin ist sexy


문득, 섹시해지고 싶다는 생각했다. '베를린(Berlin)'이라는 공간이 아니었다면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아주 과감한 생각이다. 나이 마흔에 섹시(sexy)라니? 내 또래 친구들의 몸매는 후덕해진 지 오래다. 불혹의 한국 남자에게 불룩한 배는 기본 옵션이다. 턱선은 매력을 잃은 지 좀 됐고,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하다. 그나마 머리숱을 잃지 않았다면 천만다행이다. 자식들은 커가고, 노후는 걱정되고, 먹고사는 것도 힘든 나이에 '음악을 들으며 리듬에 몸을 맡긴 체 낮술을 마신다?' 그런 것은 대학교 졸업과 함께 추억이 되어버렸다. 한가롭게 가을비를 감상하고, 발라드 음악과 떠나는 감성 여행을 즐길 여유는 없다. 그들은 이리저리 다니며 일(Business)로 만나는 사람들과 주고받는 명함 속에 갇혀 지낸다. 그저 명함에 찍힌 직급만이 남자들을 위로해 준다.


베를린을 수놓은 그라피티. 낙서냐? 예술이냐? 종종 논란을 일으킨다. 정말 뛰어난 작품이 많다. 그래서 이것은 낙서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


'베를린'은 나에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주었다. 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라피티 라이터들(Graffiti writers)과 교수와의 맞담배도 서슴지 않는 대학원 친구들이 보여준 '자유'는 나에게 범죄와 예술, 예절과 친근감 사이에서 눈치 보지 말라고 가르쳐 주었다. 자유가 주어지자, 나를 둘러싼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 공간'을 찾아갔다. (아내와 딸이 외출한 빈집, 홀로 남은 나는 집에서 '나만의 공간'을 만든다.) 거기서 나는 음악 듣고, 술도 마시고, 춤도 춘다. 혼자서도 아주 잘 논다. 아주 재미지다. 그런데 내 또래 친구들은 혼자 놀 줄 모른다. 간혹 집에 혼자 있을 때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잠을 잔다. 일어나서 텔레비전을 본다. 그러다가 또 잠든다. 아주 가끔 포장마차에 혼자 앉아서 소주잔을 기울일 때도 있다. 하지만 오래 못 논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혼자 술 마시는 자기 모습'이 청승맞아 보일까 봐 금새 자리를 일어난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포장마차에서도 남의 시선이 제일 두렵다.


'자기 공간'이 필요하다

심리학적으로 자의식은 공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기 공간'이 있어야 주체 의식도 깨어나고, 책임감도 생긴다. 무엇보다 자신을 꼼꼼하게,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허물도 꾸짖고, 용서도 할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자신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내 또래 친구들은 '자기 공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집도, 회사도 그런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자동차 안에서 유일한 자기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그토록 남자들이 좋은 자동차에 집착하는 거다. 그 공간 안에서라도 자의식을 찾고 싶은 마음에.


혼자서 실컷 놀았다. 창밖에 비가 그치고 나니 가을이 더 깊어진 것 같다.

진짜 가을이다. 일 년 중 가장 멋진 계절. 비록 나의 몸도 세월과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흘러내렸지만 그래도 나는 섹시해지고 싶다.

스무 살 사진 속의 모습처럼 날카로운 턱선도, 탄력 있는 애플힙도, 숱 많은 새까만 머리도 다시 찾을 거다.

왜냐하면 가을이니까.


가을 베를린, 나는 섹시해지고 싶어졌다.


가을비가 멈추고 햇살이 집안을 비췄다. 책상에 앉아 바라본 창문. 그 앞에 치우지 않은 라면 그릇과 커피잔 그리고 생수병. 평범한 장면을 눈에, 사진에 담을 수 있는 것도 '베를린'이 나에게 준 '여유' 때문이다.

'여유'는 과하면 혼난다. 빈 그릇을 안 치웠다고 혼난다. 남의 눈치는 안 봐도 가족 눈치는 봐야 가정이 평화롭다. 이것은 진리다.


베르크하인(Berghain)

; 베를린에서 가장 힙한 클럽이다. 저세상 텐션을 뿜뿜하는 곳이다. 전문용어로 '뺀지' 즉, 문 앞에서 입장을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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