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없는 속죄
'어째선지 학교가 싫었고, 선생님도 아이들도 모두가 싫었다. 우리를 버려 두고 바다로 떠돌아다니는 아버지도 밉고, 날마다 밤늦도록 재봉틀을 돌리는 어머니의 퀭한 눈자위도, 이른 새벽부터 저녁까지 공장에서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은분이 누나의 해쓱한 얼굴도…… 죽은 은매의 그 노루처럼 바알간 눈빛도 나는 싫었다.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온 세상이 우리를 버렸다는 생각,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절망감, 이 세상에서 오직 우리 식구들만 버림받고 있다는 증오심…… 그 때문에 나는 아버지가, 그리고 세상이, 아니 누구보다도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두렵고, 싫고, 미웠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인가를 향해 복수해 주고 싶었다. 고작 열 세 살짜리 내 영혼은 그렇게 조금씩 병들어가고 있었다.'
- 본문중에서
임철우의 작품세계에는 가난과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트라우마와 광주의 비극으로 부터 달아난 비겁자의 고통이 무겁게 자리잡고 있다. 그 고통은 너무나도 뿌리 깊고 음울하며 영원히 과거를 향해 가로 놓여 있는 끊어진 다리와도 같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그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의 기억은 그의 작품이 단순한 소설을 넘어서서 삶의 진정성을 획득하는 가장 큰 뿌리가 되고 있다.
진정성 - 90년대 이후의 한국문학에서 사라져 버린 미덕들. 안개 속을 걷는 것마냥 뿌연 몽롱한 문체로 감성의 표피만을 자극하는 문체주의 작가와 깊이 없는 쿨함과 엑조틱한 정서만을 남발하는 공산품과 같은 작품이 난립하는 이 시기에 80년대의 엄혹한 세월을 넘어 여전히 자신의 죄의식 속에서 희망의 싹을 찾기위해 몸부림 치는 그의 진실한 글쓰기는 여전히 내가 글을 읽는 가장 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등대'는 작가 임철우의 유년 시절의 고통스런 회한의 기억을 적어내려간 한 편의 슬픈 고백 수기와 같은 소설이다. 여전히 그의 기억은 암울하고 서글프며 삶의 진정성과 동전의 앞 뒷면 마냥 혼연일체가 되어있기에 너무나 아름답다.
한가지 서글픈 것은 그의 시선은 너무나 강하게 과거에 못박혀 있기에 좀처럼 다른 희망을 바라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과 추레한 일상... 한국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그 고통의 시간들이 속속들이 녹아 있는 과거의 기억들로 무겁게 가라앉은 그, 혹은 우리의 과거를 위안하는 화해와 희망의 에피소드들은 조금은 도식적이고 조금은 연극적이다. 마치 스스로도 그 화해의 순간을 진심으로 믿기 힘들기 때문이었을까. 조심스럽게 적어내려간 에필로그들은 고통의 기억에 침식되어 해방을 두려워 하는 작가의 나직한 독백과 같다고 말해야 할까.
순수한 비겁자. 죄의식으로 부터 고통받으며 화해의 순간 마저 주저하는 그의 진실함. 언젠가 그가 진실로 삶의 리얼리티에서 싹튼 희망의 글을 적어내려 가는 순간을 기대한다. 진실로 임철우와 같은 작가와 동시대 살 수 있다는 것을 신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내 소년기의 황량하고 앙상한 추억의 뼈대 위에 소설의 살을 짜 붙이고 잿빛 회한의 옷을 기워 입혔다. 그럼에도 거기엔 어쩔 수 없는 자기 연민이랄까 자기 위안의 무의식이 잠복해 있음을 굳이 부인하지 않겠다"
- 임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