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발 도하행 비행기는 1시 반에 출발한다. 아쉽게도 낮이 아니라 새벽이다. 터키여행을 하고자 항공권을 끊었을 때 가격만 봤기에 출발시간에는 신경 쓰지 못했다. 늦은 밤 공항 벤치에는 연결편을 기다리는 이들이 선잠을 자고 있다. 국적도 성별도 상관없이 어둠과 중력을 못 이기고 모두 벤치에 뻗어 있다. 시간이 멈추지 않았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는 듯 드문드문 나오는 안내방송만이 적막한 공간 속에 울려 퍼진다.
체크인하고 나니 탑승 게이트까지 공복으로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다. 식당을 찾았으나 문을 다 닫았다. 그 시간 유일하게 문을 연 곳은 편의점뿐이다. 그곳은 밤을 이겨내 보겠다며 자신들만의 무기를 사러 들어오는 공항 직원들의 핫플레이스였다. 나는 자취생들이 따르는 영웅, 백 선생님의 풍채가 담긴 참치 샌드위치와 짜장밥을 골라 나왔다. 침묵이 감도는 공간에서 식사하려니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고 밥을 비볐다. 짜장밥에서는 짜장 맛이 안 났고, 참치 샌드위치 회사는 백 선생님의 초상권만 산 것 같았다. 배를 채우는 데에 의의를 두자.
배를 채우니 탑승 게이트까지 걸어갈 힘이 생겨 앞으로 나갔다. 중간에 출국심사대라는 복병을 만났는데 넘어가는 게 참 힘들었다. 그 까닭은 우리 몸의 놀라운 생리작용 때문이었다. 땀 배출이 매우 활발한 나의 손은 인천 공항 측 지문 채취 요청을 번번이 거절했다. 그래서 출국심사관이 고작 한 명 일하고 있는 긴 줄에 합류했다. 기다리면서 출국 도장을 빠방~하고 하나 받는 걸 기대했지만, 그런 거 없이 출국심사받고 넘어갔다.
출국심사대 뒤에서 바로 나온 스타벅스에서 카드 실적을 채우기 위해 딸기 요거트 음료를 샀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스타벅스가 되고자 했던 그곳은 Simple is the best를 실천 중인 곳이었는데 음료 제조법을 직관할 수 있었다. 얼음과 요거트를 갈아 시럽을 넣고 섞는 게 전부였다. 가끔 그렇게 너무 단순한 걸 보면 소비 욕구가 떨어지곤 한다.
제조법을 알게 된 요거트 음료를 흡입하듯 마시고 카타르 항공기에 올랐다. 다가오는 월드컵으로 달아올랐는지 비행기에서는 스크린을 통해 축구선수들이 안전 수칙을 알려주고 있었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은 한국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중동 친구였다. 그는 영화 페스티벌에 출품하고 온 영화감독이었다. 대화를 나눠보니 모슬렘임에도 불구하고 족발의 맛을 알아버린 안타까운 친구다. 맛있어서 두 번 먹었단다. 또한 막걸리에 빠졌으니 한국이 모슬렘 한 명을 타락에 빠뜨렸다고 할 수 있다. 그 친구는 한국에서 보낸 광란의 밤을 추억하며 행복한 상태로 돌아갔다.
나는 터키여행을 하고 싶었고, 카타르 도하 공항을 경유하는 항공권을 샀다. 도하 공항에 관한 나의 첫인상은 급조한 미래도시였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깡그리 무시한 듯 아무도 타지 않는 자기 부상 열차가 공항 2층으로 떠다녔다. 곳곳에는 멀쩡해 보이는 아이맥이 있었으나 관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구색만 갖췄지, 실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키치스러운 장식이었다. 도하 공항 청소부들은 놀랍게도 아무도 그곳에 먼지가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1층과 2층 사이 공간까지 열심히 닦았다. 돈이 남아도는 사람들은 상상력이 다른 모양이었다.
그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이스탄불 사비하 괵첸 공항이다. 터키의 입국심사대는 입국에 대한 의지를 꺾어버리겠다고 다짐한 인간이 만든 것 같았다. 입국심사관을 앞에 두고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닿을 듯 닿을 수 없는 구조였다. 헉헉거리며 입국심사를 통과한 내가 가야 할 목적지는 터키여행을 시작하는 곳, 탁심 광장이었다. 수하물을 찾고 나가자 호객꾼들이 몰려들었다. 이보다 저렴한 가격 없다며 탁심 광장까지 두당 10유로를 요구했다. 정보 격차는 여행객을 초조하게 만든다. 짧은 순간 동안 찾아온 불안은 나를 굴복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3분만 걸어가니 4분의 1 가격의 버스가 버젓이 있었다. 다들 한 건 하길 바라는 모양이지만 오늘은 아니다.
탁심 광장까지 가는 버스에서 내 뒤에 탄 아기는 동양인이 신기했는지 ‘헬로’를 연발 중이다. 그래, 나도 반갑다. 아기는 ‘짱구는못말려’의 등장인물 짱아를 꼭 빼닮은 목소리를 가지고 우리랑 소통하고 싶어 했다. ‘아임 그루트’도 아니고 ‘헬로’로 모든 말을 대신하려는 아기의 소통 의지는 잘 전달되지 않았다.
무사히 탁심 광장에 도착하여 숙소까지 걸어서 갔다. 내가 머물게 된 숙소는 어두운 골목길에 덩그러니 놓인 싸구려 여인숙 같은 곳이었다. 비좁고 촌스러웠지만, 냄새가 나지 않았고 깨끗했다. 작지만 큰 소리로 덜덜거리며 미친 듯이 제 몸을 떠는 선풍기 한 대가 유일한 냉방장치였다. 창문을 열면 이스탄불 운전자들이 클랙슨으로 만들어내는 소프라노와 테너의 하모니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숙소 예약 사이트에 옵션으로 끼워져 있었나 본데 미처 확인을 못 했다.
시끄러운 방을 떠나 저녁밥이 기다리는 거리로 나갔다. 식사야말로 터키여행에서 가장 기대가 되는 부분이었다. 현지인들이 찾는 로컬 가게에 들어가 어설프게 아는 터키어로 뭘 추천하겠냐고 따져 물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질문에 식당 주인은 치킨 한 번 맛보겠냐며 닭다리를 건넨다(치킨은 못 참지). 그 식당은 원하는 음식을 골라서 담아 먹는 곳이었는데 닭다리와 파스타라고 우기는 밀가루 덩어리를 먹게 되었다. 나는 ‘과연 터키 음식이란 어디 있는 걸까?’ 물으며 터키여행 속 낯섦과 마주한다.
표지 사진 출처: Unsplash, 사진 작가: Philip Myrto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