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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민 Mar 21. 2017

부부 사이에 역지사지는 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나

흔히 부부 사이의 윤리를 말하며 역지사지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한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 나의 행위를 돌아보라는 의미다. 좋은 말이라 부부 싸움의 현장에서 자주 쓰인다. 주로 자기방어와 상대 비난을 위해서. “내가 너였으면 (나한테) 그렇게 안 했어.” 


내가 너였으면 그렇게는 안 했으리라는 저 말은 역지사지의 가르침이 통상의 부부싸움에 얼마나 쓸모가 없는지를 보여준다. 역지사지하라는 그 말이 틀려서가 아니다. 부부 사이의 싸움이란 애초 바꾸기 어려운 입장에 서 있는 두 사람이 벌이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남편은 여행 준비를 매우 꼼꼼히 하는 타입이고 나는 거의 안 하고 현지에서 헤매면서 즐거움을 찾는 타입이다. 남편의 여행준비가 얼마나 꼼꼼하냐면 남의 여행 후기를 하도 봐서 실제로 현지에 가면 김이 빠질 정도고, 내 여행준비가 얼마나 허술하냐면 그냥 거기 도착만 하면 그 뒤부터는 알아서 어떻게든 되리라는 식이다. 


내가 준비해서 간 일본여행에서 나의 허술함에 남편이 기분이 상한 일이 있었다. 남편의 기분 상함에 나도 기분이 상해 예의 멘트를 던졌다. “내가 너였으면 이런 일로 화 안 냈어.” 물론 이 말은 사실이다. 나는 낙천적이라 일정이 틀어지거나, 상대의 사소한 실수가 발견됐거나, 돌발변수가 생긴 상황에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다. 그러나 애초에 남편이 나였으면 그는 나처럼 허술하게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니 실상 둘이 살면서 내가 남편의 상황에 처할 확률은 매우 낮다. 그러니 이 말은 거꾸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내가 너였으면 이런 식으로 준비 안 했어.” 


남편과 같이 살기 시작한 지난 1년 간 열심히 싸우면서 강렬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 그건 우리가 사랑을 정의하는 방식이 몹시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부모에게 사랑받은 그 방식대로 사랑받고자 하고,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의 양육 스타일을 독재적/권위적/허용적/방임적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 것을 본 적 있다. 네 유형을 가르는 두 축은 아이에 대한 관심/반응 정도와 요구/제제 정도다. 아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서 요구와 제제가 많으면 독재적 양육, 적절한 제한을 가하며 충분히 설명하고 아이의 반응에도 민감하면 권위적 양육, 많이 요구하지 않고 제한하지 않으면서 관심과 반응이 많을 때는 허용적 양육, 관심도 없고 제제도 없을 때는 방임적 양육이다. 


나는 말하자면 허용적 양육 방식으로 키워졌다. 부모님은 내게 많은 자율성을 부여했고 내가 어떻게 하든 허용해주는 편이었다. 크게 혼나본 기억이 없다. 잘못을 안 해서가 아니었다.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 오기를 부리거나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부모님은 묵묵히 들어줬고, 나는 뻔히 내 잘못을 아는데도 나를 다그치지 않는 부모님을 보면서 스스로 반성했다.


