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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환 Aug 15. 2021

잃어버린 엄지공주를 찾아서

세상에 나쁘기만 한 존재는 없다.

아주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동전 지갑부터 열어 보았다. 남은 동전은 겨우 다섯 닢. 이것으론 부족할지 모른다. 그래도 아주머니는 염치 불구하고 마녀를 다시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내가 어떻게 얻은 아이인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 말만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간밤에 사라진 엄지공주를 찾기 위해서라면 아주머니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아주머니는 마녀의 집을 향해 출발했다. 밤이슬이 눅진하게 내려앉은 새벽길은 금세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을씨년스러웠다. 모든 감각이 날카로워진 아주머니의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바닥을 스치는 낙엽 소리만 들려와도 살갗에 솜털이 삐쭉 솟아올랐다. 아주머니는 끔찍했던 상황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호두껍데기 요람에서 자고 있던 엄지공주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을 알게 된 순간, 얼굴이 벌게지고 콧구멍이 딱딱하게 부풀어 올랐다. 요로 삼았던 파란 제비꽃잎과 이불이 되어 주었던 장미꽃잎은 구겨진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군데군데 기분 나쁘게 미끈거리는 액체가 잔뜩 묻어 있었다. 엄지공주가 낮에 타고 놀던 커다란 튤립 꽃잎은 생기를 잃고 접시 끝에 들러붙어 있었다. 바로 그때, 부서진 덧창 사이로 거칠고 사나운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서늘한 기운이 아주머니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불길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엄지공주의 부드럽고 달콤한 노랫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없이 커다란 절망감이 밀려왔었다.

마녀의 집 앞에 도착한 아주머니는 힘차게 문을 두들겼다. 똑똑! 똑똑똑! 한참 후에야 마녀는 잠에서 덜 깬 눈을 비비며 문을 열어주었다. 마녀를 보자 아주머니는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엄지공주가 사라졌어요. 어쩌죠? 마녀님 제발 도와주세요!”

마녀는 아주머니를 거실로 이끌었다. 높은 벽에 걸린 늙은 마녀들의 초상화가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녀는 아주머니를 안락의자에 앉히고 우유를 섞은 따뜻한 홍차를 가져다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엄지공주를 찾을 방법을 알려줄 테니까.” 마녀는 아주머니의 초조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주 천천히 차를 마셨다. 아주머니는 그 곁에서 마른 입술만 달싹거렸다.

“여기 보리 낟알이 있다네. 이번엔 화분에 심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입안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신 다음, 깊은 잠을 자는 거야. 자고 일어나면 엄지공주를 찾을 수 있게 될 거야.” 마녀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에겐 동전이 얼마 없습니다.” 아주머니가 말했다.

“동전은 받지 않겠네.”

“정말요? 감사합니다.” 아주머니는 정수리가 보이도록 고개를 숙여 마녀에게 감사를 전했다.

“감사의 인사는 엄지공주를 찾은 다음에 해. 아 참! 그곳에서의 시간은 조금 다르게 흘러갈 거야!”


깊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아주머니는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된 꽃잎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는 반듯한 자세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어진 꽃봉오리 틈으로 햇빛이 비집고 들어왔다. 눈이 빛에 익숙해지기까지 얼마간 시간이 걸렸다. 아주머니는 비트적비트적하며 꽃잎에 다가가 입을 맞췄다. 그러자 펑! 소리를 내며 꽃봉오리가 열렸다. 수백, 수천 번을 자다 일어나서 보았을 방 안의 풍경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가로세로 보폭이 예닐곱 발자국 정도 되는 아담한 방이 플라크하벤 광장보다 넓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내 몸이 엄지공주만큼이나 작아졌구나!” 아주머니는 작아진 몸이 어쩐지 낯설었다. 그래서 몸을 이리저리 돌리지 못하고 눈과 목을 슬쩍슬쩍 움직여 주위를 살폈다. 그런 다음 손가락부터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모든 게 정상이었다. 몸이 작아지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탁자 위에 쌓인 허연 먼지가 구스 깃털만 한 크기로 보였다. 아주머니가 움직일 때마다 먼지가 깃털처럼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나부시 내려앉았다. 흰 칠이 된 벽에는 저녁 무렵이면 긴 해가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이 하나 있었다. 아주머니는 군데군데 변색된 놋쇠 손잡이가 달린 덧창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까이 가보니 부서진 부분이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주변에 미끈거리는 점액질이 묻어 있는 것을 봐선 누군가가 이 틈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와 엄지공주를 데려간 것이 분명했다. 아주머니는 탁자 위에 있는 화분에서 나뭇잎들을 모조리 떼어냈다. 그리곤 한 줄로 길게 엮어 밧줄을 만들었다. 아주머니는 밧줄을 화분 받침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창틀을 기어올라 밧줄을 타고 시냇물이 흐르는 정원으로 내려갔다. 땅바닥에 발을 내딛는 순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가워서 아주머니는 저도 모르게 숨을 헉 삼켰다. 몸이 작아지면서 외부의 자극에 더 예민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몸이 여린데, 엄지공주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주머니는 어디선가 고초를 겪고 있을 엄지공주를 생각하니 목이 메어왔다.

