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연애하겠다는 당신에게 필요한 여섯 번째, 다시 사랑하는 무모함
이별 후의 행동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나는 이별 후의 어느 밤을 클럽에서 보낸 적이 있다. 그가 비보잉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쪽에 취미가 없는 내가 힙합클럽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 그로부터 들은 것이었다. 사람들 틈에 섞여 몸을 흔들면서 나는 내가 클럽에 온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그리웠던 것도, 그와 마주치고 싶었던 것도, 새로운 만남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흐른 후에 이해했다. 그건 이미 사라진 말과 시간들 속에 잠겨 있는 한 방식이었다.
이후 이별 후의 반응들은 에너지의 관성과 관련이 있다. 골몰하고 상상하고 그리워하고 분노하는, 그 사람에게로 흐르던 에너지들이 있다. 이별이란 오랫동안 같은 방향으로 흐르던 무수한 에너지들이 갈피를 잃는 경험이다. 대상을 잃었음에도 관성이 있어 끝없이 밀려나오는 감정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다. 어떤 장소를 그 사람이 언급한 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찾아가거나, 그를 함께 알 뿐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과 참을 수 없이 대화를 나누고 싶은 기분이 되거나, 이별 후에 우리가 하는 잘 설명되지 않는 행동들은 이 방향을 잃은 에너지들의 작용이다.
관성이 약해지고 흐르던 것들이 차차 줄어들어 말라갈 때, 이별한 순간이 아니라 그때 우리는 누군가를 진짜 떠나보낸다. 결국 시간이 충분히 흘러야 증상들이 멎는다. 그래서 연인과 헤어진 후 빠르게 다른 누군가를 만나려는 이들을, 나는 이해할 수 있지만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애도의 기간은 그렇게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반응 역시 증상이라, 그들은 다른 누군가를 곁에 두고 애도의 수순을 밟게 된다. 그 과정은 대체로 곁에 있어준 이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결과로 귀결되기에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상실을 무화시키려는 이들의 심정을 헤아리면서도 그 끝을 예상하며 애처로워진다.
애도에 도움이 되는 건 어쩌면 이별 이후를 다룬 소설인지도 모른다. 이별이라는 사건은 개별적이지만 이후를 관통하는 증상은 유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사한 방식으로 아프다는 것은 위로가 된다. 나와 같은 증상을 앓는 이들을 읽는 일은 나의 증상을 이해하고 수용하도록 도와준다. 소설은 자꾸만 그리로 흐르려는 에너지의 방향을 억지로 꺾거나 틀어막지 않고, 느슨하게 풀어 관성대로 흘려보내면서 시간을 견디는 방법일 수 있다.
<애프터 유>는 최근 개봉한 영화 <미 비포 유>의 동명 원작소설의 속편이다. 전치사와 대명사만으로 조합하여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둔 전작의 제목과 달리, 속편 제목의 의미는 좀 더 분명해보인다. ‘애프터 유(After You)’는 ‘당신을 잃고 난 후(After I Lost You)’다.
등장인물들은 전작에서 이어지지만, 전작을 읽지 않아도 <애프터 유>의 애도의 여정을 따라가는 데는 무리가 없다. <애프터 유>의 기본적인 세팅은 주인공 루이자가 연인의 자살 이후 혼자 남겨졌다는 것이다. 연인이었던 윌은 사고로 사지마비를 당한 상태였고, 그녀는 그녀를 사랑함에도 삶을 택할 수는 없다는 윌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불가피함을 인정하는 것과, 이별 자체를 수용하고 이후를 살아가는 것은 별개의 일이어서 루이자는 오래 이별 이후의 후유증을 앓는다.
1) 직후에는 상처의 크기 조차 짐작할 수 없다
이별 이후의 반응은 단계가 있다. 직후의 강렬한 반응들이 한 차례 지나가고 나면 역설적이게도 통증을 잘 느끼지 못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타박상처럼 처음에는 둔하고 우리우리한 통증이 내가 무언가에 타격을 당했다는 것만을 알려준다. 루이자는 윌이 죽은 후 여행을 떠났다. 낯선 도시의 사람들 틈에 섞여 새로운 자극들 속에 몸을 내맡기며 그녀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한다. ‘새출발’의 느낌을 갖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들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기 우리는 사실 우리가 잃은 것의 크기를 제대로 짐작하지도 못하는 상태다. 멈춰 서 있으면 슬픔에 잠길 것 같은 느낌에 부단히 무언가를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게 소용이 없음을 깨닫는다. 피하고자 했던 감정들을, 그렇게 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되는 것이다. 결국 루이자는 여행을 중단하고 다시 그녀가 떠났던 곳으로 돌아온다.
6주 뒤, 나는 여국으로 돌아와 샘록 앤드 클로버에 일자리를 얻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 필이라는 남자와 잤으며 정말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는 느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9개월째인데 아직도 기다리는 중이다.
그녀는 여행과 모든 시도들을 경유해서야, 9개월이 지나고야, 이제부터가 상실 이후의 시작임을 알게 된다.
2) 기(奇)행동들의 키워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런던으로 돌아온 루이자가 회복하게 되는 계기는 두 가지이다. 먼저 찾아온 건 릴리다. 릴리는 윌은 존재를 알지 못했던 그의 딸로, 아빠의 흔적을 좇다 루이자를 찾아온다.