양육 이론가들에 따르면 이런 허용적 양육은 양육 방식으로서는 그다지 좋은 방식은 아니라고 한다. 나는 알 것 같았다. 부모님의 흔들리지 않는 신뢰 속에서 스스로 반성하는 것 자체는 매우 훌륭한 일이지만, 세상은 부모님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잘못을 잘 인정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고, 내 잘못을 스스로 알면서도 자주 상대에게 전면적인 수용을 바란다. 수용해주면 스스로 반성할 테니 일단 수용을 좀 해달라는 거다. 이런 단점은 일상에서는 크게 드러날 일이 없다. 그렇게 치명적인 잘못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그렇지 않고서야 인정하지 못할 것도 없다. 가까운 관계가 문제인데, 공교롭게도 남편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남편의 잘못/수용 회로는 나보다 훨씬 심플했다: 잘못은 그 사람의 본질이 아니므로 잘못을 했으면 그냥 인정하고 사과하면 된다. 수용 같은 개념이 필요할 일이 없고 반성은 이후에 각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과 싸울 때면 나는 언제나 남편이 지나치게 매정하다고 느꼈다. 내가 상대가 받아주기를 바라면서 던지는 떼를 쓰는 듯한 제스처들에 남편은 결코 내가 바랐던 방식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그 제스처들에서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유아적인 태도를 읽었다. 던지는 제스처마다 오해되는 나로서는 서운할 수밖에. 내가 내 잘못을 몰라서가 아닌데, 그걸 이 사람도 알 텐데(지금 생각해보면 몰랐다), 그냥 조금만 받아주면 되는데, 그게 뭐라고 그걸 안 해주나 말이다. 역시 예의 멘트가 등장한다. “내가 너였다면 모른 척 받아줬을 텐데. 내가 내 잘못을 알고 있다는 걸 믿어줬을 텐데.”


그러나, 예상 가능하듯 내가 남편을 모른 척 받아줘야 할 상황은 절대 발생하지 않는다. 스스로 잘못을 알고 있으리라 내가 믿어줄 필요도 없이 남편은 잘못을 잘 인정한다. 그래서 남편이 잘못한 경우에는 분란이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내 잘못에만큼 남의 잘못에도 관대하고 수용적인 편이니 사태 수습은 더욱 빨랐다. 분란이 일어날 때는 언제나 모호하되 내가 좀 더 잘못한 경우였다. 몇 번의 대싸움을 겪으면서 나는 우리가 그리는 반복되는 싸움의 무늬를 볼 수 있었다. 


시부모님의 양육 방식은 아주 분명하게 확신할 수는 없지만 권위적 양육에 가까웠던 것 같다. 어머님을 보면 평소에는 자애롭고 이해심이 넓지만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신 면이 있다. 내가 겪어서는 아니고 남편의 말과 여러 가지를 통해 짐작하는데 언젠가 남편이 그랬다. 엄마는 절대 세 번을 달래주지 않았다고. 남편이 부모님에게 사랑받는 방식은 자신의 잘못을 빨리 인정하고 어른스럽게 극복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대신 그 극복과 성장에 있어 독려를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수용이란 상대의 반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선행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과정이 다 끝나고 서로가 서로를 좀 더 이해하게 됐을 때 결과적으로 이르게 되는 것이 수용이었다. 다 싸우고서 남편은 종종 자신의 매정함을 사과했다. 그러나 달라지지는 않았다. 애초에 쉽게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바꿀 수 없는 입장 위에서, 우리는 만난다. 그 존재의 기원부터 ‘역지사지’를 한다면 우리는 역지사지의 이상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개는 현재 처한 상황에서만 입장을 바꾸어보기에 바꾸어보면 볼수록 나라면 기꺼이 이렇게 했을 것을 구태여 해주지 않는 상대에 대한 서운함만 커지기 마련이다. 그 결과가 내가 너라면 A했을 텐데에 대해 내가 너라면 A 같은 상황이 생기지도 않았다는 답이 돌아오는 상황이다. 거기다 너와 나는 ‘사랑’하는 존재들이 아닌가. 앞서 우리는 부모가 내게 해준 방식대로 사랑받기를 원한다고 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동안 우리는 상대에게 부모도 내게 주지 못한 사랑을 바라고, 그가 나도 되지 못한 존재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연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섣부른 역지사지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먼저 들을 필요가 있다. 내 사랑의 기원과는 다른 그의 기원에 대해. 그 기원들은 그 자체로 옳거나 그를 수 없고, 우리는 그 가운데 어느 곳에서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게, 새로운 사랑의 기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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