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깨끗하고 깔끔함
아빠는 매사에 깔끔했고, 깨끗한 걸 좋아하셨다.
결혼하기 전에는 늘 스스로 셔츠를 다려입고 다니셨다고 엄마는 말하곤 했다. 물론 그 다림질은 결혼 후에는 모두 엄마의 몫이 되었다. 20세기에는 대체로 당연한 일이었다.
아빠는 50대까지도 청바지를 즐겨 입으셨고, 옷을 살 때는 늘 직접 천을 만져보고 사셨다. 엄마는 혼자서 아빠의 옷을 사왔다가 몇 번 핀잔을 듣고 환불한 이후 다시는 아빠의 옷을 사온 적이 없다. 조금이라도 거친 소재는 못 입겠다고 하셨던 아빠가 좋아하시던 옷은 주로 골프웨어였는데, 골프웨어는 대체로 가격이 높은 편이다. 엄마는 옷장을 열어 보면 어느새 늘어나 있는 아빠의 옷을 보며 한숨을 쉬시곤했고,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도 옷을 정리하며 한숨을 쉬셨다. 누구 줄 수도 없는 옷들이 이렇게나 많네, 하시는 엄마에게 나는 아름다운 가게 같은 곳에 기부할 것을 제안했었는데 어떻게 하셨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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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손톱 발톱도 늘 짧게 깎는 것은 물론, 주변의 굳은 살과 큐티클 정리까지 하시는 분이었는데 주 도구가 문구용 커터였다고 한다. 결혼 후 이 광경을 목격한 엄마는 기겁하여 미용 가위 사용을 권했지만 이 또한 결국 엄마의 몫이 되었다. 샤워후 기름진 크림을 손에 잔뜩 바른 아빠가 엄마를 부른다. 손톱 소제하자. 엄마는 한숨을 쉬며 수건을 가져와 아빠의 손 밑에 깔고 손질을 시작한다.19세기에도 당연하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지만 내게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아빠는 약간 결벽증이 있나 싶을 정도로 자주 씻는 분이셨지만 내가 어릴 적 우리집은 연탄보일러를 떼는 집이었다. 매번 다라이에 물을 데워 씻는 것은 한계가 있었기 때문인지 아빠는 거의 매일 대중 목욕탕에 가셨고, 이 습관은 아파트로 이사한 이후에도 쭉 이어졌다.
아빠는 나를 목욕탕에 데리고 가신 적도 있다.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겠지만 재미있는 대조로 인해 나는 그때 일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남탕에는 탕이 세개 있었고, 모두 네모난 모양이었다. 여탕에는 탕이 두개였고 차가운 물은 네모난 공간이었지만 뜨거운 물은 8자 모양의 둥근 탕이었기 때문에 이상하고 신기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의 표현에 의하면 아빠는 나를 "물고 빨았고" 아주 어릴 때부터 별의 별곳을 다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어느 날 아빠를 따라 나갔다 온 내가 좋아하는 음료수에 빨대를 꽂아 쪽쪽 빨면서 집으로 돌아왔고, 엄마는 누가 준 것이냐고 물었다. 나의 대답은 머리가 길고 예쁜 언니가 주었다는 것이었다. 아빠는 나를 데리고 다방에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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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자신의 몸만큼 집 또한 깨끗한 걸 좋아하셨다. 안타깝게도 청소를 열심히 하셨다는 뜻은 아니다. 보수적인 지방 남자 중의 남자였던 아빠는 퇴근하고 집에 왔을 때 집이 더럽혀져 있으면 몹시 언짢아하셨다고 한다. (이것은 아주 점잖은 표현이다.) 그래서 엄마는 집안일을 하며 두 아이를 돌보다가도 아빠가 돌아오실 시간이 되면 허둥지둥 집부터 치웠다고 했다.
