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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듬 Jan 09. 2023

낯선 중국

기사 읽기- ‘혐중’의 시대, 연결을 위한 단상

http://platformc.kr/2022/05/solidarity-between-korean-and-chinese-people/


   주기적으로 연락을 하며 지내는 중국인 친구가 한 명 있다. 매주 두 세시간 씩 영상 통화를 하며 언어교환을 하다가 각자 바쁜 일정 때문에 가졌던 휴식기에 베이징 올림픽이 있었다. 나는 한국 내에서 순식간에 대중적 감정으로 전면화되는 반중정서에 당황했고, 한국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공유되고 있었던 중국인들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감정들이 올림픽이라는 국제적 교류의 계기를 통해 중국인들에게도 알려지게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서둘러 접속해본 중국의 SNS에 한국을 키워드로 검색해본 결과는 처참했다. 나는 한국 못지않게 중국에서도 반한 감정이 만연해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이 중국에 대해 가지는 ‘카피캣’이라는 편견이 한국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공유되고 있었고, 올림픽과 관련된 한국의 문제제기와 공격에 대해 중국 네티즌들은 분노하고 조롱하고 있었다. 네티즌들의 태도는 한국의 것과 매우 닮아 있었고, 마치 봐서는 안 되는 뒷담화를 봐 버린 것처럼, 마음은 착잡하고 의기소침해졌다. 올림픽 이후로 친구에게 전화하는 것이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양국에 만연한 반감에 대해 우리는 암묵적으로 애써 말하지 않기로 해왔지만, 이제는 이것이 무시할 수 없는 우리 사이의 ‘이슈’가 되어버린 것이다. 


“원래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인터넷 공간에 항상 있어 왔어. 인터넷은 소수의견이 과잉대표되는 공간이니까.” 훈훈한 분위기로 오랜만의 통화는 마무리되었지만, 나는 요즘 넷상의 중국에 대한 인종주의적 흐름이 더 이상 ‘소수의견’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나는 이러한 흐름이 기사가 설명하듯 가짜뉴스, 정동정치의 동원 등 외부보다는 내부요인에 의해서 확대 재생산되었다는 분석에 동의한다. 기사는 “한 사회에서 내셔널리즘은 내부의 모순이 기존의 제도 정치와 통치 시스템에 의해 해결되지 못하고, 사회변혁의 경로가 차단되어 있을 때 대두된다”고 말하며, 내셔널리즘이 고조되는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막연하게 내셔널리즘을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응방식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글은 취업난이나 저임금, 장시간 노동, 미래에 대한 불안 정서 등 초국가적인 계급적 억압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해법’을 제시한다. 자국 사회의 내부적 모순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 곧 이에 맞서는 초국가적 연대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주침의 기획으로서 마침내 편견은 자연히 무화될 수 있다. 


나 역시 시민사회 교류활동을 계기로 일본과 중국 양국에 대한 마주침의 물꼬를 트게 된 케이스로서 시민사회의 연대의 기획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에도 많은 중국인 유학생들과 조선족과 같은 중국계 이주민들이 있지만, 오히려 이들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 인식의 공유가 또다른 혐오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모든 마주침이 반드시 연대의 효과를 보장하리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결국은 어떤 태도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상대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 어떠한 마음의 자리도 내어주지 않는 비관용적인 태도들은 마주침 속에서도 그들의 태도 속에서 편견을 확인하는 증거들을 찾아내고, 무례하게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제공한다. 레이시즘에 대한 교육과 인식의 부재한 까닭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제껏 한국의 인종주의에 대한 인식은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구호에 머물고, 차별 역시 단순히 윤리적으로 옳지 못한 행동 정도로 해석되지, 인종이라는 범주의 허구성, 차별이 그 위계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대해 제대로 교육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 내에 통용되는 이러한 최소한의 ‘상식’이 부재하기에 너무 터무니없는 혐오가 유통되는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넷상에서 난무하는 가짜뉴스와 선동이 내셔널리즘과 인종주의에 의해 추동되는 현상이 과연 단순히 가짜뉴스의 유통을 막고 헤이트 스피치를 막는다고 해소될 수 있을까? 이미 뿌리박힌 편견과 고착화된 인식은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나는 가짜뉴스에 대한 모니터링과 동시에 중국에 대해 사람들이 더 들여다보고 더 알 수 있는 창구들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보통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일부 중국인들’의 예외적 사례가 아니라, 기존의 인종주의적 인식을 깨부수는, 편견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반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기사와 논문을 보며 근래에 읽었던 <문턱의 청년들>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이 책은 중국과 한국 청년들이 고민하고 있는 젠더문제, 결혼, 비혼, 도시의 주거문제와 불평등문제, 스타트업 청년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하게 소개하며 초국가적 청년문제를 통해 한중청년의 ‘연결’을 시도한다. 책에서는 우리의 경험 세계에서 ‘한국’과 ‘중국’, ‘서구’를 명확히 구별하기 어렵다고 말하며, 초국적 사회에서 ‘네이션’을 말하는 것의 무용함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나는 사회구조의 억압 속에서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각자의 일터와 삶터에서 작은 실천을 만들어내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통해 처음으로 무언가 ‘연결’을 느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의 경험들, 사람의 이야기들이 더욱 주목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에 대한 보도는 이미 너무 강하게 ‘중국’이라는 국가의 이미지를 경유하기 때문에, 그것을 걷어내기 위한 시도로서 중국인에 대한 ‘낯선 그림들’ —어쩌면 중국의 역사 속에 꾸준히 존재해온 ‘익숙한 그림들’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모습들이 더욱 공유되어져야 한다고 느낀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낯선 중국’이 필요하다. 


*2022년 5월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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