“서둘러야겠어!”

아주머니는 점액질 자국을 따라갔다. 그 끝에 엄지공주가 있기를 바라면서. 시냇물 가장자리에 다다르자, 더는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땅이 질퍽거렸다. 진흙길은 점점 두툼하고 농밀해지더니 늪처럼 다리가 푹푹 빠졌다. 하지만 점액질은 진흙탕을 가로질러 계속 이어져 있었다. 아주머니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근처에서 나뭇조각을 주워와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썰매를 지치듯 앞으로 나아갔다. 양쪽 무릎이 꽤 아팠다. 그래도 엄지공주를 생각하며 꾹 참았다. 한참을 그렇게 가고 있는데 갑자기 수련 사이에서 두꺼비 한 마리가 폴짝 뛰어나왔다. “꾸룩 꾸룩 꾸루루룩!” 커다랗고 흉측하게 생긴 외모 탓에 아주머니는 두꺼비가 몹시 무서웠다. 연이어 한 마리가 더 뛰어나왔을 땐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다 하마터면 미끄러져 진흙탕 위를 뒹굴 뻔했다. 그러다가 두꺼비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머니의 눈은 초점을 잃지 않으려고 묘하게 부풀어 있었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에 찬 번뜩임이 그 눈에 있었다.

“혹시 엄지공주를 찾으러 오셨나요?” 엄마 두꺼비가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네? 네! 혹시 우리 엄지공주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두꺼비의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쳤다.

“미안합니다. 제가 지나친 욕심을 부렸어요. 엄지공주를 보자마자 너무 예뻐서 훔치고 싶었습니다.” 그 말을 하고선 엄마 두꺼비는 하늘을 향해 들려 올라간 코끝이 진흙에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아주머니는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지금 당당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보시다시피 우리는 끔찍하게 못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우리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혹시 예쁜 엄지공주가 우리 아들의 신부가 된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제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압니다. 사악한 마음으로 엄지공주를 데려간 것은 아니었어요. 제발 믿어주세요! 우리는 엄지공주를 최고의 며느리로 맞이하기 위해 갈대와 수련으로 우아한 신방을 꾸미기까지 했으니까요."

엄마 두꺼비는 진심을 담아 용서를 구했다. 결국 그 진심이 아주머니의 마음에 가닿았다. 아주머니는 두꺼비 모자(母子)를 용서해주었다.

“그러면 지금 엄지공주는 어디에 있나요?” 아주머니가 물었다.

“초록 연잎 위에 있었는데 연잎을 붙들고 있던 녹색 줄기가 물속에서 끊어지면서 하류로 떠내려갔습니다. 물길을 따라가면 엄지공주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아들 두꺼비는 아주머니가 타고 갈 수 있는 크고 튼튼한 연잎을 물어왔다.

“꾸룩 꾸룩 꾸루루룩!” 아들 두꺼비가 말했다. 아주머니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엄마 두꺼비가 대신 뜻을 알려주었다.

“엄지공주를 만나거든 눈물을 흘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꼭 전해달래요.”

아주머니는 그렇게 전하겠다며 아들 두꺼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제야 굳어있던 아들 두꺼비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두꺼비들과 작별 인사를 마친 아주머니는 연잎을 타고 하류로 내려갔다. 더 빨리 흘러갈 수 있도록 물고기들이 물속에서 연잎 줄기를 이빨로 문 채 헤엄치고 있었다. 엄지공주가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준 그 물고기들이었다.

