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뻐하는 둘째 조카가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다. 꼬물거리는 손과 발로 이제 재롱도 부리고 해석 불가한 말도 제법 쏟아낸다. No! No! No! 거리며 자기주장도 펼칠 줄 안다. 누군가의 성장을 보는 일은 제법 재미있는 일이라는 것을 느낀다.
첫째 조카는 상대적으로 찬밥 신세가 되었다. 동생은 둘째만 너무 편애하지 말라고 나의 옆구리를 찔러 댔지만 나는 아무래도 작고 귀여운 것을 더 좋아하는가 보다. 첫째 조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나의 답은 '사랑을 받으려면 먼저 사랑을 주라'였다. 여섯 살짜리 꼬마에겐 너무 잔인한 대답이지만 나의 사랑은 늘 그랬다.
어느 노래 가사에서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하지만 제 부모가 아닌 이상 가만히 있는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해주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부모의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이라지만 요즘 부모 자식 간의 상속 다툼이나 존속살해와 같은 흉흉한 뉴스를 볼 때면 이 말도 다 옛말이 아닌가 싶다. 많은 경우, 사랑이라는 것도 결국 사랑받을 행위를 하거나 먼저 더 사랑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
첫째 조카는 양쪽 집안의 첫 손주라 모두가 거의 물고 빨고 사랑을 때려 붓다시피 키웠다. 내 동생은 또래보다 일찍 결혼해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처음으로 아기 엄마가 되었기 때문에 첫 조카는 가족뿐 아니라 여러 이모, 삼촌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사랑의 결핍을 느낄 셈이 없었을 테고 그 마음들이 다 공짜에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유통기한은 얼마나 짧은가. 물론 아직도 사랑하고 예뻐하지만 그를 향했던 사랑은 또 다른 작고 귀여운 놈에게 향한다.
그 녀석의 마음속을 훤히 다 들여 다 보진 못하지만 처음엔 자신보다 더 작고 사랑스러운 존재의 등장에 본인 몫의 관심을 뺏겨 당혹스러운 것 같았다. 슬픈 마음도 들었을게다. 질투도 나고 자기 동생이 미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그도 이내 받아들이고 본인이 받았던 사랑을 자기 동생에게 주는 모습을 보인다. 동생이 달라는 장난감을 양보도 하고 넘어진 동생을 일으켜 세워주기도 한다. 그런 오빠를 어린 동생은 또 사랑한다. 그렇게 의젓한 오빠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도 또 사랑해준다.
사랑은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아가는 조카를 보며 나도 또 배운다. 그동안 내게 사랑을 준 이들에게 때늦은 고마움을 느끼고 또 내가 그들의 사랑을 당연시 여겼던 적이 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내게 넘치는 사랑을 준 이들에게 나도 어떤 형태로든 그 사랑을 돌려줬으리라 믿는다. 아니 어쩌면 나는 내가 먼저 더 많이 사랑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면 차라리 좋겠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순간순간에 그 마음들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이 내가 또 누군가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데에 밑거름이 됨을 느낀다. 조카들만 크는 줄 알았는데 나도 꼬박 서른두 해를 살며 계속 커왔구나 그래서 더 큰 사랑을 주고 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일은 사랑하는 두 조카들을 꼭 안아주고 하루를 시작해야겠다. 오늘 그 녀석들을 향한 나의 마음이 한 뼘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