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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May 23. 2017

긴하루

‘미연이가 자살했다. 넌 과연 아무관련 없을까.’


상우에게서 문자를 받았던 일주일 전만해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었다. 내가 미연에게 연락한 것이 잘못이긴 하더라도 그녀가 자살할 만한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 응어리마냥 미안함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자살하려했던 그녀는 퇴원했고 문자를 보낸 상우는 중환자실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오늘 출근한다. 아침 아홉시면 내 옆자리에 앉아 하루를 같이 보냈었는데... 마감을 재촉하기도 하고 기삿거리를 귀띔해주기도 하며 주마감을 함께 했었는데...


이제 그를 어떤 식으로 보내야 할까. 보내야한다고 결정해놓고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은 이 마음은 또 어찌할까.


한달 전 미연에게 연락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그녀를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상우를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상우가 품고 있던 미연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드는 건 왜일까. 그녀가 몸이 불편한 사람이라서일까.


미연은 네 살 때 교통사고를 당했다. 부모와 차를 타고 여행가던 날이었다. 마주오던 덤프트럭과 정면충돌하면서 사고가 났다. 앞자리에 앉아 운전하던 아빠와 뒷자리에 앉았던 엄마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미연 혼자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사고로 인해 하반신 마비가 왔고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한다. 걷기는 하나 심하게 절룩거려 걸을 때마다 하늘이 요동친다. 미연은 부모가 돌아가신 게 항상 자기 탓인 것 같아 삶이 무거웠다. 혼자만 살았다는 죄책감을 상우에게 털어놓으며 미연은 위로받고 있었다. 아니 미연은 많은 부분 의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을 짐작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내 마음속에 그가 자리잡은 이후였다.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나야하는 순간이 왔지만 한번만이라도 그를 안아보고 싶은 마음 뿐이다. 상우가 늘 가족같은 친구라고 말하던 미연. 미연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시점이다. 그럼에도 한 번만이라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다. 그를 욕심내선 안되었다.


오후 한 시.


퇴원한 그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밥이라도 먹고 온 것일까. 윤기가 흐르는 얼굴엔 웃음기 하나 없다. 내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간단한 목례로 인사를 한다. 그가 왜 미연을 병원에 데려다주고 그녀의 집에서 번개탄을 피워놓고 죽으려 한 건지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녀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만 확인하는 셈이다. 난 처음부터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상우가 더 이상 그녀의 집에 가지 않는 날이 올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를 만나기 전부터 시작된 그들의 관계는 생각보다 깊었다. 그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남자를 곁에 두고도 그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귀는 걸 마음 편해 할 여자는 없다. 상우는 미연을 오래 알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연인사이보다는 친구사이를 택했다고 했다. 그럼 연인사이인 나는 어떤 의미일까.


미연의 사랑이 집착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괴로운 마음을 알면서도 상우를 놓아줄 수 없는 내 마음이 더 중요했다.


퇴원 후 살이 빠져 볼은 많이 야위어 있었다. 전보다 날렵해진 몸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야하는데 잘생기고 멋있었다. 문을 열고 마주치는데 그에게서 광채가 나다니... 어제까지만 해도 맘을 정리하자고 다짐해 놓고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일단 그가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해야한다. 말도 제대로 하고 있었고 입원했던 동안 놓쳤던 일들도 무리 없이 정리하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 표정이 이내 밝아 졌다. 웃음도 나왔다. 그래서는 안되는데 말이다. 다시는 보아서는 안 될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의 곁에 머물고 있다. 내가 살려줬다는 걸 알기나 한 걸까? 책상에 앉아 물건들을 정리하고서는 나를 쳐다본다.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듯 당당한 표정이다.


“김기자님”


뭔가 따질 게 있는 사람처럼 휴게실로 나를 부른다. 좁은 휴게실에 마주 않아 그의 얼굴을 살짝 보았다. 보고 싶던 그를 지금 마주하고 있다. 손을 뻗어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얼굴도 팔다리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혹여나 움직이는 데 문제가 있을까 조마조마했다. 병원에서 전화했을 때의 어눌했던 말투도 없어졌다.


“여기에서 얘기하기 그러니 커피숍으로 가실까요?”


무슨 얘기이길래 나한테 이러는 걸까? 잘못을 꾸짖기 전 부모같다. 분명 본인이 잘못한 부분도 있는데 내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것 마냥 두고 보자는 식이다. 이젠 그게 기분이 좋든 안 좋든 그와 함께 있는 이 공간이 좋고 얼굴 마주 할 수 있는 이시간이 소중했다. 날 조롱해도 비난해도 그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뭘 더 바랄까?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없을 텐데... 날 사랑한 게 아니었단 말만 하지 말아주길 바랬다.


