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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듬 Feb 05. 2023

모래와 진흙의 심상: 이분법을 흩뿌리고 짓이기기

독후감 <가재가 노래하는 곳> _Delia Owens

<가재가 노래하는 곳>, 살림출판


  모래는 진흙보다 비밀을 잘 지킨다


소설<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습지의 다양한 생태적 양상을 문학적 비유와 심상을 통해 독특하게 풀어낸다: 가볍게 흩뿌려지고 쓸려가는 모래, 찐덕이며 엉겨 붙는 진흙. 한낮의 양광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가도 밤이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모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어둠의 늪이었다가도 달이 뜨면 거울과 같이 달빛을 영롱히 비춰내는 진흙. 누르는 무게에 힘없이 푹푹 꺼지는 모래, 눌린 무게만큼 단단해져 빠져나올 수 없게 잡아끄는 진흙….


  모래와 진흙은 서로를 견디고 선 것으로, 이 책에서 독특한 심상을 가지고 등장하는 상징요소들이지만, 모래와 진흙은 단순하게 빛과 어둠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지향으로서의 습지와 지양으로서의 늪이라는 단편적인 이분구도를 취하지 않는다. 책은 모래와 진흙의 여러 가지 심상을 통해 다양한 생명의 토양으로서 삶의 찬란하고 아릿한 면모를 풍부하게 그려낸다.



첫 번째. 모래의 심상



스미는 것들

"콕집어 말할 수 없는 때가 오자 심장의 아픔이 모래에 스며드는 바닷물처럼 스르르 스며들었다. 아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더 깊은 데로 파고들었다. 카야는 숨을 쉬는 촉촉한 흙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그러자 습지가 카야의 어머니가 되었다."

엄마와 형제들, 그리고 아버지까지 카야를 떠나고, 홀로된 카야는 다친 발을 스스로 치료한 후, 모래 위에 섰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 어언 수개월 째, 홀로서기가 아직은 어색한 카야에게, 홀로됨의 상처는 민간요법으로 엉성히 자가치료하여 나은 발등의 흉터와 같다. 그것은 카야가 처음으로, 부모의 도움 없이 하지 못했던 것을 홀로해낸 경험의 흔적이고, 혼자였기에 당황스럽고 아팠던 기억이기도 하다. 함께이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카야의 삶이, 혼자여도 살아지기 시작하는 즈음 예고 없이 통증이 스며든다. 모래와 같이 연약한 어린 카야의 삶에 외부세계의 것들이 스며들기 시작할 즈음, 아프게 느껴지는 엄마의 빈자리는 습지로 채워진다. 카야에게 스미는 것들은, 파도를 한껏 머금고 단단해진 모래바닥과 같이 카야를 단단하게 했다. 


견디고 설 곳으로의 모래밭

“카야는 다리를 한쪽으로 모으고 모래밭에 앉았다. 커다란 갈매기 한 마리가 카야 곁의 모래사장에 내려와 홰를 쳤다. “나 오늘 생일이야.” 카야는 갈매기에게 말했다.”
“해변에서, 아직 태양의 온기가 남은 모래에 누워 갈매기들과 게으르게 뒹굴며 저녁시간을 보냈다.”

모래밭은 카야의 외로움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공간적 배경이다. 모래를 카펫삼아 디디고 앉아 파도와 갈매기가 들르는 곳에서 카야는 외로움의 시간을 견딘다. 모래는 뜨거운 대낮에 태양의 온도와 그 빛을 머금기도 하고, 싸늘한 밤에는, 찬 밤공기와 달빛을 머금고, 마를 적에는 입자 사이사이 공기를 머금었다가, 스치는 파도에 물을 흠뻑 머금기도한다. 모래는 모래의 방식대로 한시적인 기억을 품는다. 이내 날라가고, 흩어지고, 쓸려나갈 것이지만, 모래에 가만히 앉아 모래의 기억에 귀 기울이며, 카야는 모래밭을 견디고 설 곳으로 만들어 나간다.


