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1월 15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민주당은 충격에 빠졌다. 내심 가벼운 벌금형이나 무죄까지 기대했던 당 관계자들이나 이재명 대표는 망연자실했다. 그런데 하나 의문인 점은 민주당이 이 대표의 ‘무죄’를 정말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징역형 반전 판결에 대해 그토록 실망하며 좌충우돌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민주당은 지난 4월 22대 총선에서 압승한 이후 마치 차기 대선은 떼 논 당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떠 있었다. 민주당은 민심의 압도적 지지가 사법부의 판결에도 ‘정치적 부담’을 줄 것이라는 희망 섞인 기대를 했다. 이번 이 대표의 징역형에 대해 민주당이 집단 충격에 빠져 있는 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실정과 무능함으로 민심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이 사법부의 판결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안일한 판단과 기대가 무참히 깨졌기 때문이다.
사실 민주당이 앞으로 남은 이 대표의 4개 재판 가운데 고작 첫 번째 1심 유죄 판결에 대해 이처럼 집단 패닉에 빠진 것은 그만큼 민주당이 사법부의 기류와 정세를 읽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설마 사법부가 대권주자 지지율 1위 후보가 대선에 나가지도 못하도록 사상초유의 정치 붕괴를 초래할 수 있을까’ 하는 안온한 희망 속에 사로 잡혀 있었다.
이는 이 대표에게는 불행한 일이기도 하다. 이 대표는 지난 총선에서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정작 사법부의 ‘법률적 검증대’를 넘지 못해 자칫 대선 출마는 물론 정치생명이 결딴나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봉착해 있다. 선거라는 대의민주주의의 정당한 절차에 의해 대통령 권좌에까지 오르는 게 정상이지만 사법부의 ‘법적인 올가미’로 출마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이 대표에게는 엄청난 정치적 불행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표와 민주당이 사법부의 ‘판단’에 대해 비난을 하고 겁박을 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민주당은 미국 대선 과정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사법리스크가 사법부의 용인과 묵인에 의해 정치적으로 해결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심 우리 정치도 유력한 대권주자의 법적 문제를 사법부가 정치적으로 ‘해소’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미국 정치에서 대통령 탄핵이라는 여야 ‘전쟁’까지 가는 불행한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미국 정치는 유력한 대권주자의 사법리스크가 정치 자체를 와해시키는 극단적 상황으로까지 몰고 가기 전에 타협과 양보의 전통을 어렵사리 지켜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이미 노무현, 박근혜 2번의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으면서 사실상 정치는 실종됐고 완전히 사생결단의 전쟁터가 돼 버렸다.
민주당은 사법부가 정치적인 고려와 정무적 판단을 내려 정치의 붕괴만은 막아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한 게 사실이다. 국민들이 사법부의 ‘전횡’을 눈감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총선 압승의 자만심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사법부의 기류와 정세를 잘 못 읽은 최악의 판단이다.
사법부는 보수적 색채가 강한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고 3권 분립과 균형이라는 헌법 정신에 투철하다. 헌법 수호에 대한 일종의 비장한 사명감마저 가지고 있는 사법부는 ‘정치적 외압’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부감과 저항감을 숨기지 않는다. 판사가 개인의 양심과 법리에 따라 판결을 하지만 사법부 전체를 놓고 보면 일종의 기득권 유지와 조직 논리가 숨어 있는 게 현실이다. 한국처럼 ‘우리가 남이가’ 같은 식의 조직 논리가 강하게 작용하는 국가도 없다. 조직이 능력보다 정실이나 인정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사법부가 국회 다수의석을 차지하며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것에 대한 견제심리가 있는 것과, 이재명 대표가 자신을 둘러싼 온갖 혐의와 의혹에 대해 부인과 변명 일변도로 정치적 대응을 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이번 선거법 1심 유죄 판결에 대해 무리한 법리 해석에 의한 ‘법관의 정치적 대응’이라는 비판이 여전히 유효하긴 하지만 사법부 전반에 ‘이재명 비토론’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점이 실증됐다는 지적에 대해 민주당의 면밀한 정무적 검토와 대응이 필요하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대표가 11월 15일 판결에 이어 25일 위증교사 1심에서는 징역형 실형 판결로 법정구속까지 당할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사법부가 차기 집권이 유력한 제1야당 대표라고 해서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오히려 사법부가 이재명 대표에 대해 그 정치적 역량을 인정해 대선 가도의 길을 열어주려는 ‘관용’보다 거짓말과 잡아떼기로 일관하는 한 정치인의 ‘위선’을 법적으로 응징하는 ‘무력시위’로 결론을 내릴 가능성도 있다.
현재의 사법부는 사실 현직 정치인들에 대해 상당한 불신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기류는 이재명 대표뿐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정치의 효능감 실종과 무능에 대한 거부감일 것이다. 지난 11월 12일 열린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의 탄핵 심판 첫 변론에서 문형배 헌법재판관은 법사위원장 자격으로 참석한 정청래 의원을 향해 “국회는 방통위원 3명을 추천해야 할 법률상 의무가 있는데, 왜 추천하지 않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또한 문 재판관은 “합의가 안 되면 국회는 아무 결정 안하나. 여태까지 안했는가”라며 강하게 불만을 표시하며 참석한 의원들을 몰아세웠다.