하지만 학창시절 나의 방은 엄마의 표현에 의하면 돼지우리만도 못한, 귀신이 열 두 마리도 더 나올 것 같은 소굴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된 후 생긴 나만의 방은 마치 버뮤다 삼각지대 같았다. 모든 물건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내게는 어떤 물건을 쓰고 나서 제자리에 둔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뭔가가 필요해지면 그 물건을 마지막으로 썼던 행위와 장소를 떠올렸지만 당연히 다시 찾지 못하고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네가 잃어버려놓고 왜 엄마한테 물어보냐고 어이없어하셨지만 신기하게도 내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던 물건이 엄마의 눈에는 너무나 잘 보였다. 모든 물건에 일시적으로 카멜레온의 영혼이 깃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내 눈알에 달라붙었거나.
나는 책 읽는 걸 좋아했고 다 읽은 책 역시 절대 제자리에 두지 않았다. 무너지기 직전까지 책상 위에, 혹은 침대 머리맡에 탑을 쌓듯이 올려두었다. 서랍, 선반, 혹은 다른 곳에 있던 모든 물건들은 대체로 책상 위 어딘가에서 나타났다.
우리집에 놀러왔던 한 친구는 내 책상을 보더니 혹시 삼일간 집에서 나가지 않았냐고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며 어떻게 알았냐고 했는데, 친구는 아무말 없이 책상 위에 놓여있던 다 마시고 난 빈 우유곽 세개를 가리켰다.
사춘기가 된 나는 문을 닫고 생활하고 싶어했고, 내 방에 들어오기 전에는 꼭 노크를 해달라고 부모님께 요청했다. 감사하게도 부모님은 이 요청을 들어주셨다. 정확히는 아빠가 내 방문을 벌컥 열 때마다 나는, 노크하라니까!!! 하고 고함을 질렀고 이에 질린 아빠가 노크를 하게 된 것에 가까웠다.
그렇게 내 방에 들어온 아빠의 행동은 늘 같았다. 내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시며 뭐하냐고 묻는 것. 나의 답변도 이후의 대화 양상도 늘 같았다.
"뭐하노."
"보면 모르나."
"방 좀 치아라."
"...내가 알아서 할게!"
한 날은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니 내 책상 위가 말끔하게 치워져있었다. 엄마는 어느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 방을 절대 치워주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지? 하고 갸우뚱 하던 나는 작은 쪽지를 발견했다. 네모난 은색 껌종이에는 달필로 다음과 같은 멘트가 적혀 있었다.
'딸, 공부도 좋지만 방을 좀 치우고 사는 건 어떨까?'
다행히도 내 물건에 손을 댔다고 펄쩍 뛰던 시기는 지난 후였기에 나는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엄마에게 그 종이를 보여주니 기가 막혀 하시며 들려주신 것이 위의 에피소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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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게 된 후 몇 번인가 엄마아빠는 내가 사는 집을 방문하셨다. 늘 나를 걱정하시는 부모님에게 혼자서도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했기에 내 딴에는 아주 열심히, 집을 쓸고 닦고 예쁘게 꾸민 후 부모님을 맞이하곤 했다. 그러나 엄마나 아빠의 눈에는 늘 뭔가가 부족하고 모자라보였나보다. 엄마는 거울을 좀 닦으라거나 수건에서 냄새가 난다는 잔소리를 하셨고, 아빠는 가구의 위치를 바꾸고 싶어하셨다. 부부는 닮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보다. 내가 두분이 사시는 집보다도 넓은 집에서 살게 되었을 때, 아빠는 무척 좋아하셨지만 그 집 역시 만점짜리 집은 아니었다. 그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4층이었고, 아빠는 담배를 피려면 금이 간 무릎으로 1층까지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얼마전 봄을 맞이해 깨끗하게 집을 청소하고, 또 물건들을 정리했다. 아빠에게 보여주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은 조금은 더럽다. 방 구석구석에는 먼지와 고양이털이 뭉쳐서 부쉬처럼 굴러 다니고 이틀 전에 입은 옷은 식탁 의자 위에 걸쳐져 있다. 하지만 아빠가 지금 집에 오셨다면 그 어느때보다도 기뻐하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집은 오롯이 나의 집이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도 있다.
청소를 할 때마다 아빠를 떠올리게 된다면 우리집에 사는 카멜레온의 영혼을 쫓아낼 수 있을까?고민해볼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