 관계의 길목, 카야의 사회적 출입구

“마침내 초저녁이 되자 아버지가 모래밭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래도 엄마가 악어가죽 구두를 신고 모래밭길을 따라 올지도 모른다고.” 

모래밭은 카야를 둘러싼 외부인, 카야의 사회관계를 구성하는 인물들이 카야의 삶으로 들어왔다 나가는 길목의 역할을 한다. 발이 푹푹 꺼지는 모래밭은 어쩐지 카야의 삶으로 쉽게 진입하려는 것들의 저지대이자, 카야의 외로움이 머무는 곳으로서 역할하기도 한다. 만남의 장소이자 떠나가는 장소. 오가는 발자국들만이 희미하게 남아, 카야를 추억에 잠기게 하곤 한다. 카야의 삶은 모래밭에 덩그러니 선 집채처럼, 다가오는 것들을 맞이하고 떠나가는 것들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제자리에 선 인생이었다. 생존을 위해 홍합을 캐러 나가거나, 점핑 부부를 만나거나, 책 집필을 위해 시내에 나가는 카야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활동의 바깥에서, 카야는 줄곧 누군가의 방문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이들과의 재회를 하염없이 그리는, 모래밭의 삶에 고립되어 있었다. 


무질서의 질서: 파고들고 감추는 곳

“조류와 장엄한 노도와 이 모래사장이 공모해 정교한 그물망을 짜낸게 틀림없다.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조개 껍데기의 표본들이 사방에 널려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카야는 자기 역시 체이스에게 해변의 예술작품 같은 게 아닐까 두려움이 앞섰다. 손으로 이리저리 뒤집어보다가 모래밭에 휙 던져버릴 신기한 조개껍데기 같은 존재.” 

모래밭은 많고 흔한 것들이 질서없이 흐트러져, 모든 것들이 ‘특징 없음’으로 감춰질 수 있는 공간이다. 흐트러진 무질서의 덩어리 자체가 마치 그물망을 짜낸 것과 같은, 한 편의 예술 작품과 같은 질서를 만들어내는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모래는 무엇인가 파내어지고 발굴되는 곳이 되기도 한다. 특히 연구자와 수집가로서의 카야에게 있어 모래밭은 조개껍데기의 전시장과 같았다. 카야가 체이스와의 관계 속에서 사방에 널린 조개껍질에 자신을 이입한 것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으나 ‘인식’되지 못했던 그녀의 모래밭 속 삶이 이따금씩 외부인의 호기심에 의해 발굴되는 처지가 조개껍데기와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다 모래밭에 다시 던져지고는 누군가의 발굴을 기다리는 존재로서 감추어지는 것이 카야는 두려웠다. 무질서가 이루는 한바탕의 배경 속에서 정교한 질서의 예술을 알아봐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말이다. 



두 번째. 진흙의 심상



빛이 삼켜지거나 미끄러지거나

“늪이 진흙 목구멍으로 빛을 다 삼켜버려 물은 잔잔하고 시커멓다. 늪의 소굴에서는 야행성 지렁이도 대낮에 나와 돌아다닌다.” 
“미끈한 진흙이 선명한 달빛에 반들거리고 수백 마리의 반딧불이 숲 속에서 점점이 날아다녔다.”
“카야는 환한 달과 진흙 위에서 파득거리는 하루살이의 투명한 날개 사이에서 춤을 추었다.”

모래보다 고운 입자가 습기와 함께 엉긴 진흙은 모래와 전혀 다른 질감을 만들어낸다. 진흙의 늪지대에서는 소리도, 빛도 삼켜져 고요하고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낮 동안 삼킨 빛은 해가 진 어둠 중에 뱉어져 달빛과 반딧불이와 함께 표면 위에서 매끄럽게 미끄러진다. 체이스와 사랑에 빠진 카야는 체이스를 생각하며 은밀한 늪지대의 무대에서 진흙위로 미끄러지는 점점한 빛들을 조명삼아 춤을 춘다. 늪지대는 카야에게 소리 없는 밤바다이다. 

