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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기석 Mar 26. 2017

15. 교통좋은 교토 (1, 2일차)

다신 안 올 거라 생각했는데...

1, 2일차를 한꺼번에 쓰는 건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나라에서 교토 넘어와서는 그냥 아무 곳도 가지 않고 일만 하다 술만 먹었기 때문에...


그래서 1, 2일차를 이번에는 한꺼번에 적어보려고 합니다.

킨테츠나라역에서 운이 좋게 한 방에 가는 열차를 탔습니다. 열차 시간은 항상 구글맵으로 찾아보길 추천합니다. 안 그러면 두어 번 갈아타야 할 때도 있고, 두어 시간 전에는 있던 열차가 지금은 사라지기도 하고, 반대가 되는 경우도 있고 하니까...비 줄줄 맞아가면서 겨우겨우 지하철을 타고 교토에 도착했습니다.

이번에 들어오게 된 게스트하우스입니다. 식탁 이런 거 없고 100% 좌식인지라 저 같이 엉덩이 잘 눌리는 사람들한테는 상당히 불편한 감이 없지 않았는데 오히려 더 좋았던 게 주방과 공용공간을 한 덩어리로 묶어 놓으니 이래저래 오며가며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달까?

역시나 첫 날도 짐을 풀고, 이런저런 설명을 들은 다음에 노트북을 펴놓고 일하면서 술로 시작과 끝을...

다음 날 아침입니다. 겉에서 보면 전형적인, 뭔가 큰 특징이 없는, 그냥 일본집같은 분위기입니다.

사실은 관광객들처럼 이것저것 해보려고 했다가 일본인 게스트들과 이야기를 해 본 결과 1월 9일이 성인의날이라고 하더군요. 우리처럼 5월에 장미주고 따로 행사 없고 그런 게 아니라, 교육청에서 행사 주관하고, 이 날 두 차례에 나눠서 행사를 한다고 하길래 한 번 가보기로 했습니다. 이 추운 날 성인식이라니...

게다가 4월 1일을 기준으로 나누더군요. 예를 들어, 97년 4월 1일부터 98년 3월 31일생은 올해 성인이 됐을 겁니다. 생일에 따라서 누구는 성인이고, 누구는 아닌...

메이지진구에서 성인식을 한다고 하길래 버스를 타고 가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교토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관광객 코스프레는 접고 동네 사람들처럼 어슬렁거리기로 한 코스였죠.

3박 4일만 있으려고 했는데 운이 좋게 게스트하우스 할인한다고 해서 990엔을 주고 하루를 연장했습니다. 세상에 만원도 안 하는 돈으로 하루를 재워준다는데 마다할 이유도 없었고.

메이지진구입니다. 진구, 즉 신궁이 있던 자리라 그런가 도리 규모도 엄청나고, 사람들도 많고, 볼 것도 많은 곳. 뭐 그래도 한 번 왔던 곳이니 그냥 주변만 슬렁슬렁 걸어다녔습니다. 이 날도 비가 왔고.

지나가다 눈에 띈 한 처자. 성인식에 참가하는 모든 남자는 정장을, 여자는 기모노를 입습니다. 이 추운 날 저렇게 입으면 입 돌아가겠다, 남자들보다 훨씬 불편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들 그런 건 개의치 않고 돌아다니더군요 (부럽다...나도 20대 시절이 있었더랬는데).

성인식은 오후 두 시라길래 시간도 남고, 배도 고프고 해서 관광객 코스프레를 할까 하다가 식당에 줄 서서 기다리는 걸로 코스프레를 대신했습니다 (하아 왜 그 짓을 했을까).

하아...분명 11시 좀 넘어서 갔는데 벌써부터 이 모냥입니다. 그래도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될 줄 알았던 게, 그래서 오기를 부려서 줄 서서 기다렸던게 결국 두 시간 걸렸습니다. 두 시간이라니,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우동 한 그릇 먹는데 두 시간이냐 (깊은 빡침).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이 아무런 짜증도 내지 않고 가만히 서서 자기네끼리 이야기하며 기다리덥디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여서 춥기도 하고, 아무 것도 못 하고 그냥 줄 서서 기다리는건데 짜증 하나 안 내고. 가게 주인은 연신 미안했는지 따뜻한 곡차도 주고, 메뉴판 미리 주면서 골라보라고 하다가 비가 오기 시작하면 우산 빌려주고. 무서운 사람들.

여기까지 오는데 두 시간 걸렸습니다. 젠장. 그래도 좀 있으면 나도 들어갈 수 있겠구나라는 희망으로.

애처로운 원숭이라니. 식당은 작습니다. 테이블이 6, 7개에 바가 있기 때문에 저같이 혼자 온 사람들한테도 좋고. 실내에서 금연인 게 아쉬웠지만 주인이 그렇다니 그런 걸로. 우선은 쌀쌀한 날씨에, 두 시간을 허비한 상태에서 짜증이 나 있었는데 메뉴판을 보면서 얼른 내놔라, 안 내놓으면 잡으러 간다는 마음으로 세트를 시켰습니다. 튀김도 함께.

