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기억하자, 그 시절 내게는 그를 사랑할 이유가 있었음을
전 남친들과의 연애를 대부분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P에게는 단 한 명의 구질구질한 ‘구남친’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구질구질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그는 오히려, ‘나쁜 남자’였다.
P는 그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겨울의 한기가 떠올랐다. 가을에 만나 다음해 여름에 헤어졌으니 네 계절을 모두 났는데도 P에게 그와 보낸 시간은 온통 겨울빛이었다. 어느 눈 오는 날 연락이 되지 않는 그를 보러 신림동 고시촌 꼭대기까지 걸어올라간 일, 눈에 젖은 부츠에 싸늘하게 얼어버린 발의 감각, 울음이 멎고 그가 한 말들만을 홀로 누워 곱씹던 새벽녘의 한기, 그런 밤을 수없이 보냈던, 좀처럼 온기가 돌지 않던 그 무렵의 낡은 자취방 같은 것들이 그녀에게 남은 기억의 조각들이었다. P는 아직도 그가 별 생각 없이 던졌던 말을 기억했다. “그래도 넌 나를 떠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를 향한 자신의 사랑에 대한 확신의 표현이라 믿었던 말은 헤어지고도 오래 상처가 됐다. 그가 그녀의 요구에 자주 귀기울이지 않았던 이유를 짐작하고서 그녀는 뒤늦게 서러워지곤 했다.
그가 구질구질한 구남친이 된 것은 그들이 헤어진 다음 해 겨울이었다. P는 마침내 그를 잊고 새 연애를 시작한 참이었다. 어느 늦은 밤 술에 취해 홀로 추억여행을 하던 그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고, 그 다음날까지 이어진 한 번 보고 싶다는 그의 말에 그녀도 마음이 약해져버렸다.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벌써 오래 전이었지만 그게 너무 궁금해서 밤새 그의 SNS를 뒤진 적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6개월 만에 그를 만난 P는, 한때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것들이 전혀 사랑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꼴보기 싫어지는 진기한 경험을 해야 했다. 그녀를 의식해 갖춰 입고 왔을 수트는 바지통이 너무 컸고, 왁스를 발라 만진 머리는 영 어울리지 않았으며, 웨이터와 나누는 대화에서는 그 특유의 허세가 느껴져 듣기 힘들었다. 그는 여전히 초콜릿 향이 나는 담배를 피웠는데, 그것마저 P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녀는 한때 그 달큰한 연기를 사랑했던 것이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그녀에게 상처를 준 ‘나쁜 남자’였지만, 직접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나름의 애틋함으로 그와의 추억을 보듬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나타난 그는 너무나 실망스럽고 혐오스러워서, 자신의 추억에 대한 모독처럼 느껴졌다. 혐오가 너무 심해 그녀는 이것이 무엇인가 파기 시작했다. 그건 일종의 자기혐오 같았다. 지금의 나는 네가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데, 눈꼽만큼도 매력적이지 않아서 반하지 않을 자신은 물론, 만나달라고 매달려도 일언지하에 거절할 자신이 있는데, 그때의 나는 왜 너를 그렇게나 좋아했던 것인가. 뭐가 부족해서 겨우 이 정도의 남자에 목을 맸던가. 거기다 지금 풍기는 이 애매한 뉘앙스 뭐 하자는 건가.
다시 본 그는 그냥 ‘못난 남자’였다. 나쁜 남자로 기억하는 편이 훨씬 좋았을 텐데, P는 그걸 굳이 확인시켜주고 있는 그가 밉고 보는 눈이 없었던 그때의 자신이 부끄러웠다.
모든 전 남친이 찌질한 ‘구남친’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흘러 상처가 아물고 나면 우리는 자신의 입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시간이 만든 거리는 경험을 객관화하게 하며, 각각을 합당한 방식으로 기억하도록 한다. 약간의 의식적인 노력은 필요하지만, 때문에 상처를 주고 받더라도 대부분의 연애는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 자기연민과 혐오는 모든 관계 뒤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P처럼 느닷없이 지난 연인이 참을 수 없이 밉고 찌질해 보인다면, 거기에는 다른 기제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실 P는 비단 못난 남자를 사랑해서만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를 만났을 때 P는 그를 사랑했던 시절 자신이 했던 온갖 삽질들이 함께 떠올렸었다. 사랑이 자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그대로 쏟아붓는 거라 여겼던 그녀는 자주 그를 몰아붙였었고, 그의 옅은 망설임에도 지나치게 절망했었다. 그 시절 그녀에겐 한 뼘의 여유도 없었다. 스스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므로 그가 그녀는 자신을 떠나지 못할 거라 생각한 것도 오만이지만은 않았다. 그가 구질구질하고 미운 한편에는, 이토록 섣부르고 성마르고 과도하고 유치했던 그녀 자신의 구질구질함에 대한 투사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만을 고른다. 정혜윤의 말처럼, “지금의 내 옆의 사랑이 정말로 시시하다면, 견딜 수 없는 그 어떤 면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랑을 선택한 순간의 내가 그 정도만을 허용하고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정혜윤, 『침대와 책』)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성장을 거듭했다면 우리는 점점 더 나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이전의 연인보다 지금의 연인이 훨씬 만족스럽다면 그것은 성장의 증거다. 결국 그녀가 구남친의 구질구질함에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녀 자신이 그 시절로부터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변화가 진정 성장이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바로 못난 그를 사랑했던 나조차 나의 부정할 수 없는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더 현명하고 유려해진 지금의 나는 잊었으나 그 시절 내게는 분명 그를 사랑할 이유가 있었다. 물론 그건 나 자신의 한계지만, 그로부터 나의 성장을 가늠하면 될 뿐 그를 오래 미워할 필요는 없다. 더 현명해지는 일은 지나온 과거를 과오로 만드는 일일 수밖에 없어서, 언제나 우리는 과오로 이루어져 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러므로 조금 더 공정해지고 관대해지는 것이다. 나에게도, 그에게도.
나는 가끔 나의 지난 연인들이 그립다. 시간이 흐른 뒤에 떠올리게 되는 그들은 더 이상 따로 존재하는 누군가가 아니라 그들과 보냈던 내 인생의 한 시기다. 하나하나를 떠올릴 때마다 무지하여 두려움 없이 순수했던 봄이, 넘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휘청댔던 그 겨울이,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는 법을 배우며 숨을 고를 수 있었던 볕 좋은 가을날이 함께 떠오른다. 그들과 나눈 말과 상처와 기쁨과 슬픔들로 나는 구성되어 왔다.
“다시 돌아간다면 그를 만나지 않을 거 같아?”
P에게 물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저었다. 바보 같이 또 반하겠지,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말했다. 아마도 그렇겠지. 지난 연인들은 그 시절의 내가 찾던, 가장 빛나는 사람이니까. 나 역시 몇 번을 다시 돌아간다 해도 충분히 현명해져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밉고 분하고 서운하고 원망스러운 감정들은 결국 휘발된다. 우리가 주고받은 모든 것에 대해, 이제 나는 그저 감사하다.
연애에 대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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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저로 『내가 연애를 못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알마, 2014)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