덩어리의 무게

카야의 가슴에 검고 고운 진흙 덩어리처럼 묵직한 슬픔이 얹혔다. 

카야의 엄마가 집을 떠난 날, 먼 여행을 떠날 때에나 들던 파랑 가방을 들고 엄마가 시야에 사라졌을 때, 카야의 가슴에는 커다란 진흙 덩어리와 같은 슬픔이 얹혔다.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리고 흘러내리는 진흙은 카야의 마음속에 용해되지 않는 끈덕이는 슬픔으로 남았다. 진흙은 너무도 고와 결코 닦이지 않고 얹힌 자리에 자국을 남겨 더럽힌다. 잡으려 해도 틈을 찾아 비껴 사라지는 고운 모래와 달리, 진흙은 서로 엉기는 힘으로 그 무게를 버티고 선다. 


빨아먹고 삼키는 물질

“엄마는 상처가 나면 꼭 소금물에 담그고 여러 가지 고약을 섞은 진흙을 발라주었다. (…) 카야는 비단처럼 부드러운 흙에 살며시 발을 쑤셔 넣었다. 이곳의 공기는 서늘했고 독수리 울음 소리를 들으니 힘이 났다.”

그 누구도 카야를 보호해줄 사람이 없이 홀로된 카야는 못을 밟아 생긴 상처를 스스로 치료한다. 고통은 타오를 듯 화끈 거린다. 녹슨 못의 독소와 염증의 뜨거운 통증을 빨아들이는 진흙은 정화의 냉기를 품고 있다. 진흙이 가지고 있는 서늘한 공기는 엄마와의 기억이 가지고 있는 치유의 힘을 싣고, 달아오른 환부를 가라앉히고, 상처를 부드럽게 덮는다.


 엉겨붙는 장애물

“진흙탕을 헤치고 사랑의 종적을 따르는 마음”
“카야는 진흙탕에서 빠져나올 근육과 심장을 끝내 찾아내곤 했다. 아무리 위태롭더라도 다음 한 발을 내디뎠다.” 
“물길을 누비며 순항하는가 싶었지만, 엄마는 사실 배를 잘 몰랐고, 얕은 석호로 들어가 타르처럼 찐득한 검은 진흙에 좌초되고 말았다. (…) 진흙 범벅이 된 서로의 얼굴을 보고 꺅꺅 소리를 질러대면서 배가 훌훌 물에 뜰 때까지 밀었다. (…) 여자 네 명이 좌석에 다 못 앉고 보트 바닥에 나란히 끼어 누워서 다리를 하늘로 치켜들고 발가락을 꼬물거렸다. 분홍색 발톱이 진흙을 뚫고 반짝거렸다. (…) 자매랑 여자친구들은 그래서 좋은 거야. 아무리 진흙탕이라도 함께 꼭 붙어있어야 하는 거야. 특히나 진창에서는 같이 구르는 거야.”

진흙은 모든 움직이고자 하는 몸부림을 붙들어 놓고 정체시킨다. 때로는 진흙이 붙드는 것이 사랑의 종적을 좇는 발걸음이기도 하고, 실연의 아픔 속에서 잃어버린 근육과 심장이기도 하다. 진흙탕을 헤치며 나아가는 듯한 열정적 사랑을 나누었던 테이트와도 피할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이 찾아왔고, 카야는 실연의 진흙탕에서 엉망이 되어버린 몸과 마음을 붙들고 다시 힘을 내어 위태로운 한 발을 디뎠다. 엉겨붙는 장애물로서의 진흙탕은 또 한 편으로는, 여성들과의 끈끈한 유대로 함께 붙어서 이겨내어야 하는 난관이기도 하고, 다같이 한바탕 구르며, 유쾌한 연대로 승화시켜낼 수 있는 씨름장이기도 하다. 카야에게 선명히 남은 엄마와의 진한 유대는 온몸을 더렵혀 진창을 뒹굴었던 기억이었다. 


