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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유빈 May 08. 2018

도시락 편지: 엄마에게도 꿈이 있었다는 걸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 나는 정말 심각한 엄마바라기였다. 어딜 가든 엄마를 찾고 엄마 옆에 꼭 붙어있던 나였기에 파트타임이지만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 잠시 내 곁을 비운 엄마의 빈자리가 유난히 더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잔망스럽기 그지 없는 말이나 행동들도 많이 했는데, 엄마가 일찍 출근하는 날이면 엄마 출근 전에 일어나서 인사하려고 엄마와 내 발목을 잇는 실을 묶고 자곤 했던 것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몇 번을 시도했으나 매 번 실패했는데, 일단 실이 당기는 정도의 움직임에 일어나기엔 나는 너무 잘 자는 어린이였고 엄마가 피도 눈물도 없이 가위로 실을 싹뚝 자르고 갔기 때문이다. (물론 실을 자르는 엄마 마음이 절대 편치 않았을 거란건 나도 안다.) 엄마의 출근 시간과 내 등교 시간이 겹치는 날이면 종종 엄마와 같이 집을 나서곤 했는데 어느 날은 내가 엄마랑 같이 나가지 않겠다고 하더랜다. 엄마가 이유를 물으니 '엄마가 출근한다고 마을버스를 타고 가버리는걸 보면, 마을버스가 엄마를 훔쳐가는 것 같아서 그 장면이 보기 싫다'나. 이게 다 내 8살 적 이야기다.


이 외에도 수 많은 신파들이 이 시절 탄생했는데, 아무튼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던 엄마의 혈액원 생활도 98년 가을, 엄마의 퇴사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사실 엄마는 어린 내가 엄마 가지 말라고 칭얼거릴 때마다 몇 번이고 사표를 냈었는데 그 때마다 혈액원 과장님의 철통같은 반려와 회유로 '딱 한 달만 더 일하고 그만두자'라고 했던 것이 3년 5개월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언니도 중학교에 가고, 나에게 일찍 찾아온 사춘기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엄마도 하고 싶었던 일인 글 쓰기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드디어, 드디어 그만두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엄마의 사표를 끊임없이 반려했던 최 과장님의 퇴사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엄마가 퇴사를 했을 때, 나는 그냥 엄마가 집에 계속 있어서 좋기만 했지 엄마가 왜 그만 뒀는지, 어떤 고민이 있었는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그 때 엄마에게 이 변화가 얼마나 두려웠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짠하다. 98년 IMF 위기로 종합금융사에 다니던 아빠 회사의 상황은 매일 매일 달라졌었고 비록 파트타임이라도 엄마의 수입이 집에 분명 안정을 보태주고 있었을 것이다. 그치만 그 경제적인 수입원을 잃게 되더라도 엄마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을 - 두 딸을 잘 키우고 싶은 마음, 그리고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인 글 쓰기 공부 - 위해 엄마는 마흔 한 살에 용기를 내어 새로운 도전을 한 것이다.


혈액원을 그만 두고 엄마는 한우리 독서지도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집에서 한참 먼 강남까지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밤이면 과제를 하느라 늦게까지 거실 앉은뱅이 책상에서 시간을 보내던 엄마 모습이 기억난다. 비록 그 당시 어린 나는 엄마가 겪었을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과 고민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 때 내가 본 엄마의 모습과 기억이 지금의 내 삶에 영향을 준 것은 틀림없다. 엄마가 보여준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모습이나 - 혈액원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나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한 것 - 매 번 도시락 편지에서 우리에게 되새겨 주었듯 계절 변화나 주변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마음을 다잡는 모습에서 나는 무엇이 내 삶에서 소중한 것인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무의식 중에 내재화 시켰던 것 같다.


2018년 5월 8일, 오늘은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사함을 전하는 어버이 날이다.

우리 엄마 딸로 태어나, 성장해올 수 있어 참 감사하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나의 딸

화정에게


가을이라고 하지만 내리쬐는 태양은 여름 못지

않은 힘을 갖고 있구나.

그러나 (접속어가 맞는지 모르겠구나. 틀렸다면 이해해라. 너는 누구보다도 엄마를 잘 알지)

이 무더운 더위에도 유빈이가 엄마 직장 나갈때

붙잡듯이 붙잡고 싶구나.

한번 가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으니까 말이다.


올 가을은 엄마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구나. 그동안 3년 5개월 동안의 혈액원 생활을 마치고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글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어서.

새로운 도전에 대해 기대감과 함께 두려움도 앞선다.

항상 그랬듯이. 아빠와 너희 둘의 도움으로 잘 해내리라고 마음 먹었다.


화정아.

이번 시험 잘 치른 것을 축하한다.

너를 보내고 너의 책과 소지품 등을 너를 보듯 바라보았다.


참 대견하고 고맙다.

혼자서도 잘 해냈으니까 말이다.

너의 입학 기념으로 산 벤자민처럼 자꾸자꾸

뻗어가기 바란다.


앞으로 가을은 자꾸자꾸 익어가겠지.

좋은 책으로 화정이 정신도 잘 익었으면 좋겠다.

너의 이마에 난 여드름만 빼고.


그럼 안녕

즐거운 하루이길 바란다


그럼 이따 보자


98. 9. 14 정오

거실에서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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