“어찌됐든 두 분한테 미안한 마음입니다.”


커피숍에 앉아서 처음 꺼낸 말은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미연과 나에게 돈을 빌려간 게 미안하다는 것인가. 두 여자 사이를 오가며 지낸 게 미안하다는 것인가. 자신의 미안함은 한 줄로 정리하고 이후에는 나의 잘못을 따지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한 게 뭘까. 그녀가 항상 맘에 걸려 당사자한테 얘기를 듣고 싶어 몰래 연락한 것인가. 아니면 유부녀인 내가 그를 사랑한 게 잘못이라는 걸까. 남자를 유혹이라도 해서 사귄것도 아니고 서로 좋아하게 된 것인데 유부녀가 왜 그런거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사랑이란 감정이 원인을 규명할 수 있다거나 논리적이지는 않은 것이니까... 우린 처음부터 서로에게 끌린다거나 호기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가 뽑은 직원이 나였지만 첫 대면부터 맘에 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면접을 보려고 했지만 급한 취재로 인수인계하는 직원한테 맡긴 면접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기혼자를 뽑지 않으려던 의도를 무시하고 아무나 뽑아놓고 나가버렸다고 전임자를 탓하던 소리를 우연히 들었다. 휴게실 옆 흡연장소에서 하는 얘기는 귀기울이면 잘 들리기도 한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 의자에 앉아 있는데 내 얘기를 하는 걸 들었다.


“그 새끼는 남자 뽑으라면 여자 뽑고 미혼으로 뽑으라니깐 기혼자를 뽑아놓고 가냐. 애도 있다는데...”


어이가 없었지만 조용히 듣고 있었다. 결혼하고 애가 있는 게 무슨 흉인가. 일만 잘하면 되는건데... 나의 신문편집경력을 보고서도 저런 말을 하다니...


그게 나의 관심의 시작이었다. 그런 관심은 점점 사랑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왜 그러셨어요? 미연이한테 왜 연락한 거죠? 그것 때문에 걔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도대체 왜 그런 거에요?”


미연은 그의 여자다. 늘 친구임을 강조했던 그의 여자. 몸이 불편한 사람한테 깊은 상처를 줬다는 것이다.


자살소동이 있기 전 미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서로의 존재를 알기는 했지만 연락처를 주고 받지는 않았다. 그녀가 하는 사업을 그가 돕고 있었고 홈페이지에도 번호가 광고되어 있어서 연락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동생같은 친구라서 전혀 신경 쓸 게 없다고 했지만 신경이 안 쓰일 수 없었다. 밤늦게까지 야근이라도 하는 날이면 무려 열 번도 넘게 전화가 왔다. 그냥 받아보라고 말하면 밧데리를 빼버리며 하는 말이 요즘 집착한다며 웃어 넘기곤 했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있다보면 그녀의 전화는 일상사다. 귀찮아 하지도 않고 다정하게 통화한다. 남들이 보면 애인하고 통화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사귀는 여자는 옆에 있는데... 그녀가 그를 살뜰하게 챙기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신경이 안쓰일까. 그녀가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일이다. 당사자인 그만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그가 나를 속이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


“안미연이 너만 아니면 된다고 했어. 몸이 불편한 사람이라 안 사귀는 줄 알고 있는데 유부녀인 너를 만나고 있다는 걸 알면 걔가 얼마나 화가 나겠어. 오래 알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미연에 대해 캐물으면 항상 이런 식으로 말했었다. 오래 알고 싶다는 건 그도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는 말로 들렸다. 그녀를 계속 곁에 두고 싶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없어져 버렸으면...’


우리가 만나는 걸 친한 친구는 다 알고 있었는데 유독 미연만 알지 못하도록 했다. 결혼한 남자가 부인한테 밖에서 여자 만나는 걸 숨기는 것처럼...


왜 미연이 알면 큰일 날 일일까. 동생같은 친구라면서..


그녀에게 연락해보면 속시원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녀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면 난 어떻게 해야할까?


