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 태어난 자식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지방 도시는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곳이다.
아빠는 그 인근의 작은 도시에서 1940년대 말,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셋, 아래로는 여동생이 하나, 남동생이 하나.
시대도 시대였고, 그 지방 고유의 특성에 힘입어 아빠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자가 되었고 결혼하기 전에는 형제에게, 결혼한 후에게는 엄마에게 그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을 받지 않는 사람은 단 하나, 나뿐이었다.
*
없는 집안답게 우리 집은 제사를 중요시 여겼다. 아빠는 장손이었고,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거의 매달 제사가 있었다.
12시가 되면 졸린 눈을 비비며 어른들 중 한 명에게 잡혀 있거나, 구석에 숨어서 책을 읽고 있던 나를 아빠가 부른다. 집안은 조용하고 조금 열린 현관문을 통해 스산한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제주인 아빠가 잔을 치고, 작은 아빠가 다음 잔을 친다. 그리고 세대를 넘어와 아랫 세대에서 가장 먼저 잔을 치는 것은 바로 나다.
나는 밀양 박가 참의공파의 28대손으로써 잔을 올리고 절을 했다. 절을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뭔가를 빌었다. 어릴 땐 뭘 빌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고, 나이가 든 후에는 취업이 잘 되게 해달라거나 로또가 되게 해달라고 빌었던 것 같다. 아빠는 술을 드시지 않았기 때문에 음복술을 따로 마시진 않았고, 바로 상을 치운 후 식사 준비를 했다. 이때도 나의 자리는 아빠 바로 옆이었다. 편식이 심한 나를 위해 엄마는 콩나물국을 따로 챙겨 주셨고, 아빠는 닭고기와 동그랑땡이 담긴 접시를 내 앞으로 놓아주셨다.
*
아주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가수를 좋아했던 나는 수능을 치고 나서 머리를 새빨갛게 물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너무 소심했고, 1 지망으로 원했던 대학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살이 되어 여러 가지 자유를 누리고 나니 새빨간 색은 아니더라도 뭔가 해보고 싶어 졌기 때문에 부모님의 동의 하에 등까지 오던 긴 머리를 샛노랗게 탈색했다. (사실은 동의를 구했는지 허락을 받았는지 내 맘대로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동네에 있는 미용실에서 싸게 했기 때문에 엄마에게 얘기를 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학교의 친구들은 200미터 밖에서도 나를 찾을 수 있다며 좋아했고, 고지식한 전공 교수님은 학생은 머리를 왜 그렇게 했냐고 물었다. 아빠가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이 머리를 한 채 친척 결혼식에 참여했고, 내 머리를 보자마자 아주 못마땅해하면서 너희 아빠가 이런 머리를 하게 허락해 줬냐면서 흥분하던 네 명의 고모들에게 아빠가 했던 얘기는 똑똑히 기억한다.
자기 할 거 다 알아서 하고, 공부도 잘하고, 장학금도 받는데 머리가 무슨 상관이냐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라고.
고모들은 모두 입을 떡 벌리며 기가 막혀했다. 특히 막내 고모는 당신이 결혼하기 전에 펌도 못하게 하고 외출도 마음대로 못하게 해 놓고 어떻게 딸한테는 이럴 수가 있냐며 사람이 변했다고 어이없어하셨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새빨간 머리가 아니라 분홍색 머리를 했다. 나는 아빠에게 메신저로 사진을 보냈고, 아빠의 반응은 두 개였다.
'야 니 너무한 거 아니가? 너무 야하다.'
'마스크 벗고 다시 찍어서 보내봐라.'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
나이가 들면서 계속, 그리고 많이 바뀌었지만, 어렸을 때의 나는 보수적인 동네에서 자란 계집아이답게 내성적이었고, 애교 같은 건 약에 쓸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키는 큰 편이었지만 편식이 심해서인지 잔병치레를 많이 해서인지 젓가락처럼 마른 주제에 고집은 엄청났다. 6살 때의 설날 아침, 나는 한복을 입기 싫다는 이유로 내복을 입은 채 울다가 친척들을 맞이했고, 이 이야기는 아직도 친척들 입에 오르내린다. (정확히는 엄마가 자꾸 끄집어낸다.)
빗지도 않은 산발로 아빠의 품에 안겨 입술을 쑥 내밀고 골난 표정을 하고 있는 사진은 우리 집에서 했던 계모임날 찍힌 것이다. 나는 술에 취한 아저씨들이 자꾸 나를 부르는 것도 싫었고, 아빠가 면도를 하지 않은 얼굴을 내게 비벼대는 것도 싫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에 태어난 것이 천만다행이다. 아빠가 나를 예뻐하는 만큼, 나는 더 멋대로 굴었다.
옛날 사람답게 아빠는 집안일은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청소도 빨래도 요리도 설거지도 모두 엄마의 몫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나에게 집안일을 거의 시키지 않았다.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실컷 할 테니 지금 미리 하지 말라는 거였다.
