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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BR Oct 12. 2021

유영국만의 조형 언어 '자유로운 예술'을 꿈꾸다

<방구석미술관2 한국편 (조원재) 유영국 Part를 읽고> 

유영국 WORK 1980


처음엔 색을 참 잘 쓴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엔 정제된 삼각형의 산 모양이 보였다. 원색의 강렬한 색감을 이렇게 세련되게 조합하다니.


멀리 있는 산은 보라색이고 뉘엿뉘엿 지고 있는 태양은 자주색이다.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산은 오렌지 빛이고 양 끝의 각은 붉게 물들어 있다. 나뭇가지는 세갈래로 저마다의 방향으로 뻗어 있다. 원색의 화려하고도 강렬한 색감이 기하학적 구성의 안과 밖에서 우아함을 뽐내고 있었다.


요즘 활동하는 현대 작가인가 싶었는데 살짝 오른편에 보라색, 오렌지색 삼각형 만큼이나 정제된 느낌의 영문 낙인이 보였다.


YOUNG KUK


이전에 서양미술사를 통해 알게됐던 러시아 화가 칸딘스키의 그림을 봤을 때의 느낌이었다. 유영국, 그리고 칸딘스키의 그림은 나에게 추상화도 밝고 예쁜 색감으로 감각적이게 그려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일각에서는 그의 그림이 주는 강렬한 색채와 세련된 색채의 조합 때문에 '마티스'와 비교하기도, 작가 말년에 '산'이라는 소재에 꽃혀 평생을 연구하며 주구장창 '산'만 그렸던 까닭에 '폴 세잔'과 비교하기도 한다.  


유영국(1916년 4월 7일~ 2002년 11월 11일)


유영국. 김환기보다 대중들에겐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와 쌍벽을 이루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다. 그의 그림을 조금 아는 이들 사이에선 '산의 화가'라고도 불린다. 유영국은 서구의 순수추상 사조를 흡수한 뒤, 한국적 산수의 정서를 접목해 본인만의 독창적인 조형언어로된 회화세계를 창조했다. 


그런 유영국 화백을 책 <방구석미술관2 한국편 (조원재 지음)>으로 다시 만났다. 꽤 오랜만에 미술사 스터디를 준비했다. 오랜만에 피가 도는 느낌이었다. 한국 작가의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자리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더인 친구가 책 속에 있는 한국 작가들 중 한 분을 선택해 멤버들에게 발표해주길 바란다는 부탁을 했을 때, 망설지이 않고 유영국 작가를 선택했다. 김환기 작가와 함께 너무나도 사랑하는 한국 추상 작가. 하지만 높은 경매가를 기록해 세간에 알려진 김환기 작가에 비해 유영국 작가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몰랐던 분들이 조금이라도 이 작가 작품의 매력을 알게 되길 바라며, 책의 내용을 두 가지 큰 줄기로 나누어 요약했다. 


첫 번째. 그에게는 미술 말고 또 다른 재능이 있었다


유영국이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라는 타이틀 이전에 매우 뛰어난 사업감각을 가지고 있던 '사업 천재'였다는 사실은 나도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책에도 나와 있지만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지금 어느 대기업의 명예회장으로 남아있을지도 모를 정도라고 한다.


사업을 잘한다는건 어떤걸까. 나의 짧은 생각으로는 사업을 잘하려면 현재 시장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는 선구안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사업 감각. 유영국이 보유하고 있던 이 뜻밖의 재능은 그가 미술에서도 추상을 선택하게 된데 큰 영향을 주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사업가 DNA는 그의 집안 내력이다. 그는 울진 유부자로 불리던 할아버지, 아버지를 둔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린시절 고향이었던 울진의 대자연 속에서 자라며 자연의 무한한 색채와 형태를 두 눈에 담으며 자란다. 영국은 공부까지 잘한 우등생이었지만 일제시대 식민제국주의 교육 속에서 깊은 억울함과 분노를 느낄 만한 사건을 겪게되고, 그 길로 학교를 자퇴한다. 10대 시절 내내 학교에서 체험했던 왜곡된 교육과 억압된 자유. 영국은 그 어떤 이념에도 갇히지 않는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택한 것이 예술이었다. 예술이 누군가의 구속 없이 자신의생각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렇게 스무살의 영국은 도쿄로 유학을 떠나게 되고, 특정 이념에 치우침없이 가장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학풍을 가지고 있던 '문화학원'에 입학한다. (여기서 유영국은 바로 자신만큼이나 자유를 사랑했던 이중섭 화백을 만나게되고 평생 서로의 예술을 응원해주는 친구가 된다.)