매운 우동입니다. 뭐 맵다고는 하지만 전혀 안 맵고, 살짝 얼큰한 정도? 일본 사람들의 매운 음식은 초등학교 입맛 정도면 어느 정도 커버 가능합니다 (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에 된통 당하긴 했지만, 일본식은 아니라고 하니 패스). 달걀이 둥둥 떠 있는지라 살짝 느끼하긴 한데, 날 춥고 기다린 게 억울해서 얼른 먹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후루룩~

튀김 옆에 있는 카레 가루를 찍어 먹으면서, 내가 이러려고 두 시간 기다렸나 자괴감 들었지만 깔끔하니 괜찮긴 하더군요. 단, 두 시간을 기다릴 정도는 아닌 듯했습니다 (30분이면 흔쾌히 오케이). 맥주라도 없었으면 정말 억울할 뻔했는데 메뉴판에 병맥주가 보이는 순간 뒤도 안 보고 시켰습니다. 병맥주와 함께 하니 훨씬 좋더군요 (네, 그냥 맥주가 먹고 싶었을 뿐입니다). 

분명 튀김도 먹고, 우동도 먹었는데 왜 자꾸 배고 고프냐. 그래서 밥을 한 그릇 시켰습니다. 참치캔에 비벼먹는 느낌이었는데, 햇반에 동원참치 한 깡통 후루룩하는 느낌? 자꾸 두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머릿 속에서 안 떠나더군요. 게다가 이거 기다린다고 원래 목적이었던 성인식은 콧빼기도 못 본 참사가...

기분도 상하고, 뭐 성인식이야 사람 많을테니 안 봐도 그만이라고 나름 위안을 삼은 상태에서 메이지진구를 다시 어슬렁댑니다. 이미 행사가 다 끝난지라 길거리에는 기모노 처자들과 양복 아이들로 가득한 길거리를 걸어봤습니다. 이젠 성인이니 뭐 나름 자유가 생겼다면 생겼겠죠? 청소년이 혜택은 더 많단다 성인들아.

메이지진구 별다방 앞에 모여 있던 아이들. 그런데, 기분이 묘했습니다. 마침 지금이라 더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월호 인양 소식을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그 때 살아 있었다면 그 아이들도 올해 성인식이라고 신나했겠죠? 이제는 성인이니 나도 맘 놓고 놀 수 있겠고, 군대 고민하면서 술 한 잔, 연애 고민하면서 술 한 잔, 인생 고민하면서 술 한 잔 할 수 있었을텐데. 그래서 성인식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켠으로는 미안했습니다. 괜시리 나이 든 사람들의 잘못으로 인해 당시의 어린 학생들이 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 그 학생들은 성인이라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한 번씩은 붙이고 다니는 딱지 한 장 못 붙였다는 것이 아리게 다가오더군요.

역시나 오늘도 숙소에서 뭘 마실까 고민하다가 근처 편의점에 왔습니다. 세상에나 마상에나, 진로 막걸리? 그것도 한 병에 600엔? 세금 붙으면 648엔?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진로 막걸리를 마시느니 오른쪽에 있는 진로 소주를 마시던가, 왼쪽에 있는 2리터짜리 매실주를 마시는 게 백 배는 낫겠다 (물론 막걸리를 그 뒤에 먹긴 했습니다만 막걸리는 역시 장수막걸리나 제주막걸리가 우왕 굿).

그래서 술을 사갖고 돌아왔는데 웬걸, 이미 공용공간에 코쟁이들이 자리를 잡고 일잔 시작했더군요.

전초전에 불과한 모습. 맨 왼쪽에 있던 타티아나도, 그 옆에 라이언도, 다니엘도, 핀란드 언니도 죄다 꽐라꽐라. 잠시 후 네덜란드 애들 넷이 술 한참 사갖고 들어오면서 판을 벌였습니다. 7시부터 새벽 5시까지. 물론 게스트하우스는 11시면 조용히 해달라고 하는데, 이 날은 이렇게 놀아보긴 오랜만인지라 거하게 놀자, 대신 조절은 해보자라는 생각에 일본인 스탭과 딜을 칩니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가 커버하마. 그리고 조용히 해달라고 얘기하겠다. 대신 노는 거 좀만 봐다오, 그럼 오케이 (아, 이 무슨 한국적 마인드냐...게다가 이 술자리에서 내가 나이가 제일 많다는 이유...). 술 떨어지면 이야기해라, 확실히 먹여주마. 나가서 노는 건 자유인데 그럼 난 책임 안 진다. 안에서 먹는 거면 뭐든 오케이 (사실 술이 그렇게 먹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이렇게 게스트하우스에서 질펀하게 술 먹고 싶었다 뭐 그랬으니 뒤집어 쓰겠다고 했던 건 아닐까).


별별 일이 다 있었던, 그러나 늘 기승전술로 끝난 교토 이틀차.

내일은 무슨 술을 마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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