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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의개미 Nov 07. 2021

호사스러운 가을

가을을 겁나 좋아하는 것 같다는 깨달음.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겨울을 좋아한다고 답하고 다녔다


가을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은 이유 해부

1. 여름이나 겨울보다 짧고, 점점 짧아지고 있으니까 좋아하면 다른 계절보다 손해인 거 같아서.

2. 인기 많아서, 금방 사라질 것이라서. 보답받지 못할 짝사랑을 하는 거 같아서.

3. 싫어할만한 구석이 없이 완벽해서. 여름이나 겨울처럼 감수할 만한 게 없어서. 자고로 좋아함이란, 취향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포함해야 하므로.


써보자면 이렇지만

사실 가을을 좋아한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저런 마음들을 내재화한 채 겨울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어쩐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 아니라 가을이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는

정동의 가을, 마지막 밤.


내일은 비가 오고 본격적으로 추워진다고 한다


나는 아름다운 가을을 보면 2012년 가을 만큼이나 아름답다거나  2012년 가을보다 아름답다고 말하곤 했다.


그때 캠퍼스의 가을은 너무나 선명해서

단풍은 빨갛고 노란 물이 드는 게 아니라 실은 초록색이 빠지는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으니까.

시린 가을 하늘이라는 노랫말을 처음으로 실감했으니까.


그다음의 가을들은 그닥 멋지지 않았다고,

2012년의 가을엔 첫사랑을 하느라고 풍경에도 콩깍지가 꼈던 모양이라고

매년 가을마다 생각했지만

그렇게 멋짐을 매해 기대하고 비교했던 계절도 실은 가을밖엔 없다.

올해도 친구들에게 그렇게나 단풍 구경 가자고 졸라댔다.


10월의 마지막 주말에는 할머니가 내게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가곡을 불러줬다.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이 가사가 할머니 마음을 때린다고 했다.

할아버지만 아프지 않으면 엄마가 지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텐데 미안한 마음이 들다가도

이 노래가 떠올라

더 바라면 죄가 된다는 마음으로

가진 것에 감사하며 기도한다고 했다.


나는 매사 감사하지도 못하고

기도도 하지 않아

대신 가진 것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불안해하지만


엊그제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개미가 문화부에 가다니, 앞으로의 기사가 기대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까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어깨를 으쓱해보고,

앞으로라도 기대에 부응해보려고 눈을 부릅떴더니

보이는 것은 가을과 내가 가진 불안이었다.


가을은 내 발밑에 머리 위에 있었고 바람에 날라다녔다.

좋은 걸 좋다고 하자고

아름다운 걸 아름답게 받아들이자고

불안은 불안으로

인정하자고

다그치기보다는 나를 한번 달래보았다.


그럼 불안을 어디 한번

감당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보자는 결심을 해보는 가을의 마지막 날.


내일은 비가 올 거고, 날은 차질 거고

우산과 코트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미리 알고 있으면 다가오는 계절의 나와 잘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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