헌법재판관이 사심에 가까운 불만을 변론장에서 공개적으로 표출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이례적이다. 그만큼 사법부가 정치권의 ‘내로남불’ 행태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민주당이 ‘총선 압승’과 국민들 지지만 믿고 사법부를 겁박해 이 대표의 사법리스크를 해소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히려 사법부의 감정적인 대응만 부추길 것이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이럴 때일수록 이 대표가 통 크게 ‘이런 법원 판결조차 우리가 안고 가야 한다’고 말하고, 당 지도부도 절제를 많이 해야 한다. 사법부를 등져봐야 결코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며 사법부 겁박에 대한 자제를 촉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박찬대 원내대표가 이 대표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서울중앙지방법원의 1심 판결을 두고 “정치 탄압에 부역하는 정치 판결”이라며 비난하고 민주당 지지층들이 판사 ‘신상털기’에 나서며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냉정하게 분석해봐야 한다.
또한 이 대표의 사법리스크에 대처하는 참모들의 대응 방식도 신뢰할 수 없다. 이 대표가 선거법 1심 재판정에 출두하는 날 김민석 김병주 최고위원 등이 병풍처럼 그를 둘러쌌다. 이들은 모두 이 대표 곁에서 오로지 투쟁만을 부추기는 강성파들이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않는 최고위원들의 강경일변도 전략이 이 대표를 더욱 사지로 몰아넣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한다. 레드팀의 역할을 하며 합리적인 쓴 소리와 견제를 하는 최고위원의 부재도 아쉽다.
그런데 이 대표가 사법리스크로 위기에 몰리고 있지만 정작 그의 대권가도를 위협하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이 대표의 오락가락 행보다. 이 대표는 최근 민주당의 당론이었던 금융투자세 과세 정책을 뒤집고 폐지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또한 11월 19일 참여연대는 이 대표가 “이른바 ‘유리지갑’인 급여 소득자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에 대해서도 무책임한 감세 행보라고 비판했다.
참여연대는 “이재명 대표가 당의 강령과 위배되는 감세행보를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로 보인다. 다음 대선에서 이기겠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대표가 민주당의 친서민 정책들을 잇달아 뭉개고 오로지 집권하기 위해 포퓰리즘적이고 편한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대표의 장점은 추진력과 현장성에 있었다. 경기도지사 시절 계곡불법 영업에 대해 ‘현장’을 덮쳐 일거에 바로잡는 등의 현장 리더십과 강력한 추진력이 이 대표의 강점이었다. 이는 경기도라는 넓은 운동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대표는 사법리스크와 대선을 대척점으로 하는 ‘좁은 트랙’에서만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다 친서민 민주당의 색깔마저 버리려고 한다. 보수도 진보도 아닌 누더기 정당의 대표가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물론 정치인의 지상최대 목표는 집권이다. 이 대표 또한 지금까지 오로지 대권을 향해 고난의 길을 버텨왔다. 하지만 정치인의 사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당의 철학과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과 그런 ‘과정’의 연속성이다. 정치인은 대중들보다 더욱 인내해 어렵더라도 국민을 설득해 당의 가치와 철학을 관철시켜 나가야 하는 용기와 절제도 필요하다.
국민들이 포기하라고 하기도 전에 정치인이 먼저 포기해 편안한 길을 가려는 것은 대권에만 몰입하는 ‘사리사욕’으로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민주당의 철학과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의 과정들이 결국 이재명 대표를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것이다. 대권도전에 유리하지 않다고 해서 국민의힘이 환영하는 정책을 쏟아낸다면 진보정당으로서의 존재마저 의심케하는 심각한 정치적 일탈이자 대권욕의 투사일 뿐이다.
현재 정치권에서는 이재명이 아웃되면 차기주자는 누가 될 것인지를 두고도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 김동연 김부겸 김경수 ‘신 3김’이 부상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고 이재명 대표가 물러나더라도 추미애 정청래 김민석 가운데 한 명을 찍어 ‘섭정’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 대표에게 거리투쟁과 강경대응을 부추긴 김민석 정청래 등이 1심 유죄 판결 뒤 화장실에서 웃고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이 대표가 예상치 못한 1심 징역형을 선고받자 민주당이 마치 뒤통수를 맞은 듯 심각하게 요동치는 것 자체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참모들의 무능한 정무보좌 기능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 대표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이 대표 유죄 정국의 가장 큰 난제는 이재명의 사법리스크와 김건희의 사법리스크가 반비례하며 서로 연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대표 사법리스크가 커지면 커질수록 김건희 여사 특검, 수사 정국의 동력이 빠진다면 민주당에게 진짜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현재 국민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윤석열 정권의 무능과 김건희 여사의 권력사유화를 처단하고 처벌하는 것이다.
이재명 대표의 ‘대여 투쟁’ 탄착군은 바로 김건희를 중심으로 형성돼야 한다. 만약 이 대표가 사퇴해 ‘윤석열-김건희 정권의 권력사유화’ 처단 동력을 계속 유지시켜준다면 오히려 이 대표에게 더 새로운 길이 열릴 수도 있다. 이 대표가 사법리스크 정국을 ‘사즉생’의 대의와 각오로 혈혈단신 덤벼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