엄지공주처럼 아주머니도 많은 곳을 지나갔다. 덤불 위에 앉은 작은 새들은 아주머니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었고, 흰 나비들은 춤을 추듯 사뿐사뿐 주위를 날아다녔다. 수면에 햇빛이 비치자 사방이 너무나 예쁜 금빛으로 물들었다. 엄지공주를 태운 연잎이 떠내려간 길은 모두 아름다웠다.

“우리 엄지공주도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겠구나!” 엄지공주를 생각하니 아주머니는 또다시 목이 메어왔다. 바로 그때 딱정벌레 한 마리가 날아와 아주머니의 허리를 움켜쥐더니 어디론가 날아갔다. 아주머니는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이거 놔! 나를 내려놓으란 말이야!”

딱정벌레에 매달린 채 아주머니는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을 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참 동안 날아간 딱정벌레는 깊은 숲속에 아주머니를 내려주었다. 그곳엔 풀잎으로 짠 작은 침대가 있었다. 그것은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커다란 우엉 이파리 밑에 매달려 있었다. 아주머니는 베개잇에 물든 마른 눈물 자국을 보고선, 이곳이 엄지공주가 있던 곳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벅찬 눈물이 아주머니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우리 엄지공주는 지금 어디에 있어?” 아주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딱정벌레에게 물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딱정벌레의 더듬이는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물방울무늬가 선명한 날개 끝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서! 어서 말해봐! 엄지공주는 지금 어디에 있지?”

“잘 모르겠습니다. 무례하게 행동해서 죄송합니다. 아주머니!” 딱정벌레는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한참을 울었다. 아주머니는 초조하고 답답했지만, 딱정벌레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엄지공주가 너무 예뻐서 제가 데려갔었습니다.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친구들의 반응은 저와 달리 시큰둥했습니다. 더듬이도 없고, 날지도 못하는, 딱정벌레와는 다르게 생긴 엄지공주의 외모가 친구들에겐 낯설었던 것 같아요. 사람처럼 생겼다는 이유로 혐오하는 친구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특히 사람의 발에 밟혀 죽은 가족이 있는 딱정벌레들은 대놓고 엄지공주를 차별했어요. 사람에 비하면 우리 딱정벌레는 정말 작잖아요. 그런데 우리랑 비슷한 크기의 사람을 만났으니 얼마나 괴롭히고 싶었겠어요.” 딱정벌레는 여기까지 말하다가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주머니의 얼굴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고통받는 엄지공주를 더는 볼 수 없어서 제가 이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는데, 겨울이 지나고 와보니 엄지공주는 이미 떠나고 없었어요.” 아주머니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엄지공주가 방에서 사라진 건 어제의 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곳에서 겨울을 보냈다니? 바깥은 이제 겨우 단풍잎이 들기 시작했는데… 그제야 아주머니는 마녀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조금 다르게 흘러갈 거야!” 아주머니는 이곳의 시간 흐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모두 다 저 때문입니다. 제가 엄지공주를 데려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아주머니는 딱정벌레의 쳐진 더듬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차별받는 엄지공주를 도와주려고 했던 딱정벌레의 진심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주머니는 멈출 줄 모르고 떨리는 날개 끝을 따뜻한 손으로 잡아주었다. 그러곤 고통받는 엄지공주를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딱정벌레는 아주머니의 품에 안겨 한참을 더 울었다.


딱정벌레가 돌아가고 아주머니는 엄지공주가 얼마간 머물렀던 숲속에 남기로 했다. 어디로 가야 엄지공주를 만날 수 있는지, 딱히 아는 바도 없었지만 실은 아주머니 자신도 엄지공주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주머니는 엄지공주처럼 생활했다. 꽃의 꿀을 먹었고, 매일 아침 나뭇잎에 맺힌 이슬을 마셨다. 새들과 같이 노래도 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겨울이 왔다. 새들도 떠나고, 우엉 이파리도 시들었다. 아주머니는 작았기 때문에 끔찍하게 추웠다. 내리는 눈을 맞고 있자니 온몸에 멍이 들 것처럼 아팠다. 먹을 것도 없고 어쩌면 이대로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설마 지난겨울, 엄지공주가…? 아주머니의 눈앞이 점차 흐릿해지더니 아예 캄캄해졌다.


의식을 차려보니 아주머니는 들쥐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주머니를 깨운 건 구수한 토마토 수프의 냄새였다.

