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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듬 Jul 26. 2018

사이에서 자라는 것들

잡초도감 만들기 프로젝트



누군가 나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냐고 물었다.

너무 땅만 보고 걷는다고 말이다.

땅만 보고 걷는 버릇.

잡초도감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나서 생긴 버릇이다.

땅을 보고 걷다 보면 보도 블럭 사이, 아스팔트 깨어진 틈새 사이로 솟아 나온 생명들을 발견할 수 있다.

거기 있어선 안 되는 것들. 딱히 의도적으로 심지 않았는데 어느샌가 자라나는 것들.

우리는 그런 풀들을 '잡초'라고 부른다.

잡스러운 풀들이라고 말이다.

이름부터가 다분히 편견이 가득하다.

잡스럽다니!

인간은 왜 인간의 손으로 직접 심은 꽃들에겐 이름도 붙여주고 정성스레 가꿔주면서,

아무도 심지 않은 곳에 자라는 풀들의 생존을 잡스럽다 폄하하는 것일까

풀들에게 감정이입을 했는지 괜스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5월 중순 무렵,

나무님과 지수님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잡초도감 첫 모임을 가졌다.

지수님은 '식물 박사님'이셔서 어느 풀을 보든 무슨 과인지, 꽃과 열매는 언제, 어떻게 피고 맺히는지를 아셨다.

지수님이 "이 친구는 줄기에서 냄새나는 노란 즙이 나와서 스스로를 보호해요"라고 하셔서 줄기 끝을 살짝 뜯어보면 정말로 노오란 즙이 나왔다. 그리고 냄새도 아주 고약했다.

식물들을 관찰할 때 어떤 점을 유의 깊게 관찰해야 하는지 짚어주시고, 후각과 촉각을 이용해 관찰하는 방법 등도 알려주셨다. 듣고 나니, 눈으로 보기엔 다 똑같아 보이는 줄기도 손으로 만져보니 어떤 건 둥글둥글 매끈하고, 어떤 건 뻣뻣하게 각이 져있고, 어떤 건 보슬보슬 털이 나있었다.



냇가에 무성히 자란 풀을 관찰하는 나와 지수님. 사진은 나무님이.



가장 첫 날에 그린 잡초. 수채용법이 익숙치 않아 채색이 서툴다.


    잡초를 그리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정된 시간 안에 그 자리에서 빠르게 특징을 잡아내 스케치를 하고, 물통을 들고 가 즉석에서 채색까지 하는 것은 나 같은 미술 초보자에겐 무리였다. 스케치만 간신히 하고, 채색은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참고해 기억을 더듬어가며 했다. 물론, 즉석에서 스케치와 채색 모두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갓길에 쭈그리고 앉아 스케치를 하고 있다 보면 발이 저리고 다리가 떨려 채색은 매번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나에겐 채색도 커다란 도전이었다. 수채화는 내가 평소에 사용하는 익숙한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수님은 색연필 같은 다른 편한 도구로 해도 괜찮다고 하셨지만, 수채화가 주는 얇고 은은한 느낌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굳이 수채화를 고집했다. 비록 실제와 그림 사이의 괴리감이 다소 생기긴 했지만.


     매주 계획은 변경됐다. 한 잡초를 2주 이상 관찰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루는 내가 전 주에 그렸던 세 개의 잡초가 모두 사라지는 미스터리 한 사건도 있었다. (주변의 잡초는 모두 멀쩡한데 말이다.)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가 내가 그린 잡초만 뽑아가는 게 아닐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중간에 뽑히지만 않는다면 장차 커다란 나무가 될 친구들. 옆에 있었던 나무들로부터 씨앗이 떨어져 자랐다.