생명활동으로 부패시키는, 삶과 죽음의 터전

“소리가 없진 않으나 습지보다는 늪이 더 고요하다. 부패는 세포단위의 작업인 탓이다. 삶이 부패하고 악취를 풍기며 썩은 분토로 변한다. 죽음이 쓰라리게 뒹구는 자리에서 또 삶의 씨앗이 싹튼다. 죽음을 속속들이 아는 늪으로서는 비극도 죄도 아무 일도 아니다.”

늪은 다양한 미생물과 식물의 생명활동을 통해 유지되는 다양한 생물의 서식지이다. 늪은 동시에 역으로 부패작용을 통해 죽음이 소리 없이 소화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가장 활발하게 생명 활동하는 공간으로서 늪은 죽음의 이미지와 병존한다. “꾸물거리는 농게, 진흙에서 허우적거리는 가재” 등 ”살아있는 것들이 겹겹이 쌓여 꿈틀거”리는 늪 속에서 삶과 죽음은 교차한다. 늪에게 죽음은 늪 자신의 일부이다. 늪에게 죽음은 생명활동의 한 쪽 끝에 놓여있는 종말일 뿐이다. 죄와 비극은 인간사의 언어이다. 인간세계에서 죽음은 비극이고, 죄의 결과이다. 그러나 늪은 죄를 모른다. 카야의 비밀을 지켜준 늪은 공범이지만, 늪은 잘못이 없다. 


자취의 보고 

“길을 따라 걸으며 다른 차량의 자취를 찾는 동안에도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모래알이 흩날리며 아무렇게나 푹푹 파였다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망루 근처로 오면 진흙에 팬 구멍들과 늪지에 수없는 구구한 사연들이 상세히 펼쳐졌다. 너구리가 새끼 네 마리를 데리고 흙탕물에 들어갔다 나온 자국. 달팽이 한 마리가 그리던 레이스같은 무늬가 곰의 등장으로 끊어진 자국. 작은 거북이가 납작한 접시처럼 배를 뒤집고 서늘한 진흙에 누워 있던 자국. ”

진흙은 무게를 가진 모든 생명의 자취가 기록되는 늪지의 보고서이다. 소설의 전반을 관통하는 체이스 앤드루 살인사건의 미스테리는 역설적이게도 어떤 비밀도 존재하기 어려운 늪지 위에 위치한다. 가장 흔적을 뚜렷이 남기는 진흙 위에 의문스러운 죽음이 놓인다. 

체이스의 죽음은 카야에게 가해졌던 폭력의 상징적 죽음이다. 자신의 욕심을 따라 카야를 소유하고자 카야를 더욱 소외시키고 착취했던, 폭력에 대한 습지의 응징이다. 카야는 자연의 공조로 완전범죄에 성공한 것이다. 서서히 부패되어 가는, 차디차고 음침한, 그러나 달라붙고 질척이는 늪 위에 남은 자취는 체이스 그 자신이 누워있던 흔적 뿐이다. 



세 번째. 다시 모래의 심상



껍데기들, 사체가 체류하는 곳, 가벼운 것들이 표면에 잔류하였다가 다시 휩쓸려가는 곳

“부서진 연체동물과 갑각류의 사체가 날카롭게 발을 찌르는 모래밭에 섰다. 체이스의 조개껍데기를 바라보다 모래에 툭 떨어뜨렸다. 다른 조개들과 하나도 다를 것 없어 보이는 그 조개껍데기는 곧 사라졌다. 밀물이 들어오고 있었고, 파도가 발 위로 솟아올랐다 수백 개의 조개껍데기를 끌고 바다로 돌아갔다. 카야는 이 땅과 이 물의 생명체였다. 이제 그 땅과 물이 카야를 다시 받아줄 것이다. 그녀의 비밀을 깊이 묻어줄 것이다.” 

