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적이지만 능동적인 사후적 운명론의 묘(妙)
연애담론에도 유행이란 게 있어서 요즘은 약간 냉소적으로 운명론을 부정하는 게 유행 같다. ‘사랑은 영화처럼 시작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기대를 낮추고 환상을 버리고 낭만을 걷어요.’ 이런 말들은 거스를 것 없이 타당해서 21세기에도 운명론을 믿는다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처럼 여겨진다. 실제로 연애에서 운명론이 호출되는 두 순간은 너무나 모순적이지 않던가 말이다.
우리는 연애를 시작하며 운명론자로 변신한다. 나 역시 한때 열렬한 운명론자였는데, 그건 그 겨울 그와 내가 같은 문장을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술자리에서 마주쳤을 뿐 어제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남자가, 15년 차 소설가 김연수가 쓴 무수한 문장들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했던 바로 그 문장을, 전혀 예상치 못한 맥락에서 인용하는데 어떻게 이게 그가 내 운명이란 증거가 아닐 수 있단 말인가. 내게 각인된 운명의 질감은 그때 내가 사랑했던 김연수의 문장 같은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 순간, 예전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 그 순간의 강렬함과 선연함을 운명 말고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어, 우리는 연애를 시작하며 기꺼이 운명론자가 된다.
그러나 그 운명적인 연애가 끝난 순간 다시 운명론이 끌려나오는 데 운명론의 모순이 있다. 나는 예의 그 연인과 이별하며 또 한 번 운명을 들먹였다. ‘우린 운명이 아니었나 보다.’ 이 사람만은 다를 거란 예감으로 시작된 연애들 중 얼마나 많은 수가 그 역시 같았다는 확인으로 끝나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이상하지 않은 귀결이다. ‘나의 운명은 다른 곳에 있나 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운명에는 운명인가. 이렇게 쉽게 부정되는 운명이라니, 운명론은 필시 거짓이다. 우리가 연애에 임함에 있어 운명론 같은 억측과 낭만으로 버무린 미신을 배척해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이 ‘자의성’이야말로 사랑의 운명론을 비롯한 모든 운명론의 본질이다. 우리가 점을 왜 보는가? 진실로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본다고 믿는다면 그는 이 땅의 수많은 점집들이 왜 망하지 않는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점쟁이들은 신이 아니다. 그들의 예측은 다 틀리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취사선택’과 ‘의미부여’의 달인이다. 우리는 평등하게 사소한 사건들에 자의적으로 의미를 더하고 감하며 읽어내고 싶은 것을 끝내 읽어낸다. 2001년 9.11 테러가 터졌을 때 사람들은 ‘오사마 빈 라덴’보다 ‘노스트라다무스’를 더 많이 검색해봤다고 한다. 이미 빗나간 예언도 다시 실현시키고, 무정형의 삶에서도 패턴을 찾아내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이 자의적인 운명론은 우리를 잠시 선택권이 없는 무력한 자리에 둠으로써 이미 벌어진 일들을 좀 더 쉽게 수용하게 한다. 운명이니까 저항하지 않고 뜨겁게 몰입해보는 것이고, 운명이니까 아파하되 절망하지 않고 이내 그를 잊는 것이다. 나쁜 것은 운명론이 아니라 운명을 ‘그저 절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오인하는 치들이다. 세상에 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많지 않으니 그들은 언제나 훅 뛰어들지 않고 경계에 머문다. 확신을 기다리며 머뭇거리고 스스로 결단하기를 주저한다.
반면 운명론을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대단히 능동적이다. 이들은 삶의 예기치 못한 사건들과 적극적으로 교섭하며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면서도 벌어질 일들은 벌어진다는 것과, 모든 일들을 다 내 통제하에 둘 수는 없다는 것을 바꿀 수 없는 삶의 진실로 지니고 있다. 이들은 ‘졸라게’ 노력한다. 왜냐하면 운명이니까. 나는 내가 믿는 바를 실현해야 하니까.