“이제 정신이 들었구나. 따끈하게 수프를 먹고 나면 한결 나아질 거야!” 늙은 들쥐가 보슬보슬 김이 올라오는 토마토 수프를 아주머니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뭉근하게 오래 끓인 토마토 수프는 정말 맛있었다. 새콤한 풍미가 입안 가득 퍼지면서 그동안의 피로가 저절로 풀리는 듯 했다.

“겨울 동안 나와 함께 여기서 지내도 좋아. 단, 집을 살기 좋고 깔끔하게 정리해야 한단다. 그리고 중요한 것. 내게 이야기를 들여줘야 한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아주머니는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모두 엄지공주에게 들려주려던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늙은 들쥐가 청한대로 하면서 편안히 지낼 마음이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엄지공주를 찾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조금 있으면 손님이 한 분 올 거란다.” 들쥐가 말했다. “우리 이웃인데 일주일에 한 번, 나를 만나러 오지. 누구든 그분을 신랑감으로 얻을 수 있다면 편안한 인생을 살 게 될 거야. 그분은 아주 부자거든. 하지만 앞을 보지 못하니, 네가 아는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드려야 할 것이야.” 아주머니는 제멋대로 말하는 들쥐가 점점 불편해졌다. 얼어 죽을 뻔한 위기에서 구해준 건 분명 고마운 일이지만 자신을 어린아이 대하듯 말하는 들쥐가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검은 우단 외투를 입은 두더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듣던 대로 부유하고 유식해 보였다.

“오셨어요?” 들쥐는 문 앞까지 달려가 두더지의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어주었다.

“여기까지 오는 지하 통로에 제비 한 마리가 또 쓰러져 있더군. 먹을 것이 남아 있으면 들쥐 자네가 제비에게 가져다주면 좋겠어.” 두더지가 말했다.

“전에는 작은 새로 세상에 태어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은 없다고 하셨잖아요. 요새는 왜 그렇게 새들한테 마음을 쓰세요? 어차피 겨울이 되면 지저귀는 새소리에 무슨 쓸모가 있다고요?” 들쥐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런 말 마시게! 새들이 모두 죽으면 여름에 누가 찾아와 우리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겠나? 부디 지난날 부끄러웠던 나의 모습을 들추지 말게나!”

주둥이를 삐쭉거리긴 했지만, 들쥐는 두더지가 부탁한 대로 남은 음식을 접시에 담았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주머니가 쓰러진 제비에게 가져다줄 음식을 대신 받아들었다.

“손님이 와 계셨군요. 미안합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앞을 볼 수 없는 형편이라 다른 분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두더지가 아주머니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들쥐 아주머니에게 신세를 졌으니 대신 하려는 것입니다. 신사분은 정말 친절하시네요.” 아주머니가 말했다.

“부끄럽습니다. 저는 그런 칭찬을 들을 만큼 좋은 두더지가 아닙니다. 그나마 한 아이를 만난 후에 조금 괜찮아졌을 뿐입니다.”

“결혼식을 앞두고 떠난 그 아이 이야기는 뭣 하러 꺼내세요?” 들쥐가 눈을 흘기며 두더지를 쏘아보았다.

“아닐세! 들쥐 자네가 그 아이를 정성껏 돌봐줬으니… 자네의 서운한 마음을 내 이해 못 하는 바 아니지만, 그 아이 때문에 나의 나쁜 마음과 행동을 돌아볼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가. 그 아이의 착한 성품이 나를 달라지게 만들었다네. 애초에 늙은 내가, 그렇게 어리고 아름다운 아이와 결혼을 하려던 게 잘못이었지.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네. 그러니까 제발 그만하시게나. 자네도 이제 나처럼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제비에게 가져다줄 음식은 이 손님께 부탁하세.” 두더지가 들쥐에게 말했다.

아주머니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두더지가 말하는 그 아이가 엄지공주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주머니는 두더지와 들쥐에게 우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소리를 내지 않고 울었다. 그리고 잠시나마 들쥐에게 불편한 마음을 가졌던 것을 사과했다. 앞을 볼 수 없어서 그랬던 거구나.