여느 생명체가 그러하듯, 카야도 그 검고 긴 머리가 “모래처럼 하얗게 세었”을 즈음 자연의 순리에 따라 세상을 떠난다. 카야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테이트는 그녀를 사랑했던, 그녀의 곁이 되어 주었던 소설 속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테이트가 죽은 체이스의 목에 걸려있어야 했던 조개껍데기를 발견하고는, 비밀을 지키는 모래 위에 놓아준 것은, 카야에 대한 모종의 장례의식과도 같다. 흩어져 머무르다가 이따금 씻어 내려가는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밭이 조개껍데기가 원래 있어야 할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잠시 잔류하였다가 어떠한 엉김과 질척임 없이 파도의 이끌림에 따라 바다로 돌아가는 모래는, 운명을 맞이하는 뭇생명의 모습, 그리고 카야의 마지막을 닮았다. 




  카야의 터전인 습지에서, 모래는 모래대로 진흙은 진흙대로 양가적인 속성을 동시에 지니는 자연공간으로 등장한다. 모래와 진흙의 대비되는 듯 보이는 심상 속에서 모래밭과 진흙 늪지 모두 카야와 카야를 둘러싼 자연생물들의 중요한 삶의 터전이자 생명의 공간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란, 각 생물과 생태계의 속성이 우직하게 빛나는 곳이 아닐까.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 카야를 둘러싼 인간관계, 폭력, 사랑, 삶과 죽음이 펼쳐지는 장이자, 그 모든 복잡다단함과 괴리되어 한결같이 고요하고, 항상성을 띠는 공간이기도 하다. 도덕과 윤리, 비극과 희극, 인간사의 복잡함이 생태계라는 가장 최선의 질서 속에서 완전히 뭉개져 버리는 곳이다.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습지와 늪지가 이루는 다양한 질감 속에서 우리는 삶의 면모를 투영하며 다양한 심성을 획득하고, 그것이 가장 탁월하게 묘사된 책이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아닐까 싶다.  


  모래밭의 조개처럼 인식되지 않는, 인간사회와 괴리되고 고립되어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여겨지는 ‘야생’ 속의 아이, 카야는 외로움으로 세워졌다. 테이트와 점핑부부와의 교류를 시작으로, 연구가로서 작가로서 그녀가 인간세계에 사회적 관계를 지니는 성원으로 ‘정체화’되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습지를 떠나 시내로 나가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카야는 ‘마을 사람들’이라는 타인에 의해 ‘마시 걸’로 명명될 뿐, 인간사회에서 그녀가 어떤 독립적인 정체성을 가지는 주체로서 등장하지 못했다. 방문되는 존재로서 야생의 카야는 마치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의 자연과 같았다. 미지의 자연은 인간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듯,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녀를 멋대로 이름 짓고 대상화하였다. 사람들의 호기심과 편견이 그녀를 해치기도 하고, 더욱 고립시키고 외롭게 하기도 했다. 곁이 되어줄 사람이 없었던 카야는 습지의 아이가 되었다. 대지를 어머니 삼고, 갈매기를 벗 삼은 그녀는 자체로 자연이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펼쳐내는 모래와 진흙의 심상 속에서 문명과 인간 그리고 자연과 야생은 조화한다. 자연은 선과 악을 초월한다. 빛과 어둠, 인간사의 슬픔과 고통, 윤리와 도덕, 문명과 야만의 모든 이분법은 습지의 질서 안에서 무의미하다. 카야의 응징은 늪 위에서 썩어지고, 조개껍데기는 제 자리를 찾아 모래 위에서 파도를 맞이한다. 인간에 의해 소외되고, 반짝이는 조개껍데기처럼 인간에 의해 ‘발견’되었던 카야는 다시 모래밭으로, 흩어짐의 질서로 돌아간다. 이로써 그녀는 모래의 질서로서 다시금 ‘감추어졌고’, 그녀의 살인은 비밀을 기억하는 늪지의 질서로서 삼켜졌다. 카야의 삶을 재단하고자 했던 인간사의 이분법들은 습지 속에서 모래와 같이 흩뿌려지고, 진흙과 같이 짓이겨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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