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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죽는 일.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

by 쾌주


누군가 죽었을 때 우리는 흔히들 떠났다거나 돌아가셨다는 표현을 쓴다. 이는 한국어에서만 비롯되는 현상은 아니라 영어에서도 gone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즉 죽음은 가는 것, 아니 가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남겨 놓고 어디론가 가버린다. 그리고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돌아간 것일까. 게다가 죽은 사람의 육신은 우리 눈앞에 그대로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던 누군가라는 것은 결국 그의 신체가 아니라 그 속에 깃들어있던 무언가인 모양이다. 영혼, 의식, 마음, 외 기타등등.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나 윤회, 혹은 영혼이 있다 없다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학문적으로 이 주제에 대해 접근하고픈 생각은 없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사실 가끔은 궁금하지만 여기에서 다룰 주제는 아니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저 나의 오빠들과 아빠가 무사히 잘 돌아갔을까 하는 것이다.

내게는 두 명의 오빠와 한 명의 아빠가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없다.
나의 오빠들은 성인이 되기 전 그 명을 달리했다.
아빠는 주민등록상의 만 일흡 두 번째 생일을 보름 앞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실제 나이로는 일흔세 번째 생일이었다.


60대 후반이 된 아빠는 나이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일을 그만두시게 됐다. 이미 몇 년 전부터 6개월 단위로 계약을 하고 있었고, 최근에는 일을 하다가 어떤 일이 생겨도 회사 측에서 책임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3개월 단위로 계약서를 다시 쓴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심지어 엄마와 나의 동의서까지 받아야 했기에 아빠는 시무룩해하셨고, 나와 엄마 또한 시무룩해졌다.
아빠는 일을 그만두시자마자 순식간에 쇠약해지셨다. 살이 빠져 몸은 말라갔고, 온몸이 가렵다며 피가 날 때까지 긁기도 하셨다. 소문난 병원을 여기저기 다녀봤지만 별 소용없었다. 갑자기 살이 빠지자 다리에 힘이 없는지 걸음걸이도 휘청거리셨고, 휴대폰을 보면서 걷다가 넘어지신 적도 있었다. 엄마와 나는 수시로 잔소리를 해댔지만 아빠의 삶 내내 대체로 그러했듯 딱히 귀담아듣지는 않으셨다.


어느 날, 아빠는 욕실에서 넘어지셨고 입원하셨다.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했다. 나는 전화 너머의 아빠에게 화를 냈다. 왜 넘어졌냐고, 뭘 어떻게 하면 그 좁은 욕실에서 넘어질 수가 있냐고. 아빠는 힘없는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날 밤, 아빠는 침대에서 떨어지셨다. 큰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의사가 내게 통화를 요청해 왔다. 다만 수술 후를 보장할 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수술을 하지 않으면 바로 돌아가실 것이라 수술을 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엄마와 내 의견을 물어왔다.

그날 취업 후 서울에서 살던 나는 일단은 회사에 있기로 했다. 당장 내가 병원으로 간들 달라질 게 없을 상황이었다. 팀원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나를 다들 모른 척해주었다.

아빠는 8시간에 걸쳐 수술을 받았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등에 큰 나사를 8개나 박았다고 했다.

아빠는 이틀 후 정신이 들었지만 엄마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 달이 지나 일반 병실로 옮겨진 후에도 아빠는 많은 시간을 잠든 채 보냈고, 종종 엄마를 알아보지 못했다. 섬망인지 치매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엄마의 만류로 한 달 후에나 아빠를 만날 수 있었고, 그 한 달 내내 겁에 질려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한 말이 뭐였더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화를 냈었다. 그게 정말로 마지막이 될까 봐 너무너무 무서웠다.


코로나 검사를 하고, 비닐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병실에 들어간 나는 아빠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해 있는, 너무나 낯선 모습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아빠, 하는 나에게 아빠는 찡그리듯 웃으며 딸, 이라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셨다. 나는 울음이 터져 나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목에 메어 제대로 된 단어가 입에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후에도 매번 아빠의 얼굴을 보는 순간 울음부터 터트렸고, 영상 통화를 할 때도 꺽꺽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 아빠는 울지 말라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나를 달래주려 하셨고 엄마는 매번 이렇게 울기만 할 거면 이제 병원에 오지 말라고 하실 정도였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 겨우 아빠를 보는 게 일상이 될 무렵, 아빠는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때까지도 아빠는 가끔 엄마를 못 알아보셨지만 나를 못 알아보신 적은 없었다. 리 예쁜 딸. 아빠의 속삭임이 여전히 귀에 또렷이 들려온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기차역에서 나는 갑작스레 아빠를 떠올렸다.

내가 고향에 갈 때면 아빠는 늘 기차역으로 나를 데리러 오셨다. 내 짐을 받아 들고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잘 있었냐고 묻곤 했다. 아빠의 손은 늘 따뜻했다. 아빠는 다시 서울로 갈 때도 반드시 역까지 데려다주셨고 다음에 봐, 딸. 도착하면 전화하고.라고 말씀하셨다.

아빠가 병원에 계시는 동안에는 한 번도 역에서 아빠가 없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아빠를 만나러 가야지,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없다. 나를 데리러 오는 이도, 배웅해 주는 이도. 집에 가면 엄마가 반겨주시겠지만 기차역에서는 영원히 혼자가 된 것이다.



아빠와 예전에 같이 찍은 사진을 본다. 머리카락이 반쯤 벗겨져 있고 안경을 쓰고 있고 평범한 체형이다. 내가 좋아하는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이다.

하지만 현실 속의 아빠는 점점 작아졌다. 머리카락도 살도 자꾸자꾸 빠져나갔다. 병원에 있는 동안 아빠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그 모습이 너무 선명해서, 아빠를 떠올릴 때면 괜스레 속상하다. 그런데 세상에는 아빠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정말로 많았다. 강조하고 싶으니까 한 번만 더 말하겠다. 정말로,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기억이란 희미해진다. 망각은 정말로 축복인 걸까. 대체로 축복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고, 오빠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이렇게 잊히는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참외를 보면 아빠를 떠올리고, 택시를 봐도 아빠를 떠올린다. 하지만 참외에 대해서도 택시에 대해서도 다른 기억이 생길 것이다. 내 마음은 희미해지지 않는다. 지금도 오빠의 사진을 보면 눈물이 난다. 나중에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기억은 분명히 희미해질 것이다. 그게 싫어서 아빠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직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은 것들을 기록해두려 한다.


오빠가 죽은 13살 이후 내게 있어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곁에 있던 사람이 글자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나 자신 또한. 나는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데. 그 사실이 너무 무섭고, 견딜 수 없어서 숨이 턱턱 막혔다. 공포를 이겨내지 못해 흐느껴 울다가 겨우 잠드는 날이 이어졌고, 필사적으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 라디오를 켜놓고 잤다. 침묵과 어둠이 함께 찾아올 때면 내가 당장이라도 죽어 사라질 것만 같았고, 그 생각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도 나는 죽음이 무섭다.
하지만 이런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기에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발버둥도 치고 현대 의학의 도움도 받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는데 익숙해져 이제는 라디오를 틀어놓지 않아도 잠들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종종 숨이 막힌다.

다만 이제는 알 수 있다. 나는 죽음 이후에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곳은 오빠들도, 아빠도 간 곳이다. 그들이 여전히 거기 있을지 혹은 또 어디론가 가버렸을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주 조금은 두려움이 가시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정말로, 아주 조금.


그렇게 나는 죽음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다지 원하던 바는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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