 안은 매우 어두웠다. 아주머니는  손에 음식 바구니를, 다른  손엔 썩어가는 나뭇조각을 들었다. 그것이 불처럼 빛나며 횃불 노릇을 했다. 아주머니는 쓰러진 제비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제비는 가시덤불에 찔려 작은 상처가 났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하지만  주간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생기를 거의 잃은 상태였다. 아주머니는 제비가 다시 기운을 차릴 때까지 정성껏 돌봐주었다. 꽃잎에 물을 담아 가져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비는 조금씩 기운을 회복했다. 제비가 잠든 사이, 아주머니는 두더지가  코로 뚫어놓은 구멍을 기어 올라갔다. 다른 제비들이 가시덤불에 걸려 날개가 찢어지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추운 겨울바람을 맞아가며 가시 모조리 제거했다. 아주머니는 겨우내 땅속에 머무르며 제비를 보살폈다. 이따금 들쥐가 지나가는 길에 먹을 것을 두고 가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아주머니의 마음도 편안해졌다. 엄지공주가 남기고  흔적들을 떠올리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엄지공주는 어디에서나 착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초조한 마음도 사그라졌다.

봄이 오고, 햇볕이 따사롭게 땅을 비췄다. 아주머니와 제비는 두더지가 만들어놓은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제비는 오랜만에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녔다.

아주머니! 저를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제비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네가 온전하게 회복하게 되어 나도 정말 기뻐!” 아주머니도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제비는 지지배배, 지지배배 노래하며 숲속으로 날아갔다. 내일이면 제비는 가족들을 만날까? 이르면 오늘 저녁에 만날지도 몰라. 봄을 따라 들이 날아오는 계절이니까. 아주머니도 엄지공주를 만나는 상상을 했다. 언젠가부터 엄지공주를 생각해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산들바람이 봄날 오후의 버드나무를 사각사각 흔들어 댔다. 아주머니는 신선한 공기와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모처럼  같은 낮잠을 잤다. 기분 좋은 꿈까지 꾸면서.

“지지배배,지지배배,지지배배!” 머리 위에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아주머니가 눈을 뜨자 제비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왜 다시 날아왔어?” 아주머니가 물었다.

“아주머니 좀 전에 가족을 만났어요.”

“그것참 기쁜 일이구나!“

“아주머니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우리 언니가 그러는데,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아주머니처럼 작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대요. 아주머니 그곳으로 같이 가지 않으실래요?”

“그래 좋아! 같이 갈게. 하지만 그 전에 두더지와 들쥐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 그들이 서운하지 않도록 말이야!”

아주머니는 두더지와 들쥐를 찾아가 따뜻한 포옹을 나누었다. 모두가 아쉬운 작별을 했다.

제비의 등에 올라탄 아주머니는 활짝 펼친 날개에 발을 얹고 허리끈을 넓은 깃털에 묶었다. 그리곤 숲과 호수를 가로질러 날아갔다. 봄 향기로 물든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더 놀라웠다. 마침내 마을에 도착했다. 제비는 아주머니를 계속 등에 업고 날아다니며 마을의 풍경을 구경 시켜 주었다. 마을은 밝게 빛났고, 도랑과 산울타리를 따라 탐스러운 포도가 자라고 있었다.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레몬과 오렌지 때문에 마을은 화사해 보였다. 매화와 박하에서 퍼진 향기가 마을 전체를 향긋하게 꾸며주었다. 제비의 말처럼 정말로 작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저마다 활기찼고, 어른들 사이로 귀여운 아이들이 색색의 나비를 쫓아다녔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아주머니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엄지공주를 발견했다.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단번에 눈에 띄었다. 엄지공주는 머리에 금관을 쓰고 어깨에는 밝은 날개를 단 유리처럼 맑은 남자 옆에 서 있었다. 남자를 바라보는 엄지공주의 표정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서서 환호해주었다. 남자는 엄지공주를 마야라고 불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아주머니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오덴세의 낡고 좁은 집이 아닌 이곳이 엄지공주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주머니는 땅으로 내려가려는 제비의 깃털을 잡아당겼다.

"제비야!"

"네, 아주머니!"

"나를 이곳에 내리지 말고, 우리집으로 데려다줄 수 있겠니?"

"물론이죠. 아주머니가 원하시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고맙구나!"

아주머니는 제비의 등에 앉아 천사들의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덴마크로 돌아가며 말했다.

"안녕히 잘 있어! 나의 엄지공주, 언제나 행복하길 기도할게, 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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