루이자는 알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혀 릴리의 일에 관여하게 되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생판 남이나 다름 없는 아이의 일에 자신의 일처럼 뛰어드는 그녀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그녀 자신의 삶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모두 한 소리씩 한다. 릴리를 보살필 이가 자신밖에 없다고 항변하는 루이자에게, 동생 트린은 언니는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 말은 절반쯤 진실이다. 그녀가 여전히 윌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때문에 릴리에게 신경쓰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릴리를 돕는 것은 그녀에게 윌이 남긴 마지막 사명처럼 느껴졌다. 그건 물론 윌과는 관련 없는 루이자의 착각이지만, 어쨌거나 릴리를 돕는 사이 그녀 역시 조금씩 나아진다. 술을 끊게 되고, 임시거처 같던 방도 가꾸기 시작한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던 윌의 이야기를 릴리에게 털어놓으며 위안을 받기도 한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설명한다.
윌의 딸이 나를 필요로 했다. 그거면 됐다. (…) 내가 전혀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는 길이 여기 있었다.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었다.
그게 허구라 할지라도, 떠난 이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지는 건 회피인 동시에 치유이기도 하다. 지켜보는 이들은 그 ‘부족한 연결고리’와 집착에 가까운 태도가 위태로워 보일 것이나 사랑하던 이를 잃은 입장에서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떠나간 대상을 향해 밀려드는 삶의 에너지들은 그렇게 머물다 갈 곳을 찾곤 한다.
3) 새로운 사랑이란 새로운 상실과, 또 다른 고통의 가능성
릴리가 루이자를 슬픔으로부터 건져올려 주었다면, 루이자에게 다시 삶의 맥박을 느낄 수 있게 해준 건 샘이었다. 몇 번의 우연이 겹쳐 알게 된 그들은 다시 몇 번의 오해와 헤프닝을 거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그와 함께 있다고 윌이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곁에서 그녀는 들뜨고 즐거웠고 열정이 되살아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루이자는 그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더 좋은 사람, 그녀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의 모습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루이자는 최종적인 순간 샘과의 관계를 확정하기를 주저한다. 그가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함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자고 약속하는 것이 그녀는 두렵다. 또 다시 누군가를 잃는 고통을 피하고 싶은 것이다.
샘에게 마음을 주는 것은 더 많은 상실의 가능성에 마음을 내맡기는 것이다. (…) 사랑이란 궁극적으로 더 큰 아픔을, 더 큰 피해를 의미했다.
루이자만이 아니다. 상실 후에 가시지 않는 고통을 몸으로 겪어본 이들은 더 이상 가지지 않으려 한다. 무언가를 잃는 일이 이렇게나 고통스럽다면 더는 잃을 것을 만들지 않고 싶은 것이다.
소설 속에서 루이자가 나가는 상담 프로그램인 ‘새출발 서클’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이를 잃고 어딘가 고장나버린 무수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제이크의 아빠는 아내를 암으로 잃은 뒤 매일 밤 다른 여자들과 섹스를 한다. 그는 그녀들이 아내가 아니라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의 상실을 실감한다. 사랑하는 이가 사라졌는데도 아무 일 없이 잘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그렇게 죄책감의 형태로 상실을 느낌으로써만 그는 살아가는 일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백발 노인인 프레드는 치매에 걸렸던 아내가 죽은 지 몇 해가 지나고도 여전히 그녀에게 모진 말을 했던 일을 곱씹는다. 이들은 멀쩡히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미래를 계획하기를 주저한다. 우리는 고통 앞에서 방어적으로 변한다.
역설적이게도 루이자를 일으켜세운 것은 다시 한 번 사랑하는 이를 잃을 뻔하는 경험이었다. 그녀는 샘을 잃을 뻔한 순간에 이르러 모든 것을 이해한다. 자신이 이미 그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절대 잃고 싶지 않다는 것을. 그와의 관계를 확정 짓지 않고 마음을 절반만 열어둔다 해도 마찬가지임을 그녀는 알았다. 아무리 상실에 대비해도, 결국은 피할 수 없이 아프게 될 것이었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를 잃거나 잃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찾아올 이별의 순간 전까지 그를 용기있게 끌어안을지, 두려움 때문에 모호하게 걸치고 있을지, 오직 그것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었다.
사랑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어떤 것을 탄생시킨다. 그건 새 생명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고 때로 살아가야 할 이유이거나 생각지도 못한 다른 삶이기도 하다. 그렇게 무언가가 생겨나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한 번 사랑하고 나면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다. 루이자의 삶 역시 윌을 만나며 영원히 변해버렸다. 윌 이전의 그녀(Me Before You)와, 이후의 그녀(After You)는 같지 않다.
그런 무언가를 잃었는데, 상실의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그건 우리가 무언가를 진정으로 사랑함으로써 무한대가 되는 순간을 경험했기에 치러야만 하는 대가다. 인생은 상실의 연속이라, 우리에게 무언가가 소중하다면 안타깝게도 그건 언젠가 우리가 그만큼 아프리란 뜻이다. 상실과, 그로 인한 슬픔과 고통은 우리의 선택권 밖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이후다. 루이자는 윌을 잃은 고통에 오래 절룩였지만, 그 고통의 끝에서 다시 한 번 사랑하기로 선택한다. 그가 부여해준 새로운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두려움을 이기고 샘을 사랑하기로 결정한 루이자는 또 한 번, 다시 오지 못할 선물 같은 환희를 경험한다.
아름다운 날이었다. 형광등 아래서도 아름다웠다. 밖에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고,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사람들은 살았고, 점점 더 나아졌으며, 늙어가기를 기대했다. 커피를 사고 지나치게 단 머핀을 먹었는데 태어나서 먹어본 가장 맛있는 음식 같았다.
우리는 그저, 다시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글은 '21세기북스'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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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저로 『내가 연애를 못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알마, 2014)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