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뒤에서 떨고 있는 그대에게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 기형도
완벽하지 않은데 완벽함을 연기해봐야 정신이 무너집니다.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발각되는 것이 두렵고 그로 인해 현재의 관계나 상황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공포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 의연한 척 매사에 능숙한 척 애를 쓰며 버텨봤지만 결국 지나고 나면 아무 소용 없더군요. 아시다시피 능숙한척 강한 척 연기한다고 실제로 마음의 근육이 붙거나 뼈대가 강해지지 않아요.
그저 '척'하는 것 뿐이고 심지어 그런 연기는 정상인들에게는 다 눈에 띄고 다 들켜요. 그저 혼자서만 다른 이들을 완전히 속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더 많죠. 심지어 운이 좋아서 완벽한 가면 연기에 성공한다 해도 아무 의미 없는 거 사실은 아시죠? 타인의 나에 대한 기대나 혹은 인정을 빙자한 방치가 더 강해지고 잦아져서 더 피곤해지고 더 외로워지기만 할 뿐이죠.
차라리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도움을 요청하고 괴로움을 토로하고 의지하고 기대보세요. 진짜 인간 관계는 가면을 벗고 내 약한 모습과 내 추한 모습을 모두 드러내면서 시작되더군요.
아마도 그런 일은 없겠고 없어야하겠지만 가면을 벗고 솔직하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정신적인 어려움을 나눠 짊어지길 요청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예전과 달라지고 나를 폄하하는 움직임이 정말 실제로 발생한다면 그때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없이 그 인연을 지우면 됩니다. 하지만 장담컨데 그런 일은 없을꺼에요. 맞아요 말은 쉬워요. 힘들게 쓸모있고 이타적인 사람을 연기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속빈 강정 같아도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착각과 환상을 유지하고 싶은 절망적이고 소심한 몸부림인거 알아요.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죠.
어떻게든 조금씩 몸부림 치는 모습이 필요해요. 정말 아주 작아 보여도 뭔가 결과물이 남는 작은 미션을 끊임없이 (하지만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스스로 부여하고 하나씩 클리어 해가는 게 마음의 근육을 만드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사랑한다'거나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사람이 된다'거나 하는 절대 불가능한 미션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그걸 해내지 못하는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하고 도피하고 무기력에 빠졌던 기나긴 시간을 통해 깨달은 생존 노하우입니다.
아 물론 그런 환상적이고 위대한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어마어마한 천국의 문이 열릴지도 모릅니다만 저나 님이나 그런 세상은 겪어본적도 없고 앞으로 없을거라는 걸 잘 알잖아요? 그런 비현실적인 목표로 스스로를 고문할 시간에 아주 작고 소박한 미션을 수행해 보자구요. 예를 들면 어제 요리 유튜브에서 본 해물파전을 만들기 위해 '집 앞 마트에 부침가루 사러 가기'를 클리어 한다거나. 개수대에 쌓여가는 설거지꺼리를 오늘은 꼭 없애고야 말겠다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