아빠도 나에게 집안일을 거의 시키지 않았다. 하라고 해도 내가 귀담아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물을 갖다 달라거나, 밥을 더 달라거나, 혹은 손톱깎이를 가져오라거나 하는 자잘한 심부름을 내게 시키는 것을 좋아했다. 아빠를 위해 내가 움직인다는 자체가 좋으셨던 것 같지만 반항심에 가득 차 있던 나는 그 어떤 것도 바로 하는 법이 없었다.
아빠가 갖다 마셔.
아빠가 먹을 만큼 퍼.
아빠도 손이 있잖아.
쓰다 보니 얼굴이 붉어질 만큼 부끄럽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저런 것들이 쿨하다고 느끼는 사춘기였다.
아빠는 딸인데 그 정도도 못해주냐거나, 일하고 와서 피곤하다거나, 내가 더 가깝게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어떻게 해서든 나에게 뭔가 시키려 하셨지만 되바라진 아이였던 나는 아빠가 딸한테 그 정도도 못해줘? 아빠랑 나는 사실상 남이야, 나도 공부해서 피곤해, 이젠 아빠가 더 가깝지? 하면서 자리를 피했다. 쓰다 보니 더 부끄럽다.
엄마가 집에 없을 때면 아빠는 늘 나에게 밥상을 차려 달라고 하셨지만 나는 한 번도 이에 응한 적이 없다.
아빠가 엄마에게 행했던 큰 잘못이 있었고,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된 20대 초반 이후 나는 아빠에게 정말로 냉담해졌기 때문에.
아빠와 내 사이가 어느 정도 풀어진 후에도, 나는 정말 단 한 번도, 아빠에게 밥상을 차려드리기는커녕, 라면 한 번 끓여드린 적이 없다.
하지만 아빠는 내가 거절할 것을 알면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딸, 밥상 한 번 차려봐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아빠는 어째서 나의 대답을 뻔히 알면서도 지치지도 않고 매번 나에게 밥을 차려달라고 하셨는지, 그때는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지금은, 밥을 차려드릴 아빠가 계시지 않는다.
독립한 후에 내가 끓인 된장찌개를 부모님에게 대접한 적은 있다. 그 된장찌개를 엄마도 아빠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기에 참으로 다행이다.
*
아빠는 나에게 여자니까 뭔가를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아빠의 자식이었기에 뭔가를 바라신 적은 있었지만 그중 내가 딸이라서,라는 건 없었다. 내가 뭔가를 하고 싶어 하는 자체를 그저 기특해하셨던 것 같다.
내가 오토바이를 타고 싶다고 하자 아빠는 네가 이만큼 커서 운전을 할 수 있게 되다니!!! 하는 표정으로 면허를 따고 오토바이를 내 돈으로 산다면 유지비는 당신께서 대주겠다고 하셨다.
내가 아빠 차를 몰아 보고 싶다고 하자 아빠는 네가 이만큼 커서 진짜로 면허를 따다니!!! 하는 표정으로 당신의 차 키를 내주시며 조수석에 앉으셨다. 하지만 차가 덜컹거리며 아파트의 속도방지턱을 넘은 순간 아빠는 창문 위에 달린 손잡이를 꽉 잡으셨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가벼운 접촉 사고를 냈다. 어디까지나 나의 운전 미숙이었지만 아빠는 네가 툭 튀어나와 있어서 우리 딸이 못 본 것 아니냐며 상대 차의 운전자에게 삿대질을 했다. 나는 그 이후 단 한 번도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
보수적인 지방 도시에서 평생을 지내신 만큼 아빠의 정치 성향은 뚜렷했다. 하지만 내가 진보 출신 대통령을 추모하는 자리에 다녀왔다고 하자 아빠는 네가 이만큼 커서 정치에 관심을 갖다니!!! 하는 표정으로 잘했다고 하셨다.
취업을 해 서울에서 혼자 살게 되면서 나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대선을 앞두고 아빠와 통화를 하며 누구를 뽑을 거냐고 묻자, 아빠는 당연히 X번이지!라고 대답하셨다. 그 사람을 뽑으면 내가 일하는 업계에 안 좋은 영향을 미쳐서 내가 힘들다!라는 내용을 한참 설파하자 아빠는 웃기지 말라는 내용의 답변을 하고는 전화를 끊으셨다. 하지만 막상 선거날이 되자 나 때문에 그 번호에 투표를 하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전화를 걸어오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빠는 정말로 그 번호에 투표를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누구에게도 투표를 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놀러 갔다 왔다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나는 선거철이 되면 아빠에게 이번에도 투표를 하지 말고 놀러 갔다 오시라고 했고, 아빠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하셨다.
*
남들이 보기에 아빠는 보수적인 지방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종종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그렇고 그런 아저씨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아빠에게 있어 나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계집아이가 아니었다. 귀한 자식이었다.
그런 나에게 있어 아빠는 아빠다. 아버지가 아닌,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