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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씨 Jun 26. 2018

불안 : 창백한 푸른 점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고 칼세이건의 우주를 떠올리다.

진화 심리학의 관점에서 불안은 원시 사회부터 인류가 미지의 위험을 대응하기 위해 발전시켜 온 심리적 긴장감을 유발하는 일종의 생존 메커니즘이라고 합니다. 불안감이 생기면 보통 사람들은 빠르게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하죠. 공부를 해서 무지를 벗어나거나 어떻게든 인간관계를 확장하여 외로움에서 벗어나거나. 마음 한구석을 잠식하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원시 사회 마냥 '아궁이 불이 꺼지면 어떻게 하지?' 혹은 '사냥감이 안 잡히면 어떻게 하나?'와 같은 상당히 단순화된 불안/공포의 알고리즘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불안감을 쉬지 않고 유발하는 사회라는 겁니다. 알타미라의 동굴 벽에 잡고 싶은 소떼를 그리거나 아궁이의 여신 헤스티아에게 제사 지내는 정도로 불안이 해소가 안 되는 사회라는 거죠. 타인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아 본인의 자존을 구축하는 사회적 동물들이 한정된 물리적(돈)/심리적 자산(명예/애정)을 두고 무한 경쟁하는 능력주의의 정글에서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한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건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죠.


마음의 병으로 인해 불안감이 지속적으로 유발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이런 경우에는 어느 정도 사회적/구조적인 원인보다 개인의 내적인 영역에서 불안의 원인을 찾는 게 합당할 수 있습니다. 허나 아주 사적인 불안장애의 원인도 하나하나 미시적으로 분석하다 보면 외부의 문제, 가족의 문제 나아가 사회 구조의 문제로 결론 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불안이라는 감정을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토대로 분석한 알랭 드 보통의 접근은 그런 면에서 단순하지만 강한 설득력을 가집니다.

알랭 드 보통  [불안]

벗어날 수 없는 불안은 공포를 야기하고 공포에 길들여진 심신은 무기력과 자기학대를 초래하며 심할 경우에는 벼랑 위에서 몸을 던지는 레밍 마냥 죽음이 무서워서 죽음을 택하는 아이러니에 빠지곤 하죠.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이자 아랍 속담이기도 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말을 저는 늘 곱씹곤 합니다. 이 문장에는 불안은 단순히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다는 의미뿐 아니라 그 불안이 집단에 전이되면 영혼이 없는 인간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도 같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안에 영혼이 잠식된 군중은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끔찍한 폭력을 일으키거나 희생양을 찾기도 합니다. 미지의 외부 세력에 대한 군중의 불안은 전쟁이나 마녀 사냥을 일으키고 홀로코스트를 일으켜왔죠.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삐뚤어진 시도는 언제나 인류의 비극과 궤를 같이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화두로 떠오르는 혐오의 정서도 결국은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나 나를 위협할 수 없는 '불안'한 미지의 존재를 나와 동일한 속성을 가진 집단의 힘을 빌어 밀어내고 제거하려는 대중 심리에서 기인한 바가 큽니다. 결국 모든 역사는 되풀이되기 마련이죠.


현세대를 사는 평범한 이들이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이는 알랭 드 보통이 말한 것처럼 불안의 원인이 사적인 영역의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시스템(경제, 사회, 문화... etc)을 제어할 수 없다면 결국 이 안에 살아가야 하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불안과 공포는 온전히 개인의 숙제로 각자 떠안아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알랭 드 보통은 일상의 철학자답게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5가지 해법을 제안하지만 근원적인 해법이기보다는 불안으로 고통받는 개인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삶의 태도를 제시하는 데서 멈춰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불안에 지독하게 길들여진 이들은 스스로 그 상황을 벗어날 의지나 에너지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어떤 방법도 소용없을 때가 많아요. 물론 불안을 해소하고 궁극적으로는 그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 지기 위한 최소한의 의지와 자산이 있다면 이 해법들은 확실히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유효한 안전장치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나 불안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이 죽음을 선택하거나 잘못된 선택으로 영혼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근원적인 방안은 아무도 모릅니다. 불안은 어쩌면 인간의 원죄이며 우주의 엔트로피가 역전하는 순간까지 영원히 커져가며 종국엔 인간을 멸망의 길로 안내할 저주일 수도 있습니다.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

"...... 지구는 우주라는 광활한 곳에 있는 너무나 작은 무대이다. 승리와 영광이란 이름 아래, 이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차지하려고 했던 역사 속의 수많은 정복자들이 보여준 피의 역사를 생각해 보라. 이 작은 점의 한 모서리에 살던 사람들이, 거의 구분할 수 없는 다른 모서리에 살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잔혹함을 생각해 보라. 서로를 얼마나 자주 오해했는지, 서로를 죽이려고 얼마나 애를 써왔는지, 그 증오는 얼마나 깊었는지 모두 생각해 보라. 이 작은 점을 본다면 우리가 우주의 선택된 곳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암흑 속 외로운 얼룩일 뿐이다. 이 광활한 어둠 속의 다른 어딘가에 우리를 구해줄 무언가가 과연 있을까. 사진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까? 우리의 작은 세계를 찍은 이 사진보다, 우리의 오만함을 쉽게 보여주는 것이 존재할까? 이 창백한 푸른 점보다, 우리가 아는 유일한 고향을 소중하게 다루고, 서로를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는 책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우리는 끝없이 불안해하는 동시에 한 편으로는 누군가의 불안을 유발하는 재앙일지도 모릅니다. 불안은 어쩌면 이 거대한 우주의 질서를 관장하는 어떤 존재가 인간이라는 미미한 존재에게 부여한 운명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칼 세이건이 '창백한 푸른 점'을 바라보며 느꼈던 그 감정을 공감하며 자신과 세상을 다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의 끝없는 불안도 우리로 인한 불안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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