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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BR Mar 03. 2022

제미 할아버지와의 첫 만남

어엿한 15세, 그와의 인연에 껴 있는 한 청순한 여인 

고작 일 년 새에 많이도 늙고 야위었다. 훅 간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일 년 전만 해도 정정하다 못해 팔팔해서 한 스무 살까지 살겠다 싶었던 녀석이었는데. 우리 집 15세 할배 제미의 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다. 심상치 않은 건 기침 소리 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안 하던 짓을 한다.


재택근무를 하며 노트북 앞 워드 파일과 PPT 앞에서 씨름하고 있는 내 의자 밑에서, 나를 올려다보면서 굳~~ 이 여길 기어 올라와 파묻고 있겠다며 낑낑거린다. 모른 척할 수 없을 정도로 애처롭고 시끄럽게. 한 손으로는 마우스 질을 한 손으로는 작은 머리통 여기저기에 올라온 물혹을 스칠세라 조심히 그의 몸통이며 궁둥이를 쓰다 듬는다. 


제미 할아버지와의 처음 만났던 스토리까지 거슬러 올라가려면 떠오르는 처자가 하나 있다. 대학교 3학년 때였다. 내 인생에서 절대 잊지 못할 그녀를 만났던 게.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예쁘게 생기고 애교가 많은 아이였다. 새까맣고 커다란 눈동자는 꼭 방울 같았다. 말도 어찌나 잘 듣고 순한지 그저 사람 말이라면 뭐든 찰떡같이 알아 들었다. 그야말로 신통방통 했다. 우아하게 식탐까지 없었다. 나는 그 예쁜 아이를 보기 위해 늘 선배들의 아지트에 갔다. 그녀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육포를 내어 주고 산책을 시키고 한동안 안아 주다가 아쉬운 눈길로 그녀를 놓아주곤 집으로 돌아 가곤 했다. 그녀의 이름도 내가 지어 주었다.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름은 '청순'이었고 성은 '캐'였다. 


캐청순은 그렇게 나와 선배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우리의 마음속에 단단히 박혀 버렸다. 청순 이를 사람에 비유하자면... 그래, 핑클 같았다. 하얀 피부를 가진 성유리와 섹시한 이효리를 섞어놓은 것 같았다. 수캉아지들은 물론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그녀. 요염하고 사랑스러운 애교란 저런 거군. 세상 날 예뻐해 줄 사람은 너뿐이야, 그러니까 날 떠나지 않을 거지?라고 말하는듯한 커다랗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내 손에 그 조그마한 얼굴을 부비부비 하던 그녀. 난 정말 사랑에 빠져 버렸다.


그녀는 마음 아프게도 이곳에 올 때부터 유기견이었고 선배들이 데려다 임시로 키우고 있던 강아지였다. 선배들은 내가 청순이를 데려가 키우길 원했고 나 역시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정숙씨와 삼진씨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펼쳤다. 아마도 그게 내 인생 첫 PT이지 않았을까.


우선 우리 예쁜 청순이의 사진을 프린트하고 이 아이가 얼마나 착하고 말 잘 듣고 놀랍게도 배변까지 잘 가리며, 우리 가족의 행복에 이바지할 수 있을지 A4용지에 예쁘게 꾸며 프린트했다. 집에 저지레를 할지도 몰라 안된다는 삼진씨의 완강한 반대를 꺾어내는 동안, 나는 결국 비보를 접하고야 말았다. 


"청순이가 발정 나서 집을 나가 버렸어."


사춘기를 맞이해 항상 외로워하던 청순이가 기어이 일을 친 것이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나는 그만 펑펑 울어 버렸고, 너무 서글프게 울던 딸을 바라보던 정숙씨는 그만 따라 울고 말았다. 청순이 실물 한 번 본 적 없으면서. 한동안 시름시름 앓던 나를 보다 못한 한 선배가 어느 날 나를 불렀다. 


"신도림에 있는 동물병원에 예방접종 주사 비용만 결제하면 데려갈 수 있는 강아지가 있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다 하네. 한 번 보러 가자."


"아니, 선배. 나는 꼭 청순이어야 해."


"그럼 얼른 데려가지 그랬어."


"아니 내가 그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선배가 뭘 알아..... 우엉...."


