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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씨 Jul 23. 2018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이제 다시 사랑할 시간

혼자 맛집을 찾고 혼자 개봉 영화를 본다. 혼자 공연을 보고 혼자 여행을 간다. 더 이상 남은 인생에서 감정의 혼란을 초래할 타인과의 관계가 없을 거라는 확신은 내 안을 가득 채웠던 걱정 근심을 덜어낸다. 욕망이라거나 열정, 성공과 같은 한 때는 인간의 필수 조건과 같았던 여러 가지를 놓아 버린 채 시간을 보낸다.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다. 어떤 변수도 없고 마음의 격랑을 가져오는 어떤 갈등도 없다. 장기하의 노래처럼 난 '별일 없이 산다.'


하지만 평화롭기 그지없는 이 순간에도 이 인위적으로 혹은 가식적으로 쌓아 올린 평화의 성채를 아무렇지 않게 뛰어넘는 불청객들이 있다. 외로움, 서글픔 또는 조용히 마음 한 구석을 어둡게 물들이는 절망감. 난 그저 고통 없이 살기 위해 모든 갈등을 피하고 모든 욕망을 포기하고 여기로 숨었는데 왜 여전히 고통스러워야 하나. 행복이나 애정 같은 것 더 이상 원하지 않을 테니 그저 아무 일 없이 살다 죽게만 해달라고 빌었을 뿐인데. 아직도 남은 미망이 있나. 아직도 놓아버리지 않은 무언가가 있을까.


그때 나에게 모모가 왔다. 고작 열네 살 밖에 되지 않은 이 작은 아랍인 소년이 나에게 말한다. 무얼 두려워하는 거냐고. 왜 사랑하지 않느냐고.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고. 그저 상처받지 않고 평온히 살기 위해 내가 타인에게 주는 애정과 타인으로부터 받을지도 모를 사랑을 모두 포기해 버리고 숨어 버린 나에게 악동 같은 웃음을 지으며 다시 되묻는다. 그렇게 살아서 뭐할 거냐고. 그게 사는 거냐고.


분뇨로 뒤 덮인 빈민가에서 늙고 병든 창녀의 손에 위탁되어 힘든 일상을 보내면서도 모모는 삶의 부조리 함에 의문을 품거나 자학하지 않는다. 미래나 희망을 생각하는 게 오히려 생존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는 줄타기 같은 삶 속에서 모모를 지켜주는 건 조건 없는 사랑이다.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 말이다. 그 사랑의 대상이 자기 나이의 몇 배가 넘는 노파이고 머리카락은 서른여섯 가닥밖에 남지 않았고 남자 넷이 겨우 들어 옮길 정도로 살이 찌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중병환자 일지라도 말이다.


둘의 관계는 사랑이지만 이별, 관계의 소멸을 두려워하는 그런 수준의 사랑이 아니다. 모모는 생을 마감하는 로자 아주머니의 마지막이 그녀가 원하는 방법이길 바라고 그것을 실천에 옮긴다. 밝고 환한 병실에서 억지로 생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타인이 보기엔 끔찍하고 기괴한 형태의 죽음일지언정 그녀가 원하는 장소에서 숨을 거둘 수 있도록 돕는다. 하루라도 더 그녀가 세상에 남아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내가 모모였다면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의 소원이라도 더럽고 좁은 지하실에서 기괴한 촛불 조명 아래 부패되고 썩어가는 주검에 의식처럼 화장을 하고 아사하기 직전까지 그 시신을 곁에서 지키는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제삼자의 눈으로 보면 이렇게 어리석고 기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유대 관계가 어디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질지도 모른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조건 없는 필사적인 사랑이 아니었다면 이 두 사람이 이 지옥도 같은 빈민가에서 삶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가장 밑바닥의 희망 없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을까? 


거지 같던 아름답던 고통스럽던 매혹적이던 모든 조건과 상황을 넘어 그 안에 사랑이 없다면 삶은 그 순간 의미를 잃어버린다고 모모는 말한다. 늘 관계에 있어서 기브 앤 테이크를 따지고 손해를 보지 않고 노력 없이 어디선가 떨어지는 관심과 애정, 위로를 망상하며 상처 입기 두려워 동굴 속으로 숨어버리기 바빴던 나에게 모모가 말하는 사랑의 잠언은 번지 점프대 앞에서 덜덜 떠는 겁쟁이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시원한 한 방이다.


"안 사랑하고 뭐할래? 안 살고 뭐할래? 계속 떨다가 죽을 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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