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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환 Oct 23. 2020

싹 다 갈아엎어 주세요

열등감과 수치심으로 가득했던 마음의 공간

서울에서 살았다고 했죠?


“서울에서 살았다고 했죠? 서울 어디에서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장작불 옆에 앉아 남자 셋이서 서로의 신상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모두 한인교회 수련회에서 만난 사이다.

“저는 용산구에서 쭉 자랐어요.” 내가 말했다.

“용산구 어디요? 저도 한남동 근처에서 아주 잠깐 일했었는데...” 나보다 세 살이 많고 베를린에 있는 IT 회사에 다닌다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내게 구체적인 동네 이름까지 알려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네? 아... 이촌동이요.”

“오올~ 집이 좀 사셨나 보네요.” 성악을 전공했다는 또 다른 남자가 말을 건넸다.

"....."

“거기 유명한 파이 가게가 있는데 이름이 뭐더라?”

“루시파이요?”

“아 맞다. 루시파이.” 남자가 친근한 미소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민 사회에 살다 보면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이런 내용의 대화를 종종 나누게 된다. 서로의 학연, 지연에 대한 탐색을 마치고 나면 나와 상대방 사이에 뭐라도 하나쯤은 연결고리가 발견된다. ‘여섯 사람 건너’Six Degrees of Separation)를 처음 제안했다는 마르코니(Marconi)의 말은 매번 이렇게 증명된다. 인간관계가 아닌 것으로 엮이는 경우도 있다. 살았던 동네만 알아도 대충의 시나리오가 완성된다. 그래서 상호도 제대로 모르는 파이 가게 이야기를 끄집어내면서까지 아는 체를 하는 거다. 다들 외로워서 그런다. 나도 외롭다. 아무리 용가리 통뼈라도 이민 생활의 외로움은 견디기 어렵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외로움은 점점 더 짙어지고, 예능을 보다가도 자꾸 눈물을 쏟아낸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사람 만나는  좋아하게 됐고, 날씨가 좋은 계절이 오면 머릿속은 온통 놀러 갈 생각뿐이다. 아내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놀 생각만 한다고 구박을 하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순간이다. 칠흑 같은 어둠과 완벽한 침묵 속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던 사춘기 시절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1993년 3월.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됐지만 나는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친구들은 새 교복을 맞춰 입고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나는 집에 있어야만 했다. 공부를 잘했던 친구 S는 특목고에 진학하면서 성북구로 이사를 가버렸고, 중학교 때 전학 왔던 친구 K는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반장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두 친구와의 연결고리가 헐거워졌다. 틈만 나면 어울렸던 친구들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많이 슬펐다. 나는 갈 곳을 잃었고 혼자가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되는 엄마는 괜스레 부엌 문지방 위를 들락날락하시다가 내가 낮 동안 먹을 밥과 반찬을 만들어 놓으시곤 일찌감치 일하러 나가셨다. 나는 친구들이 학교에 가는 시간에는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철저하게 숨어서 지냈다.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학원에 다닐 형편도 아니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학교에 다니지 않았지만, 시간표는 만들었다. 내년에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다시 시험을 봐야 했으니까. 중학교 3학년 교과서를 다시 꺼냈다.

집 안에만 갇혀 지낸 지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치고 나가려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우리집의 또 다른 재수생, 누나가 미대 입시학원에서 만난 친구를 집에 데려온 것이었다.

"생각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속으로 연신 욕을 해댔다.

나는 벽돌을 쌓아 만든 작은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몸을 웅크린 자세로 특대 사이즈 플라스틱 김장대야를 뒤집어 입구를 막았다. 타일의 냉기가 피부에 그대로 와 닿았다. 숨을 죽이고선 누나와 친구가 빨리 집에서 나가길 바랐다. 다행히 그들은 내가 숨어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살짝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팔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자세를 바꾸지도 몸을 일으켜 세우지도 않은 채 한참 동안 근질근질, 벌레 기어가는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입안에 난 상처 부위를 아파도 계속 혀끝으로 자극하게 되는 것처럼 내 몸은 통증이 주는 쾌감을 즐기고 있었다. 습하고 지저분한 욕조 안은 묘하게 편안했다.