미연과 문자를 주고 받았다. 미연은 천연화장품을 제조해서 판매하기도 하고 클래스도 운영하고 있었다. 상우가 사무실에 미연의 화장품을 가져와 팔기도 하고 주문받아주기도 했었다. 화장품에 대해 문의를 하려고 해도 상우는 중간에서 자기가 연락하겠다며 직접 전화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미연에게 내 소개를 하자 알고 있다며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화장품에 대해서만 얘기하며 차마 본론은 꺼낼 수가 없었다. 이런 내맘을 읽었던가. 기왕 연락한 거 할 말 있으면 해보란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느냐고 물어 볼 수는 없는 일. 사랑한다고 하면 내가 그를 떠나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하고 싶던 말은 차마 꺼내지도 못하고 다른 얘기만 해버렸다. 마지막엔 그한테는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으로 끝맺었다. 그에 대해 물어볼 용기도 없으면서 문자를 보낸 게 내내 후회스러웠다.


“미국 드라마 보면 남자가 여자친구 집에 자연스럽게 드나들며 같이 살잖아요.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도요. 그렇게 생각했어요.”


여자 혼자 사는 집, 그것도 몸이 불편한 사람인데다가 사귀자고 매달리는 여자 집에 드나드는 게 옳은 거냐고 묻고 싶었다. 반박할 겨를도 없이 우리의 만남이 잘못된 것이니 끝내야 한다고 강한 어조로 말한다. 왜 나한테 감추고 숨겼느냐고 묻고 싶었다. 한달에 몇 번씩 그렇게 그녀의 집에 가서 시간 보내줘야 했다고 말하고 있다. 무슨 의무감인가. 결혼한 부부사이도 아닌데 집에 가서 시간을 보내줘야할 의무가 있다니.


상우는 내가 결혼한 여자인 것도 알고 있었다. 별거중인 것도 알고 있었고 애가 있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나의 상황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 불륜인 걸 알면서 시작했음에도 이제는 나를 질타하고 있다. 내가 어떤 식으로 맘을 정리할지 내 마음이 어떨지는 궁금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저 미연을 괴롭힌 이상한 여자가 돼버렸다. 내 입장과 연락한 의도를 설명하고 싶었지만 구차한 변명일 뿐 상황이 달라질 건 없다.


커피숍에 있는 내내 상우는 계속 말하고 있었고 나는 듣고 있었다. 상우는 나를 질책하고 있고 나는 자책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끝나는 걸까.


미연만 없었더라면...


탁자 위의 커피는 한 모금도 마시지 못 한 채 식어가고 있다. 그의 마음처럼...  끝내고 싶은 그의 마음은 진심일까. 나에게 투자명목으로 돈을 빌려간 것처럼 미연에게도 삼천을 받아 주식투자를 했다. 정말 주식에 투자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난 굳게 믿고 있었다. 나와 사귀는데 미연과 아무일도 없었고 건넨 돈도 투자했을거라고...


상우는 똑똑한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을 재빨리 읽어내 대화를 리드해나간다. 상대방이 원하는 걸 금방 알아챈다. 문자를 보내면 답장도 재빨리 보내줬다.


미연에 대해 물으면 내가 이해할 수 없을 거라며 매번 교묘하게 답변을 미뤘다. 투자명목의 돈도 투자확인서까지 써주며 나를 안심시켰다. 


상우는 돈을 받은 미연도 챙겨야했고 사랑하는 여자도 놓치고 싶지 않았을게다. 사랑하는 여자인건지 돈을 빌려야만 했던 여자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의 훈계를 듣고 우리의 관계를 끝내야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커피숍을 나왔다. 식어버린 커피와 그의 마음을 두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짧은 사이 그에게 마지막 이야기를 건넸다.



"미연씨가 남편을 찾아왔어요. 그리고 본인이 상우씨의 동거녀라고 주장했어요. 전세금을 빼서 주식에 투자하라고 했다고...   아이들을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협박하던 사람들이 바로 미연씨가 흥신소에 부탁했던 사람들이였어요. 미연씨는 우리의 카톡내용을 클라우드에 저장해놓고 보고 있었어요. 상우씨가 미연씨 집에 가서 잠들면 핸드폰 비번을 알아내서 다 보고 있던 거에요. "


상우는 습관적인 발걸음으로 미연을 집을 찾는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술을 마셨어도 미연의 집에 가는 길은 그의 두 다리가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오늘도 상우의 걸음은 미연의 집을 향한다. 일주일에 세 번은 꼭 미연의 집을 찾았다. 김기자와 헤어진 이후에도 여전하다. 미연은 마치 자석같았다. 그녀가 아예 근처에 없다면, 멀리 이사라도 갔다면 찾지 않을텐데 미연이 거기에 있어서 갈 수 밖에 없다. 사랑하지 않는 여자. 미연.


상우는 다음주에도 미연의 집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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