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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tthew Sep 17. 2021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를 읽고

방학 기간 중에 다음 학기 과제를 미리한다고 마르틴 부버의 책을 읽고, 감상문까지 적어 놓았다. 읽기 어려운 책이라고 투덜대며 읽었는데, 다른 과목을 듣게 되어 독서감상문만 남았다. 학교 과제로 제출했으면, 교수님이라도 읽었겠지만, 수강 취소하는 바람에 아무도 안읽은 글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여기에라도 올려본다. 어차치 읽는 이 없는 건 똑같겠지만 ~ ㅎ



“줄무늬 애벌레가 뛰어든 더미 속에는 이제 친구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동료들이란 하나의 위협이요, 장애물일 뿐이었으며, 그는 그들을 발판으로 삼고 기회로 이용할 따름이었습니다.” 트리나 폴러스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동화를 통해 위에 아무 것도 없는 높은 탑을 서로 밟고 기어오르는 애벌레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얽혀있는 애벌레들처럼 수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지만,  의미없는 목표를 위해 서로를 이용하며, 서로 짖밟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팀장님은 사람을 역할로 보는 것 같아요.”  5~6년 전에 한 팀원으로부터 받은 피드백은 충격이었다. 사람들을 대할 때, 친절하고 예의있게  ‘인격적으로’ 대하려고 노력해왔는데, 역할로 사람들을 여기는 것 같다는 팀원의 피드백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했다. 나 또한 애벌레들처럼 다른 사람을 인격이 아닌 수단으로 여겨온 것은 아니었을까? 오랫동안 프로젝트 관리자로서, 조직의 리더로서 일하다보니 은연 중에 사람들을 대할 때에 인격이 아니라 개발자로, 기획자로, 디자이너라는 역할로 사람들을 대해 온 것이 아닌가 반성하게 만들었다.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는 읽기에 버거운 책이다. 어려운 단어가 사용되지 않은 문장마저도 글을 읽으면서도 무슨 뜻인지 한참을 생각하게 만든다. 저자의 의도와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워 피상적인 이해에 머물었지만,  얕은 이해일지언정 책 중간 중간에 만나는 몇개의 문장만으로도 내 안에 깊은 울림을 만든다.  ‘나와 너’는 관계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전에 조직신학 수업을 통해 ‘대화적 인격주의’라는 낯선 철학용어로 접한 책이지만, 실제로 책을 읽으며 “나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와 너’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 아니면 ‘나와 그것’의 관계로 상대방을 대하고 있는가?”라는 직접적인 질문으로 다가왔다.

 부버는 사람의 근원어, 즉 근본이 되는 말이 ‘나와 너’, ‘나와 그것’ 두 개의 복합어라고 말한다. 왜 ‘나', ‘너’, ‘그것’과 같은 개별어가 아니라, 복합어가 근원어일까라는 질문이 떠올랐지만, 책장을 넘겨가며 개별어들이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므로 그 근원이 되는 말은 복합어라는 것에 어느덧 수긍하게 된다.  부버는 관계라는 창을 통해 이 세계를 바라본다. 그동안 나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대표되는 이성을 통해 존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부버는 우리 존재의 근원이 우리가 맺는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한다. 지난 2년 반동안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인간의 존재의 근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있음을 배웠다. 나와 너의 관계를 통해서만 나의 존재됨이 의미있다는 부버의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부버는 사람의 근원어 속에서 나와 관계를 맺는 ‘그것’과 ‘너’를 구분하며, 관계성을 파헤친다.  우리가 대상물로 소유하거나 지각하거나 의식하는 것은 ‘그것’의 세계이지만, ‘너’라는 것은 어떤 것으로도 한정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부버는 내가 경험하는 것조차 ‘그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각자의 경험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며,  사람에 대해서도 우리가 경험한 것을 토대로  그 상대방을 인식한다. 우리는 수많은 관계의 깨어짐을 주변에서 보고, 직접 겪고 있다. 이러한 관계의 문제는 어쩌면 우리의 대부분의 관계가 어쩌면 나의 필요를 위해 수단으로 상대방을 여기는 ‘나와 그것’의 관계이기 때문은 아닐까? 나의 인식과 경험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나의 생각을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절대화 시키며, 상대방을 ‘너’가 아닌 ‘그것’으로 대하기에 수많은 관계의 문제가 생기지 않나 생각해본다. 나도 역시 상대방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인격적’으로 대한다고 착각하며,  ‘나의 너’의 관계가 아닌 ‘나와 그것’으로 사람들을 대해온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부버의 지적처럼 나의 경험을 토대로 상대방을 ‘그것’의 세계로 인식하며 우리의 경험이나 그때 그때의 감정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있었다.  

 부버는 나와 마주보는‘너’라는 존재는 “이웃없이도 저 자신만으로 전체를 이룰 수 있는자, 즉 ‘너’요. 하늘을 향해 머리를 우뚝 쳐들고 온 천하에 군림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너’는 하나님의 형상를 닮은 존엄성을 가진 존재이다.  우리가 ‘너’를 ‘그것’으로 인식하고 목적이 아닌 어떤 역할이나 수단으로만 여길 때,  우리는 ’너’라는 존재의 존엄함을  놓칠 뿐 아니라, ‘너’와 관계를 맺는 ‘나’마저도 존엄함을 잃게 하는 것이라고 부버는 말한다.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너’가 존재성을 갖듯이, 너의 상대인 나 또한 너와의 만남을 통해 나의 존재의 본질이 만들어진다. 너라는 존재가 존엄하다면, 너와 관계를 맺는 나 또한 존엄성을 가진 존재가 된다. ‘나와 너’의 관계에서만 ‘나’는 인격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고 주체성으로 자기를 인식할 수 있다. “온갖 참된 삶은 만남이다”라는 부버의 말처럼, 관계가 나를 형성하며, 그것이 참된 삶이 된다.

 부버는 나와 너의 만남은 은총이라고 말한다. 일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만남이 ‘나와 너’의 인격적 만남이 될때,  그 만남은 우리에게 한없이 큰 선물이 된다. 가장 큰 만남은 ‘영원한 너’가 되시는 절대자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일 것이다.  로완 윌리엄스는 ‘제자가 된다는 것’에서 우리가 정체성을 갖는 이유가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증인이 있기 때문”이며, “절대자이며 실재인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참된 삶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부버는 참된 관계를 연결해는 사랑에 대해 말하며, 사랑은 감정이 아닌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랑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는 것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을 보이셨다.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우리에게 더할 수 없는 은총이다. 하나님께서 보이신대로, 우리에게도 이런 사랑의 관계가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나와 너’의 관계로 대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상대를 대하는 삶의 자세이고, 상대에 대해 나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그 사랑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삶 속에 넘치게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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