이토록 자의적이어서 능동적인 건 운명론만이 아니다. 사실은 사랑 자체가 의미부여의 산물이며, 자기확신 그 자체다.
길고 힘들었던 연애가 끝나 새털처럼 가볍고 뼛속까지 외로웠을 때 외로움에 쫓기듯 만났던 사람이 있다. 쉽게 시작된 연애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술을 마셔야만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는 얕은 사이였으므로 추억이랄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만났던 시간의 갑절이 훨씬 더 되는 시간 동안 그를 애도해야 했다. 잊을 것도 없었는데 잊히지가 않아, 사랑이란 이름 아래 묶이는 감정들이 함께 한 시공간에 비례하는 이유 있고 대상 있고 실체 있는 것이기만 한 게 아님을 알았다. 내가 애도했던 것은 어떤 가능성이었고 그 가능성에 내가 건 기대와 상상과 소망들이었다. 나는 그 연애를 통해 사랑이 시작되는 방식을 배웠다.
연애가 서약되는 최초의 순간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새로운 연인이 상징하고 상기시키는 모든 것이다. 우리는 그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사랑에 빠진다. 때문에 연애의 어느 순간 내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인해 꿈꾸게 된 새로운 가능성과, 그가 주는 안정감과, 그가 채워주는 자만심과, 때로 이 모든 이유의 총체로서 그를 욕망해왔음을 깨닫는 것은 자연스럽다. 사랑은 오히려 사랑에 빠진 이후에 시작된다. 내 욕망 바깥에 놓인 그 사람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내 욕망을 제한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가 내게 소망하는 것들을 이뤄주기 위해 노력하며 사후적으로 획득되는 것이 사랑이다. 최초의 사랑은 그저 자기확신이다. 이것이 사랑일 것이라는.
그러므로 사랑과 운명은 아주 비슷하다. 둘은 애초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미부여로부터 실현된다.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 그가 나의 운명이라는 것은 외부의 목소리가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느는 운명일까? 그들이 약속한 날 약속한 장소에 나온다면, 그래서 관계가 조금 더 이어진다면, 끝까지 함께 한다면 그들의 만남은 사후적으로 운명인 것이 된다. 둘 중 하나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사후적으로 운명이 아닌 것이 된다. 자기확신과 의미부여에 불과했던 것을 사랑으로, 운명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이다. 우연이었던 만남은 그렇게 필연이 된다.
그러니까 내가 믿고 보듬는 운명론은 말하자면 인디언 기우제 같은 것이다. 비가 올 때까지 드리는 그 의식처럼, 운명의 상대를 찾을 때까지 운명론은 거듭 제기되고 폐기되는 것이 그 운명이다. 운명처럼 뜨겁게 사랑하고 끝난 뒤에는 그것이 운명이므로 놓아주는 것, 그렇게 몰입함으로써 끝내는 나의 연인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나의 사후적이고 능동적인 운명론이다.
나는 운명 따위에 기대를 거는 낭만주의자들보다 냉소하고 조소하며 무엇도 뜨겁게 안지 못하는 이들이 더 어리석어 보인다. 까짓 운명, 누가 지켜보고 서 있는 것도 아닌데 번복하면 어떤가. 나는 운명론의 기꺼이 어리석어지는 뜨거움이 좋다.
사랑은 운명을 발견해가는 힘인 것 같아요.
어떠한 관계에서도 경계에만 머물면 아무것도 볼 수 없어요.
그 관계를 수임할 때 비로소 시간이 흐르면서 본인의 얼굴을 만나게 되는 거지요. 시간 속에서 발자취가 드러나는 삶의 서사, 그거야말로 운명 아닐까요.
─ 소설가 서영은의 인터뷰 중에서
주체적 연애에 대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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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저로 『내가 연애를 못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알마, 2014)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