욕조 안에서의 그 안온함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서 같은 자세를 몇 번이고 시도해봤지만, 그냥 불편하기만 했다. 그때부터 나는 마음속에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외부에서는 절대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단단한 외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좁고, 밀폐되어있어 나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 나는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과 수치심을 모조리 싸 짊어지고 공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로서 부득이하게 해야 할 일이 끝나면 서둘러 그 공간으로 돌아갔다. 사춘기의 예민함은 나를 완벽히 숨길 수 있는 폐쇄된 공간을 필요로 했다. 야비한 맛을 듬뿍 섞은 주변의 시선과 나신(裸身)이 될 때까지 내 허물을 들춰내려는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재수 중이라는 사실은 숨길 수가 없었다. “아들 고등학교 생활은 잘하고 있냐?”는 친척들의 물음에 엄마는 본인도 모르게 말을 얼버무렸다. 주일 학교에 빠지지 않던 내가 고등부에 올라가면서부터 교회에 안 나가자, 나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온 교회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그 집 아들 공부 못해서 지금 고등학교 재수 중이래.”

“고등학교를 재수하는 애도 있어? 집사님 많이 속상하시겠네.”

“바깥 집사님 사업도 아주 힘들어 보이던데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 많네! 그집에.”


소문대로 아버지의 사업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전, 목돈을 들여 개업했던 인쇄소는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다. 날이 갈수록 우리집 우편함은 법원과 경찰서에서 날아온 편지들로 가득 찼다. 집안 분위기가 살얼음판 같았다. 현실의 위기가 다가오자 더는 마음의 공간에 숨는 것이 편하지 않았다.

힘든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90년대 초반 주택가격이 급등하면서 서울에 아파트 재건축 붐이 일어났다. 정부는 주택공급확대를 이유로 30년도 안 된 저층 아파트들을 대거 재건축 대상에 포함시켰다. 우리 가족이 살고 있던 이촌동 공무원 아파트는 재건축 1순위였다. 당장 집을 비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옆집, 아랫집, 그 아랫집이 순서대로 이사를 나가기 시작했다. 빈집 현관문에는 어김없이 빨간색 래커로 엑스자 표시가 새겨졌다. 계단식 아파트에 이제 사람이 사는 집은 우리집과 윗집뿐. 윗집의 불빛이 먼저 꺼질까 봐 무섭고 불안했다. 나는 물건을 훔치려는 도둑처럼 소리 없이 계단을 올라 윗집의 현관문에 귀를 대고 인기척을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빈집에 살던 바퀴벌레 떼가 먹이를 찾아 우리집으로 몰려왔고, 밤마다 옆집 깨진 창문 사이로 들려오는 바람 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더는 사람이 살지 않는 앞 동 건물을 허물기 시작한 날, 우리 가족은 마지막으로 그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휑뎅그렁하게 남아있는 아파트를 돌아보면서 소리쳤다.

"아 정말이지 건물이고, 내 인생이고 싹 다 갈아엎어 버리고 싶다."




"싹 다 갈아엎어 주세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싹 다~"

번쩍번쩍 화려한 옷차림을 한 유산슬을 보면서 딸이 키득키득 웃는다. 어설픈 한국어 발음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아이를 보면서 나도 덩달아 키득거린다.

"싹 다 갈아엎어 주세요~ 나비 하나 날지 않던 나의 가슴에 재개발해주세요~"

중독성있는 멜로디와 가사를 나도 따라 흥얼거린다.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왜 멀리 돌아가겠는가. 그 길이 좁고 험하기 때문이다. (코린토스 운하)


사진출처: 서울특별시 항공사진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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