문화학원은 도쿄에서 가장 전위적인 최신 미술을 빠르게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전위적 미술 경향이라는건 당시 유럽에서 1900년대에 탄생한 야수주의, 그리고 1910년대에 탄생한 '추상주의' 이 두가지 였다. 문화학원에서 만난 그의 친구 이중섭은 화가 마음대로 사물의 색채와 형태를 왜곡해서 표현하는 '야수주의'를 택했고, 유영국은 '추상주의' 사조를 택했다. 당시에도 추상은 도쿄에 소개된지도 몇 년 안된 가장 생소한 미술 경향이었다. 조선 미술계에서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일본에서도 아직 이해받기 어려운 사조였다. 그런데도 유영국이 처음부터 가장 생소한 사조였던 추상미술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자유' 때문이었다. 유영국이 봤을때 구상회화는 화가가 무언가를 그릴때 외부 세계만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에 갇혀 자유롭지 못해 보였던 것이다. 반면에 추상회화는 외부에 사물을 그려야 한다는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보였다.  즉 그의 눈에 추상회화가 더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고 보여 더 마음에 들었던 것. 여기에 그가 추상미술을 택한 한가지 더 이유가 있다. 바로 여기에서 그의 논리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예술가는 논리적 사고를 지녀야 한다. 
시대의 조류는 늘 바뀌기 때문에 
예술가는 10년 또는 20년 후
자기가 한창 활동할 때에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에 대해 
미리 냉정하게 예측하여 공부해야 한다. 
예술가에게도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두뇌가 필요하다. 

- 故 유영국 화백 

P148


미술가와 예술가의 차이를 아시나요?


몇년 전,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툴르즈 로트렉'전에 가서 김찬용 도슨트님의 도슨트를 듣다가 이런 말을 듣고 너무 좋아서 메모한적이 있다. 미술가와 예술가의 차이. 미술가는 그냥 보기에 예쁜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 사람이지만 에술가는 작품을 통해 다음 세대, 즉 Next Level을 제시 한다고 한다. 유영국 화백이 남긴 말처럼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예측하고 그 다음 단계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서 미래의 흐름이 '추상미술'이 될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이게 곧 미래의 대세가 될 미술 경향이라 보고 접근한 것이다. 즉 훌륭한 사업가 답게 현재가 아닌 10년 20년 후에 대세가 될 사업을 꿰뚫어보고 시장을 선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예측대로 된다 한국전쟁이후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한국미술계는 추상미술이 대세가 된다. 그리고 그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타이틀로 한국 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예술가로 남게 된다. 


(이후의 내용은 그가 자신만의 추상적 조형언어를 창조하기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나온다. 그 중간중간 그가 실제 전쟁을 겪으면서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키기 위해 제지, 양조사업 등을 해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는 과정. 먹고 살만해지자 다시 사업을 동생에게 넘기고 "돈은 살아가는데 수단이 되어야지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더 큰 욕심없이 그림 그리며 먹고 살 정도 됐으니 예술을 하겠다~" 라며 전업 예술가가 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꽤 재미 있으니 책으로 한 번 읽어 보시길!)