    우리의 원래 계획은 일주일에 한 번 씩, 세 개에서 네 개의 식물을 한 달여간 관찰하고, 매달 관찰 장소와  식물을 바꿔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씩 관찰하는 게 너무 자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해서, 주마다 관찰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별다른 변화가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매주 똑같은 그림만 반복해서 그리다가 금방 질려버리면 어떡하지 걱정도 했었다. 하지만 잡초의 성장 속도는 우리의 예상을 뒤엎었다. 잡초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했다. 있었던 꽃잎이 온데간데 없어지는가 하면, 없었던 잎이 생겨나기도 하고, 키가 쑥쑥 자랐다. 변화를 기록하기는커녕 저번 주에 그렸던 잡초를 다시 찾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일이 되었다. 잡초의 성장이 빠르기도 했거니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가 너무 많았다. 우리가 간과했던 것 한 가지. 잡초는 사람들의 '눈엣 가시'라는 것. 저번 주에 푸릇푸릇 멀쩡히 만 살아있던 잡초가 다음 주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길목 공사로 우리가 그렸던 서너 개의 잡초가 몽땅 아스팔트로 덮여버리는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우리가 구석에서 열심히 잡초를 스케치하고 있으면, '왜 별 쓸 데도 없는 것을 그리고 있느냐', '이번 주에 이 잡초를 뽑아버릴 계획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지나가는 주민들도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다음 주에 그 잡초는 거짓말처럼 자리에서 사라졌다.




가장 최근에 그린 잡초. 작은 보라색 꽃잎이 예뻐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길가에서 잡초를 그리고 있다 보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 풀벌레 소리, 그리고 선선한 바람과 흙냄새가 참 좋았다. 내가 그동안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지나쳤던 것들은 단지 잡초뿐만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조용히 멈춰서 그림을 그리는 순간의 바람, 벌레, 흙, 공기 하나하나도 이전의 나의 일상에선 잡초 같은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평소에 무심하게 지나갔을 길 구석에 멈춰 서서, 보아도 보지 못했을 존재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순간 자체가 주는 평안, 가득 찬 느낌이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오후에, 지극히 일상적인 장소에서 잡초를 그리는 행위 하나가 그 순간을 전혀 평범하지 않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잡초를 그리면서 그 식물의 이름이 궁금해 열심히 찾아보곤 했다. 나름 친해지고 싶었달까. 애정을 갖고 싶었다고 해야 하나. 이름을 알면 더 가까워질 것 같았고, 이름이 없다면 기꺼이 지어줄 용의도 있었다. 처음엔 그렇게 이름에 집착하다시피 했으나, 한 주 한 주가 지나가고, 새로운 잡초들을 만날 때마다 그런 시도가 무의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굳이 이름을 짓고, 어떠한 존재로 명명하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인간의 욕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새로운 잡초밭을 물색하던 중이었다. 담장과 아스팔트 사이에 이름 모를 식물이 자라 있었는데, 모양이 아주 독특하고 예뻤다. 지수님은 이내 두리번두리번거리시더니 담장 안쪽의 주택 정원에 무성하게 자란 덤불을 가리키셨다.

"이 식물에서 씨앗이 떨어져 자란 거네요."

그 정원의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그 식물에 물을 주고 있었다. 군데군데 핀 꽃이 정말 예뻤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안쪽의 것은 가꿔진 식물이었고, 그 바깥의 것은 잡초였다.

잡스러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가 이렇게나 모호하다.



잡초를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하기 위해 애쓰는 나. 뭔가 애잔하다.



    얼마 전에 지인이 새로 이사를 했다고 해서 방문을 했다. 마당으로 보이는 곳에 풀들이 무성했다. 지인은 아직 집 정리가 덜 되었다고 멋쩍게 웃었다. 초록색이 보이면 유심히 보는 게 습관이 되어 주의 깊게 관찰을 하고 있는데, 내가 그린 애들과 닮은 풀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군데군데 강아지 풀도 솟아있었는데, 바람이 부니까 한꺼번에 흔들리는 것이 장관이었다.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말.


정원이 정말 멋지네요



진심이었는데.

집주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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