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에 더욱 절절히 새겨지게 만드는 책
고등학생 때의 나는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철저히 답습한 그야말로 적극적으로 아무 생각 없는 학생이었다. 국어 교과서를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시와 소설의 의미를 그저 교과서와 참고서가 알려주는 대로 외워 이해하는 그런 학생이었다. 대학 졸업 후에서야 한국의 근대문학에 관심이 생겨 조금씩 공부해가며, 나는 2-30년대 문인들의 글에 심취하게 되었었다. 호시절이라는 단어가 적절할지 약간 망설여지지만- 적어도 4-50년대보다는 '호시절'이었던 2-30년대 문인들의 글엔 새 시대를 향한 열망과 신 문물에 대한 동경, 그리고 세련됨이 엿보였었다. 적어도 그 시절의 글들에서는 현실에 대한 열패감을 넘어선 어떤 희망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그다음 시대, 4-50년대의 글들엔 어쩐지 잘 호감이 가질 않았었다. 시대를 관통하던 우울함, 폐색감이, 그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던 열패감의 시대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영화 <동주>와, 이 책 <시인, 동주>를 읽고 나서 나는 더 이상 그 우울함과 폐색감을 모른척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시절에 한글로 작품을 쓴다는 것의 의미, 그 마음을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겠는가.
영화 <동주>가 동주와 몽규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면, 책 <시인, 동주>는 그보다 더 넓은 범위의 시인 윤동주의 지인들에 대해 아우른다. 시인의 친구, 시인의 가족, 시인의 후배. 학창 시절의 이야기. 분단으로 인해, 그간 우리 사회에서 월북한 작가들, 사상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금지되어왔기 때문에 시인 윤동주의 삶에서 뭉터기로 빠져있던 부분을 채워가며 비로소 온전히 윤동주 시인에 대해 제대로 그려가는 책이었다. 그 몇 달 전, 친구 덕분에 안소영 작가님과의 만남 행사에 갔던 적이 있는데 그때 이 소설 (소설이라 부르기엔 좀 애매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들을 분석했는지, 또 얼마나 열성적으로 시인, 동주를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었더랬다. 그러한 작가님의 노력을 알고 난 후에 책을 읽으니 괜히 더 감상적이 되어서 사실, 책 읽는데 조금 힘들었다. 이제는 나보다 어린 시인, 영원히 이십 대일 시인, 아무도 그러한 시대에 살기 원치 않았겠지만 시대의 광풍에 휩싸여 그러한 시대의 폭력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만을 살았던 시인. 윤동주 시인의 이야기를 힘들지 않게 읽어낼 수 있는 한국인은- 없지 않을까.
그들의 삶은 문학으로 인해 더욱 빛나고 있을까,
아니면 더욱 남루해져 가고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덜컥, 걸렸던 이 문장을 읽고- 절대로, 남루하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누구보다 빛났고, 지금도 빛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감히 내가. 소와다리 출판사에서 김소월 시인의 시집 초판본을 보내주었을 때 함께 들어있던 엽서 뒤쪽에 적혀있던 문구에 회사에서 울컥, 하고 눈물을 흘릴 뻔했던 적이 있었다. "제 詩는 사랑을 받고 있나요. 그때쯤은 獨立을 했을런지요." 독립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떠나버린 그 시대의 시인들, 문인들, 사람들. 그 모든 이들에게 외치고 싶다. 남루하지 않았다고. 아무것도 아니지 않았다고. 그간 모른척해왔던 4-50년대를 향해, 이제 살포시 한걸음 더 나아가야겠다. 마주하기. 그것으로부터 부끄러움과 죄책감으로부터의 탈출은 시작될 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