두 번째, 유영국이 '산의 화가'가 된 이유


두번째 큰 줄기는 바로 바로 그가 조선의 '산'이라는 자연을 본인의 작품에 접목시키면서 '산의 화가'가 되고,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찾아 새로운 예술세계를 구축하는 스토리가 되겠다. 역시나 그의 예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들은 동료들이었다. 한국 미술계의 거장 김환기, 이중섭, 이규상, 장욱진. 바로 '신사실파' 작가들이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유영국의 추상세계에 '자연'이 들어오게 된다. 


유영국 Composition, 1949


김환기, 장욱진, 이중섭은 신사실파에서 유영국을 만나기 전부터 그림에 '조선의 미'를 담는것에 관심이 많았다.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됐던 점 중 하나는 이 작가들이 서양미술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에서 벗어나서 조선만의 독특한 미의 정수를 찾아내 그림에 담으려 했다는 점이다.


20대 내내 일본에서만 활동해서 조선의 맥락을 전혀 모르던 유영국은 이들과 소통하며 자신과 한국의 추상회화가 어떻게 나아가야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그의 추상세계에 '한국의 자연'이 담기가 시작한다. 그의 영감은 자신의 고향인 '울진의 자연'에서 왔다. 특히 그의 눈길을 끈 존재는 '산'이었다.



산에는 뭐든지 다 있다.
봉우리의 삼각형, 능선의 곡선, 원근의 면,
그리고 다채로운 색.

P172


누군가는 아무 의미없이 지나치는 산이었지만 그 흔한 산이 유영국에게는 마르지 않는 예술적 영감을 주게 e된다. 영국의 눈을 통해 들어온 산은 그의 마음속에서 숙성과 정제의 과정을 거치게 되고 마침내 그가 창조한 독창적인 조형언어로 변환된다. '산'을 주목한 '산의 화가'라는 점 때문에 책 속에서는 <금강전도>의 작가 '겸재 정선', 프랑스 작가 '폴 세잔'과 비교되기도 한다. 폴 세잔도 30년동안 오로지 '생트 빅투아르 산'이라는 소재만 주구장창 그려댔기 때문.


유영국과 폴 세잔은 수십년 동안 묵묵히 산 앞에서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끊임없이 창조하며 고행한다. 그러면서 산과 물아일체가 되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 故 유영국 화백 



그렇게 그는 자유의 몸이 되어서 죽는 날까지, 그림을 그린다. 



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어.
세상에 태어나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이 
나는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고 간섭받지 않으면서,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면서,
평생 자유로운 예술을 할 수 있어서 
나는 정말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 故 유영국 화백 

P181


그가 남겼다는 말을 읽다가 무언가 울컥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생에서 무언가를 이토록 뜨겁게 열망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유영국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그가 평생 추구했던 '자유'에 가장 가까웠던 일인것 같다.다. 그림을 통해 너무도 행복했고 태어나서 이걸 할 수 있었던게 너무나 좋았다는 말이 꽤 묵직하게 내 마음 속에 내려 앉았다. 


유영국 WORK 1999


그의 마지막 작품. 1999년 WORK. (방구석 미술관2에서는 <상승하는 최후의 산>이라고 조원재 작가가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더 뜨겁고 아름다워 보였다. 상승하는, 최후의 산. 제일 상단에 보이는 하얀 삼각의 산이 책 속에 나온 말처럼 유영국의 생과 혼이 위로, 날아 오르는 느낌처럼 보여서였다. 


원래도 유영국 화백의 그림을 너무 좋아했고, 방구석 미술관 팟캐스트를 통해 이미 유영국 스토리를 들은바 있다. 하지만 책을 통해 이렇게 정리하면서 보니 그의 그림을 더욱 사랑하게 됐다. 앙리 마티스의 색감과 칸딘스키의 기하학적 구성, 폴 세잔의 집요한 관찰력을 다 합친 능력치 이상으로 '자유로운 예술'을 사랑했던 그의 작품을. 


#유영국 #한국추상미술의선구자 #방구석미술관2 #산의화가  




* < 유영국미술재단> 홈페이지 : http://www.yooyoungkuk.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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