그렇게 나는 선배에 손에 질질 끌려 신도림으로 향했다. 그렇게 그와의 첫 만남은 신도림에 있던 한 동물병원에서 이루어졌다. 태어난 지 이제 45일 되었다는, 하얗고 포슬포슬한 털로 뒤덮인 오동통한 엉덩이. 그는 사선으로 누워 날숨과 들숨으로 들썩 거리는 작은 몸을 앙증맞게 뽐내며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아 귀엽네... 하는 순간 청순미의 반도 안되던 크기의 조그마한 아이가 슬쩍, 쪼끄만 눈을 떴다. 세상은 많은 종류의 활 발견들이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비글이 아닌 말티즈가... 종이 의심스러울 정도의 활발함과 터프한 생기를 뽐내며 먹이를 향해 돌진했다.


그의 거친 눈빛과 넘치는 식탐과 그걸 지켜보는 나.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임을 예감했어야 했지만, 무릇 강아지란 건강하고 활발한 게 최고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슬며시 비집고 들어왔다. 


"아이가 참 건강하네요, 아주 많이 활발하고요."

"그렇죠? 여기에서도 독보적으로 활발한 녀석입니다. 허허 그게 최고죠."


그렇게 그를 집까지 데려오던 길, 활발이 넘치는 아이의 시끄러움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기라서 그럴 거야 아기라서. 털 날리는 거 질색이라던 삼진씨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벌인 무모한 결정이었다. 나는 막무가내로 그를 데리고 들어가 내 방에 풀어놓았다. 


"낯선 곳에 처음 가면 사료를 잘 안 먹을 수도 있어요. 그럴 때 잘 먹을 수 있도록 따뜻하게 안심시켜 주세요."


라는 선생님 말씀이 무색하게... 그는 우사인 볼트 뺨치는 스피드로 물에 뿛린 사료를 먹어 치우고 나를 보챘다. 그리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더 줘.


아이는 첫 만남부터 익숙한 듯 삼진 씨의 볼록한 배를 밟고 지나가며 존재감을 뽐냈다. 삼진 씨의 반응은 황당했다. 그렇게 털 날린다며 청순이의 영입을 반대했던 그는 세상에서 그 말괄량이를 가장 사랑하는 지지자가 되어 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청순이도 그냥 밀어붙여 볼 걸. 하지만 그녀는 이미 떠나갔고 우리 집엔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비글미를 뽐내는 말티즈, 제미(애칭 : 젬제미)가 있다. 


매 해 나는 삼진 씨의 입에서 그렇게 애정 어린 달콤한 말들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다. 내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3세 이전 시절에 혹시 그의 저런 달달한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걸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손주를 안겨드리면 저런 모습이실까. 미안해 아빠. 제미가 열다섯 해 가까이 살아가는 동안 아빠의 손주는 없었으므로 제미는 그의 가장 최애로서의 운 좋게 사랑을 온전히 누리고 있다. 할아버지가 된 지금까지도.



그는 잦은 산행과 산책으로 헬스 트레이너 같은 근육을 보유하고 있으며 눈은 여전히 작고 주둥이는 길게 튀어나와 있다. 못생겼지만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나의 유일한 동생. 친동생들이 거의 그러하듯 제미 역시 누나 늘 (개)무시 할 때가 많지만 늘 싸우면서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젬제미를 부르고 있고 지친 하루의 끝에 말티즈라고 믿기지 않는 그 무거운 몸을 끄영차 안아 들고 고개를 파묻곤 한다. 긴장이나 스트레스로 심장이 두근두근 거릴 때, 젬제미의 온기가 전해지면 나는 조금이나마 안심해버린다. 그는 3분도 안지나 내 품을 벗어나려 할 테지만. 우리는 이제 미우나 고우나 가족이니까.

그의 마지막을 나는 상상할 수가 없다. 아니하기 싫다. 요즘 제법 기침소리가 80세 이상의 노인스럽다. 그제야 우리는 제미의 나이를 실감한다. 폐가 안 좋아진 걸까. 세상에서 정숙씨만을 가장 안전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이 녀석. 누나를 애증 하는 이 녀석. 먹는 것과 산책 나가는 것을 환장할 정도로 좋아하는 이 녀석. 아니, 이제 이 녀석이라 부르기엔 조금 미안해진다.


그와의 이별이 그렇게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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