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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숲 Dec 10. 2017

김승옥의 감수성.

이제는 다르게도 읽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김승옥의 [차나 한 잔] 을 읽었다. 60년대의 문장이라기엔 지나치게 세련된 문체로 그려진 네 개의 작품들. 너무나도 급변하던 사회. 해방과 전쟁이라는 폭력적인 역사의 끝에 다가온 급속한 산업화의 사회에서 나는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던 때. 익명적 존재로서 모두가 고독해져 버린 60년대 서울의 사람들의 모습을 짧은 단편에 예리한 문장으로 그려낸 네 개의 단편이 실려있는 작은 책. 금세 읽었지만, 오랫동안 생각하게 만든 작품들이었다. 




 <김승옥 소설에 나타난 여성 인물의 구현양상(2003, 조윤영)>이라는 논문에 보면 그의 소설 속 가부장제하의 여성의 모습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난다고 분석하고 있다. 가장에게 예속된 존재로서의 여성,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서의 여성,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 이 책의 첫 번째 작품 <서울의 달빛 0장> 에서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 '한영숙'은 '남성에게 예속된 존재로서의 여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아내와 이혼하고 감당도 못 할 자동차를 산 뒤 '나는 차가 아니라 여자가 필요했음'을 느꼈다는 장면에서는 여자를 단순히 '소유'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혼하고 하나의 가정을 이루었음에도 아직 부모와 형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성을 단순히 자동차와 같이 소유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유아적 남성의 모습을 아주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어서 약간은 불쾌함이 느꼈다. 


두번째 작품 <야행>도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는 치부로 숨겨지기만했던 여성의 성적 욕망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이 주목할만한 부분이긴 했는데, 그러한 욕망을 가지고 있음을 여성이 인지하는 것이 남성의 폭력(강간)으로 인한 수동적 산물이었다는 점이 여전히 시혜적 입장에서의 젠더관점을 보여주고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한 우리 국민의 태도에 대해 야유를 한다는 보물찾기 쪽지를 숨겨놓고 소설 언어의 살을 입힌 것"이라는 작가님의 인터뷰를 나중에서야 보고 소설을 다시 읽어보니 한국이라는 약소국의 입장, 욕망과 부조리, 그 반대편의 도덕성 대립의 모습이 현주라는 화자의 내면을 통하여 읽히는 느낌도 들어서 역시, 소설은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하기 읽힐 수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나머지 두 작품 <차나 한 잔>과 <서울 1964 겨울> 모두에서 보이는 '타인의 일에 깊게 개입하지 않으려 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한편으로는 이기주의이자 회피적인 성격으로 읽힐수도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두 소설 모두 등장인물들의 대화에서 내면을 읽어내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었는데 특히 <차나 한 잔>에서 그려진 미묘한 밀고 당김의 부분이 재미있으면서도 의뭉스러운 상대방의 마음에 주인공에게 이입되어서 덩달아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앞으로 다가올, 아직 확인되지 않은 날들이 무서워져서 울음이 터질뻔한(p.102)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물질화되고 기계화된 세상에 제대로 하나의 생활인이 되지 못할까 두려움에 떠는 고독한 현대인의 모습을 확인하게 되어 지금의 나의 위치에 대해, 이 불안함에 대해 나까지 덩달아 울음이 터질것 같은 느낌이었다. 삶은, 고독하고 슬프구나.




지금까지 한국 문학사에 획을 그은 남성 작가들의 작품들에 의외로 여성비하, 여성혐오적 태도를 보이는 작품들이 많은 것 같다. 아마 지금까진 그러한 부분은 모른체 했거나, 혹은 알면서도 별 것 아니라고 치부했었을터다. 하지만 세상은 변화하기 시작했고, 앞으로 그러한 작품들은 '다시 읽기'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시대적 정황에 대해 이해하는 한편, 작품의 '한계'에 대해서도 명확히 짚어낸다면, 더 놓은 문학이 탄생할테니까. 강을 건너버린 난 앞으로 그러한 부분에 언제나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할 수밖에 없을것이다. 유난스럽다는 말을 들어도, 시끄럽다 욕을 먹어도, 강을 건너버렸으니까. 잊지말자. 유난스럽고, 시끄럽게 외치고나서야 세상은 바뀔 수 있었음을. 여성이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 여성이 투표를 할 수 있게 된 것, 그러한 것이 모두 시끄럽게 소리치고, 유난스럽고 극성맞게 요구했기 때문에 겨우 쟁취할 수 있었다는 것을.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달라지고있다. 굵직한 문학상 수상자들도 이젠 여성 작가가 훨씬 많고, 독자들은 여성화자의 목소리로 그려진 작품을 더 많이들 찾고 있다. 그러나 나는 더 많은 여성화자들의 목소리로 그려진 더 많은 여성 작가들의 글을 읽고싶다. 그리고, 부족한 젠더인식을 강화한 더 좋은 문학작품의 탄생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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