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긋기로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자
어느날 아침 출근 길, 뚝섬역 4번 출구를 나와 매일 걷던 길 한쪽 면에 점자 구분 표시라는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그 스티커를 보며 '이미 보도블록이 있는데 점자 구분 표시까지 붙여 놓아 구분 해야되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보도블록이라는 것을 전혀 인지하고 있지 못했던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마 그 스티커가 없었다면, 보도블록이라는 것을 나는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점자 구분 표시라는 스티커를 통해서 보도블록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고, 그런 명확한 정의가 없다면 인간은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점자 구분 표시 스티커를 붙여 놓는 행위 자체는 보도블록을 정의하는 역할도 하지만,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는 보도블록을 정의해주고 구분하라는 선을 그어주는 역할을 한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이렇게 무언가를 정의하고 선을 긋는 것은 매우 중요한 행위이다.
그 이유를 우리는 쇼펜하우어에서 찾을 수 있다.
며칠전 지인에게 "쇼펜하우어, 나를 깨우다"라는 책을 선물 받아 읽어 보았다.
읽어 보며 느낀 것은 인생의 선긋기가 되어야 우리의 삶이 조금이라도 덜 불행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삶은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이라는 비관론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가이다.
인생이란 설계도가 주어지지 않고 이루어지는 건축과 같다......우리는 설계도를 본 적도 없고, 전체의 육관에 대해 말해주는 이도 없다. 그렇게 우리의 하루는 어떤 구조의 완성을 위해 소모된다.
설계도도 주어지지 않은 인생에 태어난 것 자체가 고통이고, 어떤 설계가 나올지도 모른채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하는 우리의 삶.
매일 아침 출근 길을 나서는 현대인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아주는 우리 쇼펜하우어 선생님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없었던 것 같다.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관계에서 선긋기도 못하게 된다면, 인간은 더 큰 나락으로 빠져들게 된다.
쇼펜하우어가 타인의 평가에 대해 한 말을 한번 들어보자.
그들은 타인의 평가를 자기 존재의 진실로 오인한다. 그렇다면 명예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타인의 오해다. 나는 그것을 바닷물에 비유하곤 했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을 느끼게 만드는 치명적인 유혹의 물과 같다. 명성을 좇는 자는 끝내 자신을 잃는다. 왜냐하면 그는 외부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결국 나라는 존재를 정의하지 못하고 타인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 보게 된다면,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나와 타인의 존재는 항상 선이 그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보도블록이라는 물체와 점자 구분 표시라는 스티커가 서로 구분되어 서로가 서로를 인지하게 해주는 것처럼, 스스로와 타인을 선으로 긋는다면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로 이 글을 마무리 하려 한다.
우리가 이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은 "내가 무언가를 얻었다"가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에 불과하다.
참고로 이 구절과 같은 궤의 말을 한 것이 안성재 셰프이다.
'안성재거덩요' 채널에서 연예인들에게 요리를 가르쳐주는 영상이 있는데, 수지님 출연하여 "지니를 만나면 빌고 싶은 소원이 있느냐?"라고 안성재 셰프에게 묻는다.
그는 이미 꿈을 이뤘기 때문에 그 꿈을 이루는 것보다는 꿈을 이루기 위한 힘들었던 과정이 소중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말이 쇼펜하우어가 한 말과 너무 비슷해서 신기하기도 하고 참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쇼펜하우어가 모든 지식인들이 비관에 휩싸이기를 바랬던 것과 달리,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적어도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을 모두들 겪어 보는 것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을 겪어 내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중이다.
쇼펜하우어 선생님,
비관론이 극한으로 가게 되